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세례, 4월11일

조회 수 5380 추천 수 32 2006.04.11 23:11:55
2006년 4월11일, 물세례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1:8)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지금은 없어진 학습을 받았고 중학교 3학년을 마칠 즈음인 성탄절 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때는 최소한의 나이만 차면 대충 세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전도사님만 계셨기 때문에 세례 받던 날은 다른 데서 목사님이 오셨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군요. 성탄절이면 다른 교회도 바쁜 날인데, 어떻게 다른 교회 목사님이 오셨을까요? 내가 지금 세례 받은 날짜를, 혹은 그 절기를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이건 별 마음의 준비 없이 세례를 받았다는 증거인 것 같습니다. 주기도, 사도신경, 십계명을 외우고 몇 가지 세례 문답과 성경상식을 공부하는 것으로 세례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 당시에 저는 친구들을 만나는 게 재미있어서 교회에 나갔다가, 얼떨결에 세례를 받은 것 같습니다.
세례를 소홀하게 받았다고 해서 세례를 다시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 역사에서 재세례파가 등장한 적이 있지만, 그리고 그들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지만 만약에 우리가 세례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한다면 이런 차원에서 세례의 실질적인 효과 운운하는 건 무의미합니다. 세례는 세례를 베푸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의 신앙과 인격이 아니라 세례의 주체에 의해서 그 정당성이 확보됩니다. 세례의 주체는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서 세례에 관한 신학적 논의를 전개하려는 게 아니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너무 깊이 들어가지 말고, 요한의 ‘물세례’가 무엇인지를 간단히 짚고 지나가도록 합시다.
요한은 자신이 물로 세례를 베풀었다고 설명합니다. 사실 세례는 어디서나 물로 베풉니다. 요한이 굳이 물세례라고 표현한 이유는 예수님의 성령세례와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지 세례가 기본적으로 물에 잠겼다가 새로운 존재로 나온다는 의미에서 볼 때 요한의 물세례는 인격적인 변화를 의미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물세례는 그런 변화를 상징합니다. 이런 인격과 윤리의 변화는 바로 요한의 메시지에 담긴 중심이기도 합니다.
이 사회는 종교를 향해서 이런 요구를 합니다. 종교인들은 세상에서 인격적으로 존경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경험과 삶이 이원론적으로 분리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인격적인 변화는 기독교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인격적으로, 윤리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인다면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의 눈이 달라질 것입니다. 이런 인격과 도덕의 변화는 단지 개인의 품성에 머무는 게 아니라 사회 구조의 변화까지 포함합니다. 교회는 이 사회에 정의와 평화가 실현될 수 있도록 투쟁해야 합니다. 해방신학, 민중신학, 여성신학 등은 사람들이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헌신하는 신앙적 태도입니다. 보수적인 입장에서 강조하는 개인의 변화와 진보적인 입장에서 강조하는 사회의 변화 모두 일종의 물세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자 모두 삶의 형식들이 바뀐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은 개인 차원과 사회 차원에서 삶의 형식이 바뀌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훨씬 근원적인 변화를 요구합니다. 요한의 물세례는 매우 현실적이고 절실한 것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잠정적이고 제한적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분명히 뚫어보았기 때문에 자신은 물세례만 베풀 뿐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물세례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인 성령세례에게 하루빨리 자리를 내주어야 합니다.

주님, 우리는 요한의 물세례에 머물러 있습니까? 아니 우리는 물세례마저 받지 못한 사람들은 아닙니까? 세례의 근본에 들어가서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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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8월15일 권세(2)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막 2:10) 본문이 말하는 권세는 헬라어 ‘엨수시아’의 번역입니다. 이것의 가장 일반적인 영역은 ‘authority’, ‘supernatural power’, ‘government’입니다. 일반적으로 ‘권위’로 번역됩니다. 루터는 그 단어를 ‘Vollmacht’(폴마흐트: 권능)라고 번역했더군요.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의 언행에 특별한 권위가 깃들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권위는 단지 기적을 행한다는 사실에만 있는 게 아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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