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아들, 4월18일

조회 수 4518 추천 수 28 2006.04.18 23:31:35
2006년 4월18일 사랑하는 아들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1:11)

하늘로부터 울린 그 소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마가복음 기자를 비롯한 공관복음서 기자들이, 더 정확히 말해서 초기 그리스도교회가 고백하고 있는 핵심은 이미 마가가 복음서의 첫머리에서 언급했듯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제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아들일 뿐만 아니라 구약성서에 의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외아들로 해석됩니다.
‘해석’이라는 말에 대해서 조금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그 문제는 우리의 성서읽기가 계속되는 한 끊임없이 제기될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사건은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 역사는 실증적인 게 아니라 해석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실이 아니라는 말인가, 하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인간의 삶과 역사는 그렇게 단순하게 사실이다, 아니다, 하는 말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조건 의미 있는 건 아닙니다. 그 사건이 역사의 과정을 통해서 피와 살을 얻게 되고, 그 근본적인 의미가 훨씬 심화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해석입니다. 이런 문제는 다른 상황에서 다시 언급될 테니까 여기는 접어두고 오늘의 말씀으로 돌아갑시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예수님 자신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리지 않으신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도 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그렇게 인식할 수 있는 단서가 예수님의 말씀 중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또는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적도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과 더불어 우리는 이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이 풍부한 아버지로, 탕자를 기다리는 아버지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어떻게 아버지 상(像)이냐, 오히려 어머니 상이어야 하지 않는가, 하고 따지고 들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아버지는 남성으로서의 아버지라기보다는 인간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는 관점에서 보는 아버지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옥황상제처럼 하늘 높은 곳에서 인간의 행위를 감찰하고 판단하며, 인과응보의 기준으로 심판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삶으로 내려오셔서 우리와 하나 되신 분이십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이런 하나님을 가리켜 인간의 고통이 있는 바로 그곳에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의 자리까지 내려오셔서 인간과 같은 몸을 입으셨다는 걸 신학적인 용어로 ‘성육신’(incarnation)이라고 하는데, 그분이 곧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몸을 입으신 하나님이라는 게 곧 그리스도교의 그리스도론이며, 동시에 신론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은 위격이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마가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이런 신앙을 오늘 신화적 방식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하늘에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소리가 들렸다고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요한복음의 몇 구절을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는 요한복음 기자의 진술에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로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가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놀랍게 여기게 하시리라.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중략>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명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요 5:19-21, 24-27)

주님, 당신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이 신뢰심을 놓치지 않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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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9일 ‘어록’1(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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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9일 ‘어록’1(2)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예수님을 영접했다든지, 예수님을 뒤따라 산다는 말을 자주 들었겠지만 그런 신앙의 사태 안으로 들어가는 건 그렇게 간단하게 아닙니다. 왜 그런지 일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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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8일 ‘어록’1(1)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우리는 이제 오늘부터 예수님의 유명한 경구를 연속적으로 살피게 될 겁니다. 그 내용은 막 8:34-9:1에 나오는 여섯 경구입니다. 각각 독립된 이 경구는 기본적으로 ‘어록집’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마가복음 기자에 의해서 보충된 것도 있습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아무래도 ‘어록집’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고 지나가야겠군요. 어록집은 말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모아놓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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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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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7일 사탄아!(8)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사탄아!” 하는 제목으로 나눈 지난 일주일간의 묵상이 너무 이론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이 단락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전형적인 큐티 방식의 묵상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저 책망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본문이 분명하게 제기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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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6 사탄아!(7)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짧은 묵상의 글에서 제가 번번이 위험한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성 문제는 이렇게 짧은 글로는 다루기 힘든 주제인데도, 자꾸 그쪽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복음서의 중심 주제가 결국은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집중되기 때문일 겁니다. 어느 본문을 다루든지 깊이 들어가다 보면 그 문제를 건드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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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5일 사탄아!(6)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위의 본문이 자신의 메시아 성에 대한 요구를 예수님이 거절한 것이라는 어제의 묵상을 조금 더 보충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 성을 거절했다는 사실이 그분의 메시아 성에 대한 근거를 훼손시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비록 예수님이 메시아 성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는 메시아로 살았기 때문에 아무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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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4일 사탄아!(5)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아!” 하고 강한 어조로 책망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앞에서 살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메시아 성과 연관됩니다.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이야기의 흐름을 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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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3일 사탄아!(4)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사탄아!” 하는 표현이 불편하게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건 바로 선악 이원론, 성속 이원론이 아니냐, 또는 사탄을 실체론적으로 인정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탄은 악의 심층을 가리키는 고대인들의 종교적 메타포입니다. 사탄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으면 도저히 해명될 수 없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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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2일 사탄아!(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대립할 때를 우리가 분간하기 어렵다고 어제의 묵상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며, 사람의 일은 그런 걸 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시각을 보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구원이 아직 기독교의 신앙으로 받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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