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단강 (2) 4월5일

조회 수 5465 추천 수 83 2006.04.05 23:51:27
2006년 4월5일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막 1:5)

요단강 (2)

오늘 본문은 많은 사람들이 요한에게 와서 세례를 받았다고 설명하지만, 원래 유대인들에게는 세례가 필요 없습니다. 그들은 아이가 태어날 때 남자 아이의 경우에 할례와 정결의식만 행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부분적으로 이런 세례를 행했습니다. 요한은 개종한 이방인들에게 행하던 세례를 유대인 전체를 대상으로 시행한 최초의 인물인 것 같습니다. 세례의 의미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일까요? 요즘 우리가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듯이 한 접시의 물만 있어도 세례를 베풀 수 있는데 굳이 번거롭게 요단강까지 간다는 게 좀 비효율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세례는 지금과 같은 약식으로 베풀어지지 않았습니다. 설령 요단강까지 나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온몸을 적실 수 있을 정도의 물이 필요했습니다. 온몸을 물로 씻어야만 완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된다고 믿었기 때문이겠지요. 지금도 침례교회를 비롯한 몇몇 교파에서는 머리에 약간의 물을 붓는 약식이 아니라 온몸을 물속에 담구는 방식으로 세례를 시행합니다. 어쨌든지 세례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활동하던 광야에서 가장 쉽게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요단강이었다는 사실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집단적으로 몰려드는 군중들에게 세례를 베풀기에 요단강처럼 편리한 곳을 없었을 겁니다.
강(江)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원초적 영성이 발현되는 곳입니다. 헬라 신화에도 강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헤르만 헷세의 <싯다르타>를 보면 부처도 역시 강에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고대 인간 문명은 거의 강 유역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황하, 갠지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나일이 그런 강들입니다. 지금도 모든 도시는 강을 끼고 있습니다. 한강의 서울, 낙동강의 대구, 라인강의 쾰른, 세느강의 파리, 테임즈강의 런던, 블타바강의 프라하 등등, 크고 작은 도시들은 거의 강을 젖줄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제가 유럽 여행 중에 느낀 점의 하나는 그들이 강과 아주 가깝게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늘 강둑을 따라 산책하고, 조깅하고, 배를 타면서 강과 더불어 호흡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강을 그만큼 친숙하게 느낀다는 말이겠지요. 인도 사람들은 아예 죽음을 강에서 맞이한다고 하지요. 이에 반해 우리의 생활은 강과 단절되어 있습니다. 요즘은 강의 둔치에 운동 시설을 마련하기도 하고, 산책로를 마련하기도 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일반 사람들에게 강은 저 멀리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홍수를 통한 두려움이 너무 많거나, 아니면 강이라는 자연을 다스릴 수 없다는 경외심이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푼 요단강은 영적인 차원에서 차안과 피안을 구분하는 경계입니다.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려면 요단강을 건너야 하듯이 우리는 현재의 삶에서 미래의 삶으로 건너기 위해서 영적인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세례가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산다는 의미이듯이 영적인 요단강은 옛 삶은 죽고 전혀 새로운 삶이 살아나야 할 바로 그 공간과 시간이겠지요. 애벌레에서 나비가 되려면 허물을 벗듯이 영적인 허물벗기가 일어나야 할 바로 그곳이겠지요. 우리에게는 이런 영적인 요단강이 있었습니까?

[레벨:1]똑소리

2006.04.06 18:15:54

목사님!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내용이 알맹이 보다 곁가지가 더 풍성한것 같습니다.
그렇다고해서 곁가지가 다 쓸모없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목사님께서는 서두에서 유대인들은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는 설명과 함께 세례를 한단계 업그레어드
시켰다는 말씀에 이어서
"그런데 그는 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것일까요?"
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저는 이 질문에 어떤 답이 나올까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런데 곧 바로 답이 나오지 않고 현재 제도권 교회에서 베푸는 약식 세례에 대해서 약간 언급하시다가
진짜 답은 아래 딱 한 줄로 요약할수 있겠더군요.
"온몸을 물로 씻어야만 완전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된다고 믿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다가 끝부분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압축이 되더군요.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푼 요단강은 영적인 차원에서 차안과 피안을 구분하는 경계입니다."

글의 분량은 제법되는데 읽고나면 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는지 아직도 감이 잘 안옵니다.
그런면에서 "광야에서 강이 가까왔기 때문에....."라는 식의 대답은 좀 의외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4.06 23:45:43

똑소리 님,
잘 지적해 주셨군요.
이래서 글은 다른 사람의 비판을 받아야 하는가 봅니다.
무언가 있을 것 같은 바람을 잡았다가 별 게 없으니까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이 마가복음 묵상은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쓰고 있어요.
아무 것도 참고하지 않고,
단순히 성서와 컴퓨터만 놓고 있습니다.
성구 에세이를 쓴다는 기분으로요.
설교하는 것도 아니고
신학논단도 아니고
성경공부하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생각하고 싶은 대로 생각해보는 거죠.
아마 논리적으로 부족한 부분들이 앞으로 자주 눈에 뜨일 겁니다.
그런 걸 아예 무시하고
차 한잔 앞에 놓고,
초 한자루 켜놓고,
또는 모짜르트 음악이나 대금 연주를 들으면서
신학생이나 젊은 목사들과 담소한다는 생각으로 쓰고 있어요.
그래도 너무 비약되면 문제가 되겠지요.
그럴 때 오늘 똑소림 님이 콤멘트한 것과 같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요한이 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었을까, 하는 질문은
위의 글에서 핵심은 아닙니다.
그냥 강과 세례, 그리고 강의 영성을 한번 생각해보자는 거였지요.
그래서 요단강이 광야에서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그곳을 선택했다고 설명했어요.
너무 뻔한 설명이지만,
핵심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대충 말한 거죠.
앞으로 이 글을 어떤 성격으로 끌어가야 할지 저오학하게 감이 잡히지 않았어요.
새로운 방식의 <큐티>로 하고 싶은데,
그게 잘 될지 모르죠.
이제 시작이니까 한번 천천히 나가볼까 합니다.
넉넉잡고 3년 정도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과 삶 전체를 조금씩 풀어나가는 것이죠.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레벨:7]우익지

2006.04.12 03:10:25

저는 직장에서 이 큐티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정목사님처럼 멋있게 차를 마시지는 않지만 점심을 먹으면서 이 큐티를 읽습니다. 저 혼자 방을 쓰기 때문에 방해되는 것도 없고 남성중창을 좋아해서 자주 듣는 곡을 들으면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저도 목사님 글을 따라 점점 깊은 신앙으로 이끌려 들어가길 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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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6월5일 ‘어록’2(4)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자칫 기독교 신앙에서 금욕과 자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유럽의 중세기 기독교는 이런 금욕적인 정서가 팽배했습니다. 청교도, 각성신앙, 부흥운동도 크게 보면 이런 흐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삶을 가능한대로 부정하고 거룩한 삶에 매진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교회와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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