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짐승과 함께!, 4월30일

조회 수 4667 추천 수 35 2006.04.30 23:26:59
2006년 4월30일 들짐승과 함께!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 1:13)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없는 언급이 마가복음에는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는 언급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들짐승이 무엇인지에 관한 설명은 없습니다. 정황적으로 볼 때 이 들짐승은 광야에 사는 것들일 텐데, 토끼일까요? 사슴일까요? 조금 사나운 늑대일까요?
마가가 무슨 의미로 들짐승 이야기를 여기에 첨부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예수님과 짐승이 전혀 어울리지 않은 관계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출생설화에 따르면 예수님은 외양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떤 그림을 보면 마리아와 요셉과 아기 예수, 그리고 배경으로 소, 또는 양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셨습니다. 예수님과 연관된 짐승 이야기는 이런 정도가 모든 것이겠지요.
하나님의 나라에는 짐승들이 있을까요? 그 나라에서 인간이 영생을 얻는다면 짐승들도 역시 영생을 얻을까요? 사실 짐승만 문제는 아닙니다. 곤충과 박테리아는 어떻게 될까요? 오늘 우리는 이 지구의 생명세계를 이런 곤충과 박테리아를 제외하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생명체들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유기적 관계를 우리가 알기도 하지만 모르기도 합니다. 아마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을 알기는 불가능할 겁니다.
인간과 짐승의 관계, 인간과 미생물과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때로는 협조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될지 잘 모릅니다. 어쩌면 미생물이 인간 종을 완전히 파멸시킬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이 미생물을 완전히 제거하는 날은 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미생물이 없으면 생존할 수 없지만 미생물은 인간이 없어도 얼마든지 생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간과 주변 생명체들의 관계를 모른다는 것과 그리스도교 신앙과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 중심으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어리석음만은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서 시작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전혀 새로운 생명 형식이 시작되겠지요. 그때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부분적인 생명만 경험하고 살아갑니다. 그 부분적인 것 속에는 전체적인 것이 숨겨져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짐승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미래에 시작될 절대적인 생명 세계를 부분적이지만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가 논의해야할 그리스도교 윤리는 매우 복잡합니다. 육식 중심의 먹거리 문화와 의학발전을 위한 의학실험 같은 문제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무엇인 하나님 나라의 생명 세계에 상응하는 삶의 태도일는지에 관해서 꾸준한 논의가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이 시험받는 그 장소에, 바로 그 순간에 사람은 함께 하지 못했지만 들짐승은 함께 했습니다. 들짐승이 바로 예수님에게 힘이 되었다는 뜻이 아닐까요? 이런 점에서 본다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예수님에게 힘이 될 수 있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는 말이 됩니다. 똑똑한 인간이 아니라 무식한 짐승이 훨씬 유용한 존재들인지 모릅니다.

주님, 사람과 들짐승, 그리고 미생물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명체들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아멘.

[레벨:18]은나라

2016.07.11 21:52:26

사자들과 함께 뒹굴고, 독사들이 어린이가 장난쳐도 물지않는 세상을 우리가 장차 갈 천국으로 배웠는데요.

실제로 이런 그림이 그려지는 모습이 아니라(어제 우리교회 목사님은 실제로 천국에 사자와 독사와 어린아이가 있다고 하셨지만), 지금의 세상구조가 아닌 예수가 제자들의 발을 씻기듯..

강한자가 약한자를 섬기는 세상, 죽기위해 사는 세상(인생)아닌.. 살기위해 죽는 세상(세례,십자가의 삶)

그런 곳이 천국이 아닐까? 인생속에서 살아내야할 천국, 하나님 나라를 사는삶..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ㅎ

글을 읽다가 갑자기 생각나서요..

 

[레벨:18]은나라

2016.11.05 12:06:15

모든것을 인간중심으로 생각하다보면 끝이 없을거 같습니다.

하나님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역사적 예수도 인간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지신 것으로..

기독교 안에서는 가르치지만, 오늘 이글을 읽다가..

사계절을 생각하며.. 자연현상이 인간만을 위해 나타나지 않듯..

반대로 자연과 미생물을 위해 인간이 존재하는것은 아닐까?도 처음으로 생각을 해봅니다.

예수가 섬기기 위해 오셨다는 말씀이, 우리가 이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짐승과 미생물과 자연을 섬기기위해 존재하는것은 아닌지.. 그게 어쩌면 하나님의 뜻은 아닐지.. 잠시 생각에 잠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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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8일 ‘어록’1(1)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우리는 이제 오늘부터 예수님의 유명한 경구를 연속적으로 살피게 될 겁니다. 그 내용은 막 8:34-9:1에 나오는 여섯 경구입니다. 각각 독립된 이 경구는 기본적으로 ‘어록집’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마가복음 기자에 의해서 보충된 것도 있습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아무래도 ‘어록집’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고 지나가야겠군요. 어록집은 말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모아놓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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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5일 사탄아!(6)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위의 본문이 자신의 메시아 성에 대한 요구를 예수님이 거절한 것이라는 어제의 묵상을 조금 더 보충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 성을 거절했다는 사실이 그분의 메시아 성에 대한 근거를 훼손시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비록 예수님이 메시아 성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는 메시아로 살았기 때문에 아무런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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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4일 사탄아!(5)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아!” 하고 강한 어조로 책망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앞에서 살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메시아 성과 연관됩니다.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이야기의 흐름을 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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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3일 사탄아!(4)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사탄아!” 하는 표현이 불편하게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건 바로 선악 이원론, 성속 이원론이 아니냐, 또는 사탄을 실체론적으로 인정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탄은 악의 심층을 가리키는 고대인들의 종교적 메타포입니다. 사탄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으면 도저히 해명될 수 없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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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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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2일 사탄아!(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대립할 때를 우리가 분간하기 어렵다고 어제의 묵상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며, 사람의 일은 그런 걸 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시각을 보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구원이 아직 기독교의 신앙으로 받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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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1일 사탄아!(2)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우선 예수님의 설명에 대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잘못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고난과 죽임과 부활이 일어나지 말도록 요구했습니다. 여기서 부활 문제는 조금 복잡하니까 빼고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과 죽임을 만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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