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6일 내 사랑하는 아들!

조회 수 2231 추천 수 9 2008.07.05 22:07:47
2008년 7월6일 내 사랑하는 아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9:7)

구름 속에서 나온 소리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였다고 합니다. 이런 구절을 읽을 때 소리현상에 신경을 쓰지 말고, 그 내용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앞에서 몇 번 반복해서 지적했듯이, 구름 속의 소리는 고대인들의 신화적 세계관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신화적 세계관이 탈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강요되면 신앙이 왜곡되기 쉽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고 주장하고, 때로는 자기의 욕망을 그런 방식으로 표출하기도 합니다. 목사들의 이런 설교를 순진한 신자들은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믿지 않으면 신앙이 없는 것으로 교육받았기 때문이겠지요.
위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예수를 바로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에 대한 변증이 곧 복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 사실을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것을 포기하면 기독교 자체를 포기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신앙을 흔들림 없이 견지하되 초기 기독교인들이 무엇을 근거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고 믿었는지에 관한 질문을 열어놓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오늘의 세계관으로 변증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2천 년 전 기독교인들의 세계관은 당연히 천동설이었지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이 이후의 시대를 사는 우리는 지동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성서를 (재)해석해야겠지요. 재해석에 대해서 불안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떤 시대가 온다고 하더라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 사실이 진리라는 걸 변증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기독교 신앙의 보편적 진리성을 모색하고 확보해야만 합니다.

발의무리

2008.07.06 05:03:41

좀 그렇네요 목사님. 욥처럼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역사가 체험되시기를 빕니다.
'너희가 본 것을 말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문득 오버랩됩니다.

복된 주일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7.06 16:39:05

발의무리 님,
무엇이 좀 그런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세요.
욥의 깨우침을 얻기 바란다니,
마치 큰 스승이 제자를 대하듯이,
도사 연 하는 글을 쓰시는군요.
제가 잘 알아듣지 못하니
좀 쉽게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레벨:1]머릿돌

2008.07.07 11:04:02

말씀의 21세기적 재해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모든 세대는 각 세대에 맞게 성서를 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항시 성서를 연구하고 묵상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누군가의 성서해석이 권위를 얻기도 하겠지만 그것도 어느 시대의 일시적인 것이요 영원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성서연구자료로 후세에게 좋은 발자취를 남겨주겠지만요...
성서를 보고 그 뜻을 아는 것 그리고 그것을 내 시대 내 삶에 적용하는 것...
목사님께서 생각하는 훈련 즉 철학하는 것이라 했는데 이것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레벨:4]알고파

2008.07.07 17:46:33

문자적으로 믿는다고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의 근거가 어떠했는지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중세말기의 교회가 갈릴레오를 심판한 것과 똑같은 길을 가게 됩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봐야지 성경을 우상화하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는 것이 아마 근본주의이지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기 시작한다면
가인이 누구와 결혼할 수 있었는지부터 답변을 할 수 없습니다.
루터도 깔벵도 문자주의는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성경도 예수그리스도를 잘 드러낼 때만 의미가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을 누구보다 중요시한 20세기의 신학자 칼 바르트도 역사비평은 받아들였습니다.
다만 칼바르트는 자유주의가 너무 난도질 해 놓아
우리 믿음의 근거로써 그 자리를 잃을뻔한 성경의 권위를 찾기 위해 싸웠다고 들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예수를 믿는 것이지 성경 자체를 믿는 것은 아니지요.
성경은 문자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의도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을 쓴 저자의 의도를 찾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신학을 잘 모르지만
아마도 세계적인 신학자들은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성경을 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계적인 신학자들이 믿음이 없는 사람들일까요?
그들은 믿음이 없어서 그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일까요?
그들은 진실로 기독교를 지키고 성경을 지키기 위해서 분투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변증을 한다고 하지요? 이런 변증의 신학자들이 꼭 필요합니다.
문자적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은 아기가 아직도 배꼽에서 나오는 줄 알고
더 이상의 지식은 받아들이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진실과 사실에 대한 '회피'가 필요하겠지요.
이런 믿음은 위태로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7.07 20:17:04

머릿돌, 알고파 님,
우리가 성서를 언어 사건으로 접근할 수 있어야겠지요.
그것은 살아있는 사건이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영성이 경직되면
그 언어 사건이 우리에게 말을 걸지 못합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가 그 말걸음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통치를 준지론적을 담지하고 있는 성서를
우리가 읽고 해석하고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행운이며, 은총입니다.
그렇지요.
성서는 밭에 묻힌 보물입니다.
아니, 성서라는 밭에 보물이 묻혀 있다고 해야겠지요.
그것은 볼 눈을 가진 사람에게만 보이는 게 아닐는지요.
정말 무더은 하루였군요.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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