9월13일 누가 크냐?(1)

조회 수 2013 추천 수 11 2008.09.13 09:37:57
2008년 9월13일 누가 크냐?(1)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가버나움으로 들어오면서 서로 토론한 게 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제자들은 아무 소리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고난 받고 죽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두 번이나 전해들은 가운데서도 “누가 크냐?” 하는 말싸움을 벌였으니까요. 아무리 철딱서니가 없는 제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좀 부끄럽지 않았겠어요?

철딱서니 없다는 표현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당시 제자들의 나이는 예수님보다 적으면 적었지 많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적으면 20대 초반, 많으면 20대 후반이었겠지요. 지금 그런 정도의 나이가 되는 청년들 중에서 철이 난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제 큰 딸이 만으로 스물 세 살인데, 그냥 순할 뿐이지 철이 없어 보이던데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요즘의 20대와 별로 다를 게 없었을 겁니다. 예수님이 죽냐, 사냐 하는 순간에 서로 잘났다는 논쟁을 하고 있었다는 거 아닙니까.

이 문제는 마가 공동체에서도 현안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태도 마찬가지이지만 마가가 비슷한 전승을 반복해서 보도했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막 10:35절 이하의 보도를 따르면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에게 우편과 좌편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마태는 그들의 어머니가 요구한 걸로 나옵니다. 나머지 열 명의 제자들이 이를 보고 화를 냈습니다. 막 9장의 이 이야기는 10장의 이야기를 예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대목은 어린이가 연이어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막 9:36절과 10:13절입니다. 이런 편지은 마가공동체 내부에 뭔가 심상치 않은 조짐이 일어났다는 의미입니다. 그게 무얼까요? 어린이는 가장 낮은 자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낮춤의 영성이 마가 공동체에서 훼손되었다는 게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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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2008.09.13 18:14:29

전에는 부동의 이미지였던, 그러나 생명력이 없었던
'하니님'에 대한 묵상이 변하면서
'예수'도 전혀 다른 분으로 다가옵니다
그분이 하나님이며 우리의 메시아이며
'온전한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이 마치 전혀 몰랐던 일 처럼
지금 내게 너무 새롭습니다
이 신비로운 기쁨을 어찌 표현해야 정확 할까요
오늘 내가 살아서 예수를 묵상 할 수 있으니 이보다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혹시 이런 것이 예수앞에서 조금씩 철이 들어 가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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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9.13 21:38:43

시와그림 님,
스펀치처럼 기독교 신앙의 깊이를 잘 받아들이고 있군요.
그게 쉬운 일이 아닌데요.
오랜 동안 한쪽으로 고정된 영성의 방향을 바꾼다는 게 말이에요.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은 새롭게 다가올 겁니다.
우리의 영혼을 닫아걸지만 않는다면요.
마치 바둑의 고수들이 새로운 정수를 찾기 위해서
구도정진 하듯이 말이지요.
그런데요.
앞에서 이런 게 쉽지 않은 일이라고 했잖아요.
신학대학원을 공부한다고 해서 그런 영적인 흐름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는 거에요.
삶을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소유지향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하늘과 땅 같은 차이인 것처럼
기독교 영성도 역시 그렇습니다.
지금 내가 이미 일정한 경지에 도달했다는 말은 아니니
오해 말고, 기대도 마세요.
그냥 신앙의 선배들이 갔던 그 길을 조금 가까이서 바라볼 뿐이에요.
시와그림 님의 대글이
신통하게 보여서
또 선생 연 했군요.
추석, 잘 보내시고,
좋은 주일을 맞으세요.

[레벨:1]正-薰

2008.09.14 11:34:18

낮춤의 ‘영’성이 훼손됨이란....

낮은 자리에 '이미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바라보지 못함...
‘영’적공동체에서 하나님의 ‘영’의 임재에 대한 의식/인식이 희미해짐…
자기에 집중함/몰입함 (flow)... 이런 뜻으로 이해하면 되는 것인가요?

(그동안 읽기만 하다가 드디어 오늘 저녁에 회원가입도 하고 작은 댓글도 올려봅니다.
정선생님의 묵상과 글쓰기에 큰 깨우침 그리고 그것에의 화두들을 얻고 있는 중이랍니다.
많이 감사합니다. Grace an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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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5일 기독교 신앙의 양면성(2)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막 9:30) 어제 묵상의 마지막 단락인 위로와 불안이 무슨 뜻인지 보충해야겠습니다. ‘위로’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우리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에서만 참된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에게는 위로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위로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림자와 같은 위로입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그 사실에서만 우리는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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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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