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8일 ‘어록’5-6

조회 수 1478 추천 수 4 2008.06.17 23:22:58
2008년 6월18일 ‘어록’5-6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인자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마지막 심판에 관한 이야기는 앞서의 언급으로 접고,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라는 말씀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영광과 거룩한 천사는 사실 심판과 연관되는 용어라는 점에서 심판 개념의 보충 설명이라고 해도 좋겠군요.
아버지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을 아버지로 묘사한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예수님에 의해서 이 개념은 더 분명해졌습니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을 인간의 부자지간처럼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부자는 본질이 다르지만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할 때 그 아버지와 아들인 예수의 본질은 동일하니까요.
‘영광’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우리가 딱 끊어서 말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와 질적으로 다른 하나님이 이 세상에 나타나는 방식이나 현상을 가리킵니다. 예컨대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갔을 때 하나님은 영광으로 임재하셨는데, 그때 나타난 현상이 안개, 연기, 천둥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1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영광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즉 하나님과 하나이신 분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바로 영광입니다.
부활하시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의 영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이제 그분은 다시 그 영광으로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레벨:9]겨우살이

2008.06.18 18:38:44

목사님, 오랜만에 올리신 큐티를 묵상하다보니 어렵고 모르는 마음만 들고 있습니다^^. 믿는 우리들이 보통 영광이라는 단어를 흔히들 써왔던 것 같은데, 예를 들어 사람들이 주님께 ‘영광’ 돌립니다 라고 말을 하기도 하고, 자신에게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할때도 이 영광이란 말을 언급하며 말이죠. 근데 오늘 말씀을 보고 있자니 하나님이 스스로 드러내시는 영광과 우리가 쉽게 입에 올렸던 주님의 ‘영광’이 매우 다른 차원의 생각인것 같다는 마음이 듭니다. 영광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에고,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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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6.18 22:01:03

겨우살이 님,
요즘 다비아에 대글을 자주 다시네요.
마음이 조금 움직이시나 보군요.
잘 됐습니다.
영광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군요.
그겁니다.
영광만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 종말, 은혜 등등도
이제 다시 생각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영광'(헬라어 '독사')은 구체적으로 우리가 규정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의 현현을 영광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지요.
우리가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말은
우리가 영광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한다는 뜻이기도 하구요,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에게 대해서 우리가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 앞에서 찬양할 뿐이라는 겁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는가,
또는 하나님은 어떻게 현현하는가, 하는 질문이 간단하지 않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아마 자신이 완전히 無에 이르는 경험을 한 사람만이
무엇인지 어렴풋하게나마 말할 수 있겠지요.
조금 천천히 생각해봅시다.
비가 오는군요.
행복한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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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12일 죽음 너머의 생명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막 9:9)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문제만 해도 감당하기 힘든데 죽음 이후의 문제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어디 있는가, 하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더구나 한국교회에서 부활신앙이 일종의 역사 허무주의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런 주장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죽음 너머의 생명을 말한다는 것은 생명을 통전(integrity)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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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11일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막 9:9) 사도신경의 한 대목도 위의 구절과 일치됩니다.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초기 기독교의 신앙은 바로 이 한 구절에 묶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죽음과 삶의 대비입니다. 죽은 자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의 대비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서 무슨 경험을 했기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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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7일 그의 말을 들으라!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9:7) 어제 묵상의 끝 부분에서 “기독교 신앙의 보편적 진리성” 운운했는데, 오늘 조금 보충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계 창조자, 즉 창조 행위로 존재하는 분입니다. 이 창조 행위는 해와 달이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것이듯이 기본적으로 보편적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와 선한 자 모두에게 비와 빛을 내려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역시 하나님의 창조 ...

7월6일 내 사랑하는 아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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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6일 내 사랑하는 아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9:7) 구름 속에서 나온 소리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였다고 합니다. 이런 구절을 읽을 때 소리현상에 신경을 쓰지 말고, 그 내용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앞에서 몇 번 반복해서 지적했듯이, 구름 속의 소리는 고대인들의 신화적 세계관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신화적 세계관이 탈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강요되면 신앙이...

7월5일 구름 속의 소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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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5일 구름 속의 소리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9:7) 마가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초막 셋을 짓자는 베드로의 제안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변형 전승에서 예수님의 침묵은 시종일관이었군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필요하지 않았겠지요. 어쨌든지 제자들은 지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제 상황이 조금 바뀝니다.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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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4일 고난에 대한 두려움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막 9:6) 초막 세 채를 짓자는 베드로의 제안에 대한 마가복음 기자의 평가는 차갑습니다. “그들이 몹시 무서워” 했다고 하는데,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의 변형과 구약인물의 출현을 두려워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십자가의 고난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신학의 방향이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즉 그들이 천상의 세계에 초막을 짓고 머무르려 한 것은 곧 현실에서 감당해야 할 고난을 회피하는 태도라고 말입니다. 마가...

7월3일 초막 셋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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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3일 초막 셋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막 9:4) 천상의 세계를 경험한 베드로는 그곳에 세 채의 초막을 짓겠다고 제언합니다. 그 세 채는 물론 예수님, 엘리야, 모세를 위한 것입니다. 이런 발상이 조금 유치해 보이긴 하지만 나름으로 신학적 의미가 있긴 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푸른 나무 가지로 만든 초막에서 지내야 했으며(느헤미야 8:14,15), 종말론적이고 메시아적 분위...

7월2일 “여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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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2일 “여기”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막 9:4) 오늘 본문에도 베드로의 성격이 여지없이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여기가 좋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세 채의 초막집을 짓겠다는 것입니다. ‘여기’는 천상적인 장소를 가리킵니다. 그곳에서는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 메커니즘이 허물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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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1일 엘리야와 모세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막 9:3) 예수님의 변형 순간에 함께 했다는 엘리야와 모세는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모두 산에서 하나님 경험을 했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모두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엘리야의 승천 기사는 아주 분명하게(왕하 2:11) 기록되었지만, 모세의 승천은 유대교 이외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셋째,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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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30일 광채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막 9:3)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의 변형을 광채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광채는 신적인 영광에 대한 문학적 서술입니다. 출애굽기 34:29의 보도에 따르면 모세가 십계명을 새긴 두 돌 판을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 피부에 광채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와 대화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기를 보려고 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서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마리아가 예수님이 묻...

6월29일 변화산에 올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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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9일 변화산에 올라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막 9:2) 마가복음 기자는 앞에서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언급한 뒤에 이제 예수님의 변형 사건을 보도합니다. ‘엿새 후에’라는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엿새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변형 사건이 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이겠지요. 일단 본문을 천천히 따라가겠습니다.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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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8일 ‘어록’6-7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주제를 잘 정리만 하면 신학 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에게 일어난 구원 사건과 종말론적 세계 완성을 종합적으로 다뤄야 할 테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짧은 묵상의 주제로만 접근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 진술이 기독론적인 ...

6월27일 ‘어록’6-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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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7일 ‘어록’6-6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고 합니다. 권능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그 어떤 방식으로도 막을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끌어내거나 생산해내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것을 놀라움으로 바라볼 뿐이지요. 이런 권능을 우리가 무엇에 비교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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