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 (3), 3월31일

조회 수 8164 추천 수 89 2006.03.31 23:18:57
2006년 3월31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광야 (3)

광야는 별로 낭만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그곳에는 티브이도 없고 노래방도 없고, 테니스장도 없습니다. 그곳은 우리가 즐길만한 그 무엇도 없습니다. 광야는 동창회를 열거나 계모임을 가질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도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즐겁게 사는 것과는 좀 거리가 멀어 보이는 곳입니다.
영적인 광야도 역시 재미난 곳은 결코 아닙니다. 그곳은 입담 좋은 부흥강사가 웃음보따리를 풀어놓는 부흥회도 없고, 성가대의 단합대회도 없으며, 장로 장립식과 교회당 봉헌식도 없습니다. 열린 예배도 없고, 경배와 찬양도 없으며, 통성기도도 없습니다. 아무런 종교적 즐거움이 없는 영적인 광야를 찾아갈 기독교인이 있을까요?
우리가 영적인 광야를 회피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생명의 깊이를 확보할 수밖에 없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집중해야만 할 그 광야를 찾아가기 싫어합니다. 그런 곳에서는 하루도 견디지 못할 것입니다. 그곳에 한 달만 있으라고 한다면 기독교 신앙자체를 포기할지 모릅니다. 어떤 점에서 영적인 준비가 되지 못한 사람들에게 광야는 자기 파멸의 길인지 모르겠습니다. 판넨베르크는 “하나님의 승리를 향한 길”이라는 설교에서 니체가 말하는 허무주의와 연관해서 이사야서의 광야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오늘 우리 현대인의 의식 속에서 ‘광야’라는 말은 니체가 짜라투스트라에서 “광야는 자란다: 광야를 숨기고 있는 자에게 재앙이 내리리라!”고 언급함으로써 유명하게 된 이후로 허무주의의 상(像)이 되었습니다. 허무주의의 이러한 정신적인 광야에서부터 어떤 조치 없이 우리가 사뿐히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경험한 것과 같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부르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을 부르시는 분을 따라 광야를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광야를 통과할 수 있도록 주의 길을 예비하라고 외치는 한 부르심을, 이것은 곧 오늘 본문의 예언자가 깨달았던 바로 그것인데, 이 부르심을 알아들을 수 있어야만 합니다. 바로 이런 부르심이 광야를 통과할 수 있는 길의 방향을 분명하게 잡을 수 있도록 해줍니다. 광야에서는 일반적으로 방향감각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광야에 뚫린 길의 방향을 지시해주는 이 부르심을 듣게 될 경우에, 그래서 자신을 초월하는 그 독특한 몰아(沒我)적 경험을 하는 경우에 이것은 하나님이 신실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배경이 될 수 있습니다.
허무주의라는 광야에는 이와 같은 명백한 길의 방향이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요? 이 모든 허무주의의 영역에는 방향감각의 상실이 지배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사실 역사상 상당히 많은 이들이 등장해서 사람들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이 그들을 따르게 될 경우에 광야에서 빠져나가야 할 순례자들의 탈출구를 묘연하게 만드는, 그리고 광야에서 배회하다가 파멸하게 만드는 일종의 신기루(Fata morgana)였음이 종종 증명되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동구나 서구를 막론하고 이 허무주의의 광야에서 등장한 마술적인 상을 알고 있습니다. 한 개인만이 아니라 전체 민족들이 이러한 신기루를 통해서 파멸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판넨베르크, 정용섭 역, 여기계신 하나님, 74쪽)

오늘 우리는 대개 광야와는 전혀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습니다. 설령 시골에서 살고 있다 하더라도 실제 삶의 형태는 도시와 다를 게 거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역시 광야와는 전혀 다른 도시 풍의 재미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모든 삶이 화려하고 변화무쌍하고 열정적인 것 같은데, 실제로는 니체가 지적했듯이 광야의 허무주의가 오늘 현대인들을, 그리고 현대의 기독교인들을 지배하고 있다는 게 말입니다. 자신들의 신앙생활은 영적인 에너지가 흘러넘친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겠지요. 실제로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런 영성으로 교회를 꾸린다면 천만다행입니다. 모쪼록 그런 영성이 계속해서 풍성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최고급 인테리어로 꾸민 교회당에서 그렇게 자주 모여 종교집회를 열면서도 영적 감수성이 무뎌가는 분들이 있다면 다시 한 번 더 영적 광야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오직 자기 혼자 하나님과 직면해야만 하는, 혹은 단독자로서 생명의 본질과 대면해야만 하는 그런 광야 말입니다. 결정적인 광야는 죽음과 함께 찾아오겠지만 죽음의 천사가 우리를 부르러 오기 전에라도 일상에서 그런 연습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혼자서 절대적인 힘과 조우하는 연습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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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김민욱

2006.04.01 10:27:21

최근 고민하던 문제에 대해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글을 올리기 위해 용기가 필요했지만 인사 드리고 싶었습니다.)

재수 1년, 대학입학 후 선교단체 3년, 도망치고, 군대 3년, 제대 후 바로 복학했습니다. 지금 학교(토목공학 6학기 째) 다니면서 혼자 밥해먹고 살고 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아는 사람도 없고, 학기 따라가야하고, 무엇보다 인격적인 부딪힘이 있는 만남이 없어 외롭고 고독하다고 생각하고 속으로 힘들었습니다.
이 지면을 빌려서라도 '사실은 내가 예전에 이렇게 살았고, 이런 일을 지나서, 지금 내가 이렇다...'하고 마구 풀어놓고 싶은 마음입니다.

고맙습니다. 최근 묵상을 통해 배우면서 자기발견을 할 수 있었습니다.
스스로 광야 같은 삶에 대해 약간 맛은 보면서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목사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실상은 '하나님 한 분만으로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여전히 고독과 외로움이 마음 속 깊이 두렵다는게 솔직한 고백입니다.
자신의 약함이나 사람에게 의존하는 마음은 숨기고, 나를 책망하는 핵심 앞에 직면하는 것을 피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위로는 받고 싶었던 겁니다. 이런 약함을 인하여 기도해주세요.

이런 삶의 단순함이 하나님과 깊은 만남을 이끌어 줄 것이라는 생각은 했음에도, 그걸 사모한다고 했음에도 마음 깊은 곳에서는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꺼려하는 마음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방향을 잡고 다시 한 번, 엄살부리지 말고 더 진지하게 살아갈 힘이 됩니다.
앞으로도 잘 배우겠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4.02 23:13:46

김민욱 님,
자취하는군요.
졸업해야하고,
취업해야하고,
결혼도 하고,
앞으로 풀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였지요?
지금은 학생이니까 공부만 일단 열심히 하세요.
그러면 좋은 일자리도 생기겠지요.
신앙은 앞으로도 여러번 우여곡절이 있을 겁니다.
올라갔다가 내려가고,
내려갔다고 다시 오르고....
그래도 중심만 잡고 있으면
기우뚱거리다가도 다시 제자리를 잡을 수 있겠지요.
사람들은 모두 외로워한답니다.
아무리 친구가 많아도,
교회식구들이 많아도 외로워하지요.
외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길은 영성이 들어갔든지
아니면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지,
둘중의 하나에요.
하나님과 대면하는 것만이
우리가 진정한 자기가 되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하나님을 대신할 수는 없어요.
흡사 하나님은 공기같아서 그걸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은 없어요.
사람들은 그걸 찾으려고 무던히 애를 쓰기만하죠.
가끔은 친구도 필요하고, 놀이도 필요하고 등등,
그러나 다시 하나님과 직면하는 그 자리로 돌아가야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뿌리가 없는 나무가 되고 말겠지요.
젊었으니까 용기를 갖고 잘 지탱해나갈 수 있을 겁니다.
주의 은총이.
profile

[레벨:13]토토

2007.04.21 23:23:40

이렇게 애정어리게 조언해 주시는 댓글은 처음봅니다
그동안 보았던 목사님의 댓글은 신학적인 답변들 뿐이라서(그속에도 부드러움이 있었지만요)...........
새롭네요
전 삼촌이 없지만
삼촌이 조카에게 얘기해 주는것 같은 친근한 느낌

[레벨:18]은나라

2016.11.04 13:11:00

"비밀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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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5일 ‘어록’5-3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어제 묵상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오늘 묵상의 말머리로 삼아야겠습니다. “심판당한 분을 심판자로 믿으니 말입니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런 문장이 저의 독창적인 생각인지, 아니면 어디서 읽은 게 무의식적으로 기억이 난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심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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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0일 ‘어록’3(4)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막 8:36) 온 천하와 자기 목숨의 대비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줍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목회자와 관계된 한 가지 사실만 짚을까 합니다. 오늘 교회 지도자로 자처하는 우리 목사들은 목회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신학교에서도 이런 사명감을 강조하고, 목회 현장에 나오면 이런 요구가 훨씬 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저는 목사들의 목회적 열정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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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6일 ‘어록’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주님은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이라고 어제의 묵상에서 짚었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부활이 왜 생명을 잃음으로써 얻게 되는 생명인지는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킬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70,80년이고, 유별나게 길어야 90년입니다.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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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5일 ‘어록’2(4)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자칫 기독교 신앙에서 금욕과 자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유럽의 중세기 기독교는 이런 금욕적인 정서가 팽배했습니다. 청교도, 각성신앙, 부흥운동도 크게 보면 이런 흐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삶을 가능한대로 부정하고 거룩한 삶에 매진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교회와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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