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2), 3월30일

조회 수 7005 추천 수 60 2006.03.30 23:21:36
2006년 3월30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광야 (2)

마가가 인용하고 있는 이사야 40장의 말씀은 소위 ‘제2 이사야’의 글입니다. 이사야는 바벨론 포로부터 귀환하게 될 사람들에 관한 소식을 들고 광야를 가로질러오는 메신저를 마음에 새기고 있습니다. 그 메신저는 ‘하나님의 대로(大路)’를 내는 사람입니다. 이사야는 그 사실을 이렇게 사실적으로 묘사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 하라.”(사 40;9).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이 40년 광야생활에서 농축되었고, 바벨론 포로 귀환 소식이 광야를 가로질러 왔듯이 생명의 완성은 광야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영적으로 광야의 경험이 없다면 우리는 영적인 생명에 이를 수 없을지 모릅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직전에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과 기도에 힘쓰셨고, 막판에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광야는 곧 절대적인 것과의 한바탕 싸움을 벌여야 할 장소라는 뜻이겠지요.
광야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은 단조로움입니다. 흙, 돌, 모래, 구름, 하늘, 바람, 그리고 광야에서 살고 있는 식물과 동물들이 있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이런 모든 것에도 역시 생명이 풍요롭게 담겨 있지만, 인간 문명을 기준으로 본다면 일단 단조로운 건 분명합니다. 이런 곳에서 야훼 하나님 경험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그런 일이 수없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그리고 기독교 역사에서도 실제로 사막의 성자들뿐만 아니라 문명과 일정한 거리를 둔 수도원 운동이 왕성했다는 사실을 눈여겨봅시다. 왜 수도원 영성이, 광야 영성이 성서 신앙과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지켜왔을까요? 천천히 생각해봅시다.
제 생각에 하나님 경험은 ‘존재’ 경험입니다. 무엇인가 ‘있다’는 사실 앞에서 놀라는 경험이 바로 그것입니다. 왜 무엇이 없지 않고 있을까요? 왜 없는 것은 있지 않고 없을까요? 왜 사람은 없지 않고 있을까요? 왜 지구에는 고체, 액체, 기체라는 물질만 있을까요? 왜 모기는 모기이고, 민들레는 민들레일까요? 왜 모기와 민들레 중간 쯤 되는 그 ‘무엇’은 ‘존재’하지 않을까요? 이런 질문은 존재의 궁극에 관한 것들입니다. 아무리 질문해도 대답을 얻을 수 없는, 기껏 나온 대답이라고 해봐야 피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는 질문들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궁극적인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성서는 아주 간단한 대답을 주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궁극적인 질문과정을 통과한 것입니다. 호렙산에서 야훼 하나님은 모세에게 “스스로 있는 자”(나는 나다.)로 자기를 해명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Ich werde sein, der ich sein werde.”(나는 존재하게 될 바로 그 존재가 될 것이다. 혹은 나는 내가 원하는 그런 존재가 될 것이다.) 어떤 식으로 번역하든지 하나님이 존재문제의 키워드라는 뜻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궁극적인 존재 경험은 단조롭게 존재하는 광야에서 훨씬 풍부하게 일어납니다. 광야에서는 볼 게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적게 봄으로써 우리는 훨씬 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소유할 게 별로 없습니다. 적게 소유함으로써 훨씬 풍요로운 것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복잡하게 생각할 게 별로 없습니다. 적게 생각함으로써 훨씬 본질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단조로운 삶에서 훨씬 심층적인 영성이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마르다에게 너무 많은 것에 마음을 두지 말라고 충고하셨습니다. 문명과 담을 쌓을 수밖에 없었던 광야의 삶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생존의 근거인 야훼 하나님에게만 마음을 두게 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만 집중함으로써 율법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어떤 점에서 오늘 우리 현대인들은 고대인보다 불행한지 모릅니다. 다른 것은 접어두더라도, 일단 오늘 우리에게는 살아가기 위해서, 아니 자기를 확대하기 위해서 신경을 써야 할 부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오직 생존에 모든 힘을 쏟고 있는 몽고나 티베트의 유목민들에 비해서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것을 소유하고 확대 재생산하고, 경쟁구도에 집착함으로써 생명의 근본을 망각해 가는 중입니다. 생명의 근본을 잃어버리고 대신 자본과 오락을 크게 이루었습니다. 광야를 버리고 문명을 일구었지만 생명의 근본은 날이 갈수록 희미해지는 중입니다.
그런 실제적인 삶만이 아니라 신앙생활에서 우리에게는 광야가 없습니다. 교회도 더 이상 광야가 아니라 저자거리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적인 광야가 되어야 할 교회가 오히려 세상보다 더 많은 볼거리, 일할 거리를, 이벤트를 생산하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회당 건축도 그만하고, 헌금 종류와 액수도 좀 적정 수준으로 줄이고, 교회 조직도 단순화하고, 말도 줄이고, 기도회도 좀 줄이는 게 좋겠습니다. 도시 안의 교회가 완전히 문명과 담을 쌓을 수는 없겠지만 가능한 수도원의 형태와 정신을 살려나가야 합니다. 광야에 홀로 남아 끝없는 지평선과 석양의 붉은 노을을, 그리고 밤하늘의 총총한 은하수를 바라보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일도 없고, 할 말도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존재하는 것들의 신비 안에서 말없이 말을 거는 하나님과 말없이 말할 뿐입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광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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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2007.04.20 04:4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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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8]눈꽃

2008.10.30 22:29:29

하나님!!!!ㅡㅡㅡㅡㅡㅡ부르면 눈물이납니다, 두렵습니다, 할말이많은것같다가도 막상기도하려고 하면 그냥 하나님아버지!!!.....그리고 남머지 말들은....마음속으로, 가끔 제기도내용을 다른사람이 듣는다면 아니@@@ ㅇㅇ이게뭐꼬 !글쎄 이것을 기도라고해야하나? 그냥 옆에 사람이있을때 하듯이 그렇게 그래서 기도를 아주마니마니 하는것 같기도하고 ㅇㅇㅇㅇ어떤때는 하나님! 그다음에는 말이 필요없이 하나님이 내가 지금하려는말을 너무다 잘아시고있는것같아 입에 손을가져다 대고 아무말도 하지 못 합니다 요즈음 주참일 낮예배와 오후예배만드리고 있는데......참 예배 시간에 난감한 일도 한두가지가 아니고 특히 설교시간에는......광야!!! 오늘의 묵상은 서울 다녀와야 하기에 같다와서 다시 시작할까 아니 가면서 종 생각해야지 이럴때를 대비하여 프린터기를 연결해놔야 하는건데........프린트가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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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24일 ‘어록’6-3 [3]

  • 2008-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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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4일 ‘어록’6-3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위 구절은 예수님의 재림을 직접적으로가 아니라 간접적으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한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예수님의 재림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하나라는 뜻이겠지요. 그러나 이 두 개념이 무조건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일단 표면적으로 볼 때 재림 표상은 역사적 예수가 똑같은 형태로 이 땅에 다시 ...

6월23일 ‘어록’6-2 [2]

  • 2008-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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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3일 ‘어록’6-2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1992년의 일로 기억됩니다만, 한국교회만이 아니라 한국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든, 아주 씁쓸한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일명 다미선교회 사건입니다. ‘다미’는 ‘다가올 미래’의 이니셜입니다. 그 낱말 자체는 기독교의 본질을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문제는 다미선교회의 종말론 이해가 미숙하다는 것입니다. 미숙할 뿐만 아니라 대중성에 편승...

6월22일 ‘어록’6-1 [3]

  • 2008-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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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2일 ‘어록’6-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막 (9:1) 이틀 전의 묵상에서 저는 위의 본문을 잠시 언급했습니다. 제자들이 살아있을 때 주님의 재림이 이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바로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가리키는 걸까요? 일단 바로 앞 절과 연결해서 본다면 그것은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

6월21일 ‘어록’5-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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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1일 ‘어록’5-9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8) 예수의 재림이 곧 세계 완성이라는 어제의 묵상을 조금 더 보충해서 설명해야겠습니다. 여기서 일단 키워드는 ‘세계완성’입니다. 도대체 세계가 완성된다니, 그게 무엇일까요? 우리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 세상을 완성된 것으로, 또는 완전한 것으로, 아니면 대단히 뛰어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세상을 잘 이용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도...

6월20일 ‘어록’5-8

  • 2008-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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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0일 ‘어록’5-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8)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온다.”는 것은 물론 재림을 가리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재림신앙을 근본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재림이 이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막 9:1) 재림이 지연되면서 초기 기독교 내부에서 어떤 혼란이 일어나기도 ...

6월19일 ‘어록’5-7 [4]

  • 2008-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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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9일 ‘어록’5-7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온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우선 고대인들이 왜 천사를 생각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기독교 화가들의 그림에도 천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라파엘의 천사 상이 저에게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한 손을 턱을 괴고 하늘을 쳐다보는 천사의 그림이 저의 집에 있는데, 그걸 볼 때마다 라파엘에게는 하늘에 대해 관심이 참으로 많았...

6월18일 ‘어록’5-6 [2]

  • 2008-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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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8일 ‘어록’5-6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인자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마지막 심판에 관한 이야기는 앞서의 언급으로 접고,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라는 말씀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영광과 거룩한 천사는 사실 심판과 연관되는 용어라는 점에서 심판 개념의 보충 설명이라고 해도 좋겠군요. 아버지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

6월17일 ‘어록’5-5 [2]

  • 2008-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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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7일 ‘어록’5-5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또는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하지만 그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을 추상적으로만 접근한다는 데에 있겠지요. 구원도 결국 죽어서 천당 가는 정도로만 받...

6월16일 ‘어록’5-4

  • 2008-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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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6일 ‘어록’5-4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한국교회에는 심판자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자이신 예수님을 마치 염라대왕쯤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에 태만한 자들을 유황불이 뜨겁게 타고 있는 지옥으로 보내는 것처럼 겁을 주기도 합니다. 성서에는 그런 그림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종교적 메타포이지 실체를 말...

6월15일 ‘어록’5-3 [6]

  • 2008-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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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5일 ‘어록’5-3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어제 묵상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오늘 묵상의 말머리로 삼아야겠습니다. “심판당한 분을 심판자로 믿으니 말입니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런 문장이 저의 독창적인 생각인지, 아니면 어디서 읽은 게 무의식적으로 기억이 난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심판 ...

6월14일 ‘어록’5-2

  • 2008-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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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4일 ‘어록’5-2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위의 어록에 나오는 단어인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은 우리말로는 특별한 의미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구약성서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묵시문학적 전승과 연관된 것인데, 이 세상(에온)의 마지막에 올 심판자를 가리킵니다. 인자가 단지 심판자라는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떤 특별한 권능을 소유한 분이...

6월13일 ‘어록’5-1

  • 2008-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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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3일 ‘어록’5-1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위의 말씀을 앞에 둔 저는 지금 현기증이 날 것 같습니다. 저 말씀이 말하려는 세계를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설명하지 못할 것도 없지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신앙을 바르게 드러내지 못하면 결국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크게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6월12일 ‘어록’4

  • 2008-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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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2일 ‘어록’4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막 8:37) 그렇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만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당연히 죽기 싫어합니다. 이 세상의 삶이 아무리 삭막하더라도 살아남는 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생명은 우리가 도구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어떤 방식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입니...

6월11일 ‘어록’3(5)

  • 2008-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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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1일 ‘어록’3(5)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목사들은 우선 자기 구원에 천착해야 한다는 어제 묵상의 마지막 구절을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목사들은 이미 구원의 확신과 기쁨을 경험했으며, 이제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는 사람들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이런 사명감은 사실 목사만이 아니라 교회에서 믿음이 좋다 하는 사람들에게서 일반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현상인데, 그런 생각은 큰 오해입니다. 이 세상에 어...

6월10일 ‘어록’3(4) [4]

  • 2008-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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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0일 ‘어록’3(4)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온 천하와 자기 목숨의 대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목회자와 관계된 한 가지 사실만 짚을까 합니다. 오늘 교회 지도자로 자처하는 우리 목사들은 목회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이런 사명감을 강조하고, 목회 현장에 나오면 이런 요구가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목사들의 목회적 열정에 대해서...

6월9일 ‘어록’3(3) [1]

  • 2008-06-08
  • 조회 수 1379

2008년 6월9일 ‘어록’3(3)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앞의 두 묵상에서 저는 온 천하와 목숨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설명했습니다. 목숨은 온 천하와 다른 방식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 여기서 핵심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에 따르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전혀 새로운 차원의 생명에 집중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우리 삶의 능력으로 확보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온 천하를 얻는 방식의 삶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

6월8일 ‘어록’3(2) [1]

  • 2008-06-07
  • 조회 수 2461

2008년 6월8일 ‘어록’3(2)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기독교 신앙은 온 천하에서 무언가를 성취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방식으로 생명을 얻는다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어제의 묵상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묵상은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이 언어의 세계에 몰두하듯이 우리는 바로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데 몰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온 천하를 얻기도 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생명을 얻을 수 ...

6월7일 ‘어록’3(1) [3]

  • 2008-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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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7일 ‘어록’3(1)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위의 어록에는 ‘온 천하’와 ‘목숨’이 대비되어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런 대비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지만 밖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겁니다. 세상의 생각은 온 천하를 얻는 것이 바로 목숨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여기서 온 천하를 무조건 나쁜 뜻으로만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의 모든 성실한 노력도 모두 온 천하에 속합니다. 예컨대 슈바이처나 데레사 같은 이들의 삶도 역시 온 천하입...

6월6일 ‘어록’2(5) [1]

  • 2008-06-05
  • 조회 수 1199

2008년 6월6일 ‘어록’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주님은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라고 어제의 묵상에서 짚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부활이 왜 생명을 잃음으로써 얻게 되는 생명인지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70,80년이고, 유별나게 길어야 90년입니다. 기...

6월5일 ‘어록’2(4)

  • 2008-06-04
  • 조회 수 1689

2008년 6월5일 ‘어록’2(4)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자칫 기독교 신앙에서 금욕과 자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유럽의 중세기 기독교는 이런 금욕적인 정서가 팽배했습니다. 청교도, 각성신앙, 부흥운동도 크게 보면 이런 흐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삶을 가능한대로 부정하고 거룩한 삶에 매진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교회와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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