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 잡힌 후, 5월2일

조회 수 4645 추천 수 61 2006.05.02 23:26:32
2006년 5월2일 요한이 잡힌 후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14).

마가는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이 활동을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이 본문에는 아직 설명이 없지만, 요한이 잡힌 이유는 헤롯왕의 부도덕성을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요한이 헤롯의 행위를 보고 못 본채 하거나 에둘러 비판했다면 이렇게까지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겠지만 아주 노골적으로 비판하다가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결국 요한은 풀려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이처럼 부도덕한 통치자와 그런 세력을 향해서 적극적으로 투쟁한 세례 요한의 선택은 옳은 것인가요? 아니면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최소한 생명을 보존하는 방식으로 투쟁하는 게 옳았을까요? 요한의 죽음을 생각하면 너무나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아서 정의를 외쳤다면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도 조금 더 효과적으로 나타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나간 역사를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요한의 투쟁이 무모했다고 말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그가 무조건 옳았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그가 자기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어쩌면 요한의 운명은 2천 년 전 그 당시만이 아니라 오늘도 반복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정치, 경제적 헤게모니를 쥔 세력은 반대 세력을 아주 간단히 제압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무소불의의 힘을 행사하고 있는 미국은 지금 북한을 거의 무제한적으로 압박해나가고 있습니다. 경제적인 발전만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오늘의 대한민국은 새만금의 갯벌을 간단하게 제압했습니다. 교회성장 만능주의가 교회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제2의, 제3의 요한은 지금도 여전히 감옥에 구금당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유대의 마지막 예언자, 불꽃처럼 말씀을 선포하던 세례 요한이 잡혔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의 역사가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런 절망적인 상황을 뚫고 자신의 통치를 다시 본격적으로 시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새로운 역사는 ‘요한이 잡힌 후’에 다시 시작됩니다. 우리의 눈에 ‘요한이 잡힌 후’는 절망이지만 하나님의 눈에 그것은 오히려 희망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것 너머에서 고유한 방식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에게만 의존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존하는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이 희망은 결코 자기 욕망이나 미망이 아닙니다. 현실 도피적 망상도 아닙니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기다림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현실의 어려운 상황에 매달려서 좌절하는 사람들과 그것 너머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통치를 희망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유대인들의 광야생활 40년 역사에서도 이런 두 종류의 사람들이 계속해서 싸웠습니다. 한쪽의 사람들은 광야의 어려운 현실에서 이집트의 삶을 그리워하는 이들이며, 다른 한쪽의 사람들은 가나안의 자유를 기다리는 이들이었습니다. 구약성서는 후자의 사람들에 의해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하나님의 뜻이 실행되었다고 가르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요한이 잡힌 후’처럼 어두운가요? 대한민국이라는 이 공동체의 현실이 어둡게 느껴지나요? 그렇다면 그건 오히려 하나님의 활동하실 수 있는 기회일지 모릅니다. 임박한 하나님의 일을 손꼽아 기다려야 할 순간일지 모릅니다. 그런 구원 역사의 신비 안에서 살아갑시다.

주님, 요한이 잡힌 후에 오히려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뚫어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아멘.

[레벨:18]은나라

2016.07.11 22:23:5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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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4일 사탄아!(5)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아!” 하고 강한 어조로 책망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앞에서 살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메시아 성과 연관됩니다.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이야기의 흐름을 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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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3일 사탄아!(4)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사탄아!” 하는 표현이 불편하게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건 바로 선악 이원론, 성속 이원론이 아니냐, 또는 사탄을 실체론적으로 인정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탄은 악의 심층을 가리키는 고대인들의 종교적 메타포입니다. 사탄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으면 도저히 해명될 수 없는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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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2일 사탄아!(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대립할 때를 우리가 분간하기 어렵다고 어제의 묵상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며, 사람의 일은 그런 걸 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시각을 보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구원이 아직 기독교의 신앙으로 받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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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1일 사탄아!(2)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우선 예수님의 설명에 대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잘못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고난과 죽임과 부활이 일어나지 말도록 요구했습니다. 여기서 부활 문제는 조금 복잡하니까 빼고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과 죽임을 만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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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0일 사탄아!(1)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베드로의 항변을, 사실은 예수님을 위한 항변인데, 들으신 예수님은 예상외의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일단 제자들을 돌아보면서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꾸짖음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를 향한 것이라는 뜻이겠지요. “사탄아!” 병행구인 마태복음 16:21절 이하에는 “사탄아!” 하는 예수님의 책망이 거론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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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8일 베드로의 항변(1)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막 8:32) 고난, 죽임, 부활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서 본질적인 것인데, 그것을 베드로가 가로막았다는 건 약간 이상하게 보입니다. 우리가 이런 고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면 어떻게 반응을 했을까요?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었다면 베드로처럼 우리도 항변했겠지만,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도 함께 말씀하셨다면 당연히 아멘으로 화답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뜯어말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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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16일 케리그마(9)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예수님이 고난, 죽임, 부활을 예고하셨다는 위의 본문은 예수님의 삶과 초기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완성된 초기 기독교의 신앙적 명제입니다. 이 명제에 기독교 신앙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케리그마라고 합니다. 이 내용을 조금 더 확대하면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도 역시 케리그마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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