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7일 그의 말을 들으라!

조회 수 1749 추천 수 22 2008.07.06 23:18:33
2008년 7월7일 그의 말을 들으라!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9:7)

어제 묵상의 끝 부분에서 “기독교 신앙의 보편적 진리성” 운운했는데, 오늘 조금 보충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계 창조자, 즉 창조 행위로 존재하는 분입니다. 이 창조 행위는 해와 달이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것이듯이 기본적으로 보편적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와 선한 자 모두에게 비와 빛을 내려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역시 하나님의 창조 세계가 보편적이라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이런 정도의 이야기를 모를 기독교인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보수적인 입장의 기독교인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독단적이지만 않다면 창조의 보편성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이런 기본적인 인식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기독교 고유의 믿음과 충돌한다는 사실입니다. 보편성과 특수성의 충돌입니다. 여기서 길을 잃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과 영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받는다는 신앙의 고유성을 유지하면서도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제 생각에 삼위일체 하나님을 실제로, 제대로 알고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을 향해서 결코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고백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그 고백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의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의 말은 단지 기독교인들만이 아니라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진리입니다. 그 사실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변증할 수 있을까요?  

[레벨:1]머릿돌

2008.07.07 11:52:06

묘한 긴장감이 느껴집니다.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은 무언가 엄청난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알고 믿는 사람이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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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사띠아

2008.07.08 10:59:15

지난 주 수요일 이곳 선생님들가족 80여명이 지구촌선교회의 식사섬김을 받던 저녁
저는 이런 저런 사연으로 '기쁜 소식선교회'의 두분 선생님과 함께
인도 식당에서 따로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미리 '구원을 향한 과도한 욕망의 옷자락-박옥수목사'을 몇번이고 읽고 갔죠.)
2시간 반동안 오고간 이야기..아니 들은 이야기는 아실 분은 아실테고.

다른 것 다 떠나서
지난 10년동안 힌두들의 도끼날의 핍박속에서 나름대로이지만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분투하시는 김선생님의 노고가 고마와서
밥도 사고 이들의 인도인 초청에 '힘을 좀' 썼습니다.

나와 다른 이들에 대해 어디만큼 저의 마음이 열려야 하는지..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더욱 열심히 배워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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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2008.07.08 19:56:05

우즈벡의 회교 가정에서 저희 선교팀들을 초대해서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식사가 끝나면 초대받은 사람이 그 가정을 위해 기도를 해 주는 것이 그곳 관습이라고 해서
같이 간 젊은 2 세 사역자가 그들을 위해 축복의 기도를 해 주었고
저희들은 마음 놓고 큰 목소리로 아멘을 하였지요.
말씀의 깊이에 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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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1]이방인

2008.07.08 22:47:38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사상이나 칼빈의 예정설 등은 선택구원론과 관계되고, 이에 반해
판넨베르크의 보편구원론 사상은 이들로부터의 획기적인 전환(클라라님의 말씀처럼 패러다임의 전환)처럼 보이는데요.
목사님의 말씀의 어조를 보면 루터나 칼빈의 신학체계 안에 보편구원론이 내재하거나 혹은 선택구원론과 양립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보시는 입장이 아닐까 제 나름대로 해석해보는데요.
그렇다해도 보편구원론적인 입장으로의 전환이 어떤 계기로 이루어졌는지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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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12일 죽음 너머의 생명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막 9:9) 지금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문제만 해도 감당하기 힘든데 죽음 이후의 문제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어디 있는가, 하는 주장이 가능합니다. 더구나 한국교회에서 부활신앙이 일종의 역사 허무주의로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는 걸 감안한다면 그런 주장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죽음 너머의 생명을 말한다는 것은 생명을 통전(integrity)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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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11일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막 9:9) 사도신경의 한 대목도 위의 구절과 일치됩니다.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초기 기독교의 신앙은 바로 이 한 구절에 묶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죽음과 삶의 대비입니다. 죽은 자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의 대비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에게서 무슨 경험을 했기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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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10일 예수 사건의 유일회성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막 9:9)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이라는 건 아주 분명한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왜 기독교만의 배타적 사건이냐, 하는 데 있습니다. 반국가사범에 대한 로마의 사형제도인 십자가로 죽은 사람은 예수만이 아니라 수없이 많습니다. 어떤 이들은 전태일의 죽음을 예수의 죽음과 비교하기도 합니다. 부활 전승도 기독교에게만 있는 건 아닙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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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9일 침묵 명령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막 9:9)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변형 사건을 직접 서술한 다음에 이제 9-13절에서 그것과 모순되는 고난의 그리스도 상을 제시합니다. 그 고난의 문제는 14-29절에서 고난 받는 간질병 아이와 예수의 치유 능력이 보도되면서 더 확장됩니다. 고난의 그리스도와 그것에 대한 제자들의 몰이해를 기본 축으로 전개되는 마가의 신학에서 볼 때 이런 진행은 자연스럽습니다. 오늘 본문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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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8일 오직 예수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막 9:8) 변형 사건의 장면이 또 바뀌는군요. 마치 애니메이션의 몇 장면처럼 보입니다. 처음에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과 함께 산에 올라간 장면입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의 옷에 광채가 났습니다. 그리고 곧 엘리야와 모세가 등장했습니다. 다음에는 구름이 그들을 휩싸면서 어떤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모든 변화가 멈추었습니다. 광채도, 엘리야와 모세도, 구름도, 소리도 사라졌습니다. 제자들 앞에는 오직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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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7일 그의 말을 들으라!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9:7) 어제 묵상의 끝 부분에서 “기독교 신앙의 보편적 진리성” 운운했는데, 오늘 조금 보충하겠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세계 창조자, 즉 창조 행위로 존재하는 분입니다. 이 창조 행위는 해와 달이 기독교인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것이듯이 기본적으로 보편적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자와 선한 자 모두에게 비와 빛을 내려주신다는 예수님의 말씀도 역시 하나님의 창조 ...

7월6일 내 사랑하는 아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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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6일 내 사랑하는 아들!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9:7) 구름 속에서 나온 소리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였다고 합니다. 이런 구절을 읽을 때 소리현상에 신경을 쓰지 말고, 그 내용에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앞에서 몇 번 반복해서 지적했듯이, 구름 속의 소리는 고대인들의 신화적 세계관을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런 신화적 세계관이 탈신화의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강요되면 신앙이...

7월5일 구름 속의 소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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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5일 구름 속의 소리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9:7) 마가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초막 셋을 짓자는 베드로의 제안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없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변형 전승에서 예수님의 침묵은 시종일관이었군요.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필요하지 않았겠지요. 어쨌든지 제자들은 지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제 상황이 조금 바뀝니다.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었습니다. ...

7월4일 제자들의 두려움 [5]

  • 2008-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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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4일 고난에 대한 두려움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막 9:6) 초막 세 채를 짓자는 베드로의 제안에 대한 마가복음 기자의 평가는 차갑습니다. “그들이 몹시 무서워” 했다고 하는데,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의 변형과 구약인물의 출현을 두려워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십자가의 고난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마가복음 신학의 방향이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즉 그들이 천상의 세계에 초막을 짓고 머무르려 한 것은 곧 현실에서 감당해야 할 고난을 회피하는 태도라고 말입니다. 마가...

7월3일 초막 셋 [5]

  • 2008-07-02
  • 조회 수 3840

2008년 7월3일 초막 셋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막 9:4) 천상의 세계를 경험한 베드로는 그곳에 세 채의 초막을 짓겠다고 제언합니다. 그 세 채는 물론 예수님, 엘리야, 모세를 위한 것입니다. 이런 발상이 조금 유치해 보이긴 하지만 나름으로 신학적 의미가 있긴 합니다. 모든 유대인들은 푸른 나무 가지로 만든 초막에서 지내야 했으며(느헤미야 8:14,15), 종말론적이고 메시아적 분위...

7월2일 “여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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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2일 “여기”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막 9:4) 오늘 본문에도 베드로의 성격이 여지없이 나옵니다. 그는 예수님에게 말씀드렸습니다. 그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여기가 좋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서 세 채의 초막집을 짓겠다는 것입니다. ‘여기’는 천상적인 장소를 가리킵니다. 그곳에서는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 메커니즘이 허물어집...

7월1일 엘리야와 모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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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1일 엘리야와 모세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막 9:3) 예수님의 변형 순간에 함께 했다는 엘리야와 모세는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모두 산에서 하나님 경험을 했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모두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엘리야의 승천 기사는 아주 분명하게(왕하 2:11) 기록되었지만, 모세의 승천은 유대교 이외의 문헌에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셋째,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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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30일 광채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막 9:3)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의 변형을 광채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광채는 신적인 영광에 대한 문학적 서술입니다. 출애굽기 34:29의 보도에 따르면 모세가 십계명을 새긴 두 돌 판을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 얼굴 피부에 광채가 가득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와 대화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자기를 보려고 하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서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마리아가 예수님이 묻...

6월29일 변화산에 올라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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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9일 변화산에 올라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막 9:2) 마가복음 기자는 앞에서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 나라의 임재를 언급한 뒤에 이제 예수님의 변형 사건을 보도합니다. ‘엿새 후에’라는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엿새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변형 사건이 이 확실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한 문학적 장치이겠지요. 일단 본문을 천천히 따라가겠습니다.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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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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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8일 ‘어록’6-7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이 주제를 잘 정리만 하면 신학 석사 학위를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에게 일어난 구원 사건과 종말론적 세계 완성을 종합적으로 다뤄야 할 테니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짧은 묵상의 주제로만 접근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 진술이 기독론적인 ...

6월27일 ‘어록’6-6 [1]

  • 2008-06-26
  • 조회 수 1310

2008년 6월27일 ‘어록’6-6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본문은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고 합니다. 권능은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그 어떤 방식으로도 막을 수 없는 강력한 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피조물인 우리 인간이 끌어내거나 생산해내는 게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어납니다. 우리는 그것을 놀라움으로 바라볼 뿐이지요. 이런 권능을 우리가 무엇에 비교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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