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길' 4월1일

조회 수 8735 추천 수 189 2006.04.01 23:34:46
2006년 4월1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막 1:3)

주의 ‘길’

이사야가 말하는 주의 ‘길’은 이스라엘의 바벨론 포로 귀환이 일어나야 할 장소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와 함께 광야에 뚫린 길을 통해서 오십니다. 이사야의 선포에 따르면 하나님의 사자는 바로 그 길을 준비해야 합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있는 마가는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서 이제 세례 요한의 사명을 설명하는 중입니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가야할 길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실적으로 생각한다면, 야훼 하나님에게는 아무런 길이 필요 없으며, 예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사람이 만든 길을 초월하시며, 예수도 역시 그런 길과 상관없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마가는 지금 2,3절에서 세 번에 걸쳐 ‘길’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글을 그대로 따르든지, 아니면 마가의 해석을 따르든지 여기서의 ‘길’은 실제의 길이라기보다는 영적인 의미의 길임에 틀림없습니다. 길은 일종의 메타포로 사용된 것이지요.
예수는 이미 자신을 가리켜 “나는 길이다.”(요 1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 주신 말씀이라기보다는 요한의 신앙고백일 가능성이 훨씬 높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바로 예수를 길로 이해했다는 점에서 예수와 길의 동일화는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길을 내라는 마가복음과 예수가 길이라는 요한의 증언을 연결해서 본다면 예수는 한편으로 길과 분리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길 자체이기도 합니다. 예수와 길이 서로 구분되면서 동시에 일치한다는 이 말은 예수와 하나님이 구분되면서 동시에 일치한다는 삼위일체론처럼 초기 기독교 공동체가 예수의 정체성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인식했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흔적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지만 초기 공동체에 의해서 그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와 동일화했다는 사실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가 바로 길이라고 한다면, 주의 길을 준비하라는 이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이 사회를 정의롭게 만드는 일이나, 세계를 복음화하는 일이 바로 그런 준비라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이런 일들은 분명히 오늘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과업입니다. 마가복음과 달리 누가복음이 인용하고 있는 이사야 40:4,5절을 보면 이런 생각이 더 확실해보입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눅 3:4-6). 이 말씀을 냉정하게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실제로 골짜기를 돋우고, 산과 언덕을 낮게 해서 평탄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제가보기에는 조금 흉내를 낼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북유럽처럼 최상의 복지 시스템을 구축하거나, 중세기 유럽처럼 기독교가 국교로 작동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야훼의 영광이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아름답게 가꾼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그림자가 드리웁니다. 우리가 최선으로 경제, 정치적인 정의를 세워나가야 하겠지만 그것이 곧 주의 길과 일치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준비해야 할 주의 길은 없다는 말일까요? 예수님이 길이라는 요한복음의 증언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길은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준비하십니다.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그가 길을 내십니다. 냉소적으로 들리더라도 용서하십시오. 우리는 주의 길을 방해하지만 않으면 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엇인 주의 길인지, 예수가 왜 길인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마가가 인용한 이사야의 글을 좋은 뜻으로 받아들이는 의미에서 소극적으로라도 우리는 주의 길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해야겠지요.
필자가 보기에 주의 길을 준비한다는 말은 곧 예수가 길이라는 사실의 현실성(reality)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이 일은 복지활동이나 세계복음화와는 다릅니다. 이 일은 휴머니즘의 제고나 교회 조직의 강화와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은 예수에게 일어났던 사건이 궁극적 생명의 선취(先取)이며 성취(成就)라는 사실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증거입니다. 이것이 때로는 영적 현실성을 담아내는 신학으로, 때로는 생명이 가득한 실천운동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든지 이런 일에 증인이라고 한다면, 결국 주의 길을 준비하는 사람들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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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3]토토

2007.04.23 04:38:56

생명이 가득한 실천운동? 너무 어렵습니다 @.@;;;;;;
예를 하나만 들어주세요

[레벨:6]한밀

2011.02.26 01:16:04

목사님,

 

예수님이 그길을 만들어 가신다는 말씀,

다분히 수동적인 삶인것 같지만

저에게도 필요한 신앙의 자세라 생각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그 길을 가셨고,

보여주셨고, 끝내는 그 길때문에

십자가에 달리셨지요.

 

주님의 길, 십자가의 길

그 길이 우리가 따라야 할 길이라 생각됩니다.

 

이제야 이곳을 들렀으니

언제 목사님의 길을 따라가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할지....흑흑흑

 

늦은감이 있고 힘들지만

주님이 이제 막 출발하신 이 길을

함께 가렵니다.

 

주님의 골고다의 십자가앞에

주님의 은총으로 서게된다면

그때는 주의길의 의미를

성령님께서 조명해주시리라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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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1일 ‘어록’5-9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8) 예수의 재림이 곧 세계 완성이라는 어제의 묵상을 조금 더 보충해서 설명해야겠습니다. 여기서 일단 키워드는 ‘세계완성’입니다. 도대체 세계가 완성된다니, 그게 무엇일까요? 우리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이 세상을 완성된 것으로, 또는 완전한 것으로, 아니면 대단히 뛰어난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세상을 잘 이용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삶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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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20일 ‘어록’5-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8) 예수님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이 “온다.”는 것은 물론 재림을 가리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이런 재림신앙을 근본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재림이 이루어질지 모른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막 9:1) 재림이 지연되면서 초기 기독교 내부에서 어떤 혼란이 일어나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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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9일 ‘어록’5-7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온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우선 고대인들이 왜 천사를 생각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기독교 화가들의 그림에도 천사가 자주 등장합니다. 라파엘의 천사 상이 저에게는 아주 인상적입니다. 한 손을 턱을 괴고 하늘을 쳐다보는 천사의 그림이 저의 집에 있는데, 그걸 볼 때마다 라파엘에게는 하늘에 대해 관심이 참으로 많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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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8일 ‘어록’5-6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인자 개념이 내포하고 있는 마지막 심판에 관한 이야기는 앞서의 언급으로 접고,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라는 말씀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영광과 거룩한 천사는 사실 심판과 연관되는 용어라는 점에서 심판 개념의 보충 설명이라고 해도 좋겠군요. 아버지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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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7일 ‘어록’5-5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기독교 신앙의 토대가 ‘생명’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또는 의식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하지만 그 생명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신앙을 추상적으로만 접근한다는 데에 있겠지요. 구원도 결국 죽어서 천당 가는 정도로만 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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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6일 ‘어록’5-4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한국교회에는 심판자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가 적지 않습니다. 마지막 심판자이신 예수님을 마치 염라대왕쯤으로 생각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에 태만한 자들을 유황불이 뜨겁게 타고 있는 지옥으로 보내는 것처럼 겁을 주기도 합니다. 성서에는 그런 그림들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모두 종교적 메타포이지 실체를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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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5일 ‘어록’5-3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어제 묵상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오늘 묵상의 말머리로 삼아야겠습니다. “심판당한 분을 심판자로 믿으니 말입니다.” 이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런 문장이 저의 독창적인 생각인지, 아니면 어디서 읽은 게 무의식적으로 기억이 난 건지는 잘 모르겠으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심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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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4일 ‘어록’5-2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위의 어록에 나오는 단어인 “인자”, 즉 ‘사람의 아들’은 우리말로는 특별한 의미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구약성서에서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묵시문학적 전승과 연관된 것인데, 이 세상(에온)의 마지막에 올 심판자를 가리킵니다. 인자가 단지 심판자라는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어떤 특별한 권능을 소유한 분이...

6월13일 ‘어록’5-1

  • 2008-06-12
  • 조회 수 1564

2008년 6월13일 ‘어록’5-1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막 8:37) 위의 말씀을 앞에 둔 저는 지금 현기증이 날 것 같습니다. 저 말씀이 말하려는 세계를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설명하지 못할 것도 없지요. 이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신앙을 바르게 드러내지 못하면 결국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크게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뜻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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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12일 ‘어록’4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 (막 8:37) 그렇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말씀을 단순히 무슨 일이 있어도 죽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만 받아들이면 곤란합니다. 모든 생명체는 당연히 죽기 싫어합니다. 이 세상의 삶이 아무리 삭막하더라도 살아남는 건 참으로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생명은 우리가 도구적으로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어떤 방식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사건이기 때문입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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