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5일 생명과 법 (2)

조회 수 2673 추천 수 36 2006.11.05 08:20:17
2006년 11월5일 생명과 법 (2)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막 3:5)

어제 저는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율법으로부터 사랑으로 신앙의 초석을 옮겼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진술은 많은 보충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원칙적으로 율법도 사랑을 폐기하지 아니며, 사랑의 법이라는 것도 우리의 삶에서 구체화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늘 신앙의 내용을 새롭게 해석하고 구체적으로 적용시켜나가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안으로 다시 들어가 봅시다.
본문의 상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적대시하는 바리새인들과 예수님이 같은 회당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한쪽에는 손 마른 사람도 있습니다.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황이 간단할 수도 있고, 거꾸로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똑같은 상황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생각은 정 반대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안식일에 초점을 두고 바라보았고, 예수님은 손 마른 사람에게 초점을 두었습니다. 객관적인 입장에서만 본다면 누가 옳으냐, 그르냐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겉모양만 본다면 안식일을 강조하는 바리새인들도 생명을 존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의 논리는 아주 명확하고 합리적입니다.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 것은 좋지만, 가능한대로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하면 사람도 살리고 안식일도 살리는, 요즘 말로 ‘위윈’하는 일이니까요.
요즘 우리 사회 안에서도 북한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다르게 나타납니다. 북한을 압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역시 포용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평화를 염두에 두고 있겠지요. 누가 옳은가 하는 판단을 정확하게 내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법대로 하는 게 옳습니까, 아니면 사랑으로 하는 게 옳습니까? 여전히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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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5일 ‘어록’2(4)

  • 2008-06-04
  • 조회 수 1690

2008년 6월5일 ‘어록’2(4)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이 말씀은 자칫 기독교 신앙에서 금욕과 자학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유럽의 중세기 기독교는 이런 금욕적인 정서가 팽배했습니다. 청교도, 각성신앙, 부흥운동도 크게 보면 이런 흐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속의 삶을 가능한대로 부정하고 거룩한 삶에 매진하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교회와 세...

6월4일 ‘어록’2(3) [1]

  • 2008-06-04
  • 조회 수 1332

2008년 6월4일 ‘어록’2(3)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어제의 묵상에서 성서가 말하는 생명이 단지 생물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획득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런 표현이 어떤 분들에게는 관념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진다고 하더라도 병든 몸이 건강해진다거나 수명이 길어지는 것도 아니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과 생명이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요? 창세기가 말하는 하나...

6월3일 ‘어록’2(2) [3]

  • 2008-06-03
  • 조회 수 1456

2008년 6월3일 ‘어록’2(2)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목숨을 얻음과 잃음에 관한 예수님의 이 말씀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일단 성서가 말하는 ‘목숨’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낱말 뜻으로만 본다면 목숨은 생명, 삶입니다. 우리가 살아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생물학적으로 생명은 뇌와 심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성서는 그런 생물학적인 현상에 한정해서만 생명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런 생물학적...

6월2일 ‘어록’2(1)

  • 2008-06-03
  • 조회 수 1382

2008년 6월2일 ‘어록’2(1)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막 8:35)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는다는 말이 옳은가요? 우리의 세상 경험에 의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침에 눈을 뜨면서부터 다시 잠속으로 빠져들을 때까지 목숨을 지탱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오늘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치열한 삶의 모습은 모두 자기의 목숨을 지키려는 노력들입니다. 돈을 벌고, 병원에 다니고, 취미생활을 하는 것을 비롯해서 학생들의 공부도 역시 ...

6월1일 ‘어록’1(5) [1]

  • 2008-05-31
  • 조회 수 1468

2008년 6월1일 ‘어록’1(5)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의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그 내면적인 기준은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이 말하는 대로 ‘자기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만 우리는 주님을 따를 수 있고, 그럴 때만 우리의 행위는 근거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자기를 부인하지 못할 때 우리의 모든 종교 행위는 허위의식으로 빠지게 됩니다. 자기를 ...

5월31일 ‘어록’1(4) [2]

  • 2008-05-30
  • 조회 수 1529

2008년 5월31일 ‘어록’1(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인가요? 우리의 삶을 온전히 하나님에게 드린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나요? 이런 질문 앞에서 저는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제 삶이 별로 주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까요. 그렇게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런 열정도 별로 없으니까요. 그래도 이런 질문을 피해갈 수는 없으니,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일단 교회 생...

5월30일 ‘어록’1(3)

  • 2008-05-29
  • 조회 수 2152

2008년 5월30일 ‘어록’1(3)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어제의 묵상에서 거론된 ‘값싼 은혜’가 무슨 뜻인지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한번 짚고 넘어가는 게 좋겠습니다. 이 개념은 마틴 루터의 ‘오직 은총’ 개념과 연결됩니다. 루터는 구원이 종교적 업적으로 우리가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이런 은총 중심적 구원론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오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 ...

5월29일 ‘어록’1(2) [1]

  • 2008-05-28
  • 조회 수 2511

2008년 5월29일 ‘어록’1(2)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을 따른다는 사실은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 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은 예수님을 영접했다든지, 예수님을 뒤따라 산다는 말을 자주 들었겠지만 그런 신앙의 사태 안으로 들어가는 건 그렇게 간단하게 아닙니다. 왜 그런지 일단 ...

5월28일 ‘어록’1(1) [1]

  • 2008-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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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8일 ‘어록’1(1)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막 8:34) 우리는 이제 오늘부터 예수님의 유명한 경구를 연속적으로 살피게 될 겁니다. 그 내용은 막 8:34-9:1에 나오는 여섯 경구입니다. 각각 독립된 이 경구는 기본적으로 ‘어록집’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마가복음 기자에 의해서 보충된 것도 있습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아무래도 ‘어록집’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고 지나가야겠군요. 어록집은 말 그대로 예수님의 말씀을 모아놓은 책...

5월27일 사탄아!(8)

  • 2008-05-26
  • 조회 수 1399

2008년 5월27일 사탄아!(8)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사탄아!” 하는 제목으로 나눈 지난 일주일간의 묵상이 너무 이론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이 단락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전형적인 큐티 방식의 묵상으로 돌아갈까 합니다. 베드로를 향한 예수님의 저 책망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은 본문이 분명하게 제기해주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

5월26일 사탄아!(7) [4]

  • 2008-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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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26 사탄아!(7)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짧은 묵상의 글에서 제가 번번이 위험한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아 성 문제는 이렇게 짧은 글로는 다루기 힘든 주제인데도, 자꾸 그쪽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복음서의 중심 주제가 결국은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집중되기 때문일 겁니다. 어느 본문을 다루든지 깊이 들어가다 보면 그 문제를 건드리게...

5월25일 사탄아!(6)

  • 2008-05-24
  • 조회 수 1339

2008년 5월25일 사탄아!(6)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위의 본문이 자신의 메시아 성에 대한 요구를 예수님이 거절한 것이라는 어제의 묵상을 조금 더 보충해야겠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 성을 거절했다는 사실이 그분의 메시아 성에 대한 근거를 훼손시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비록 예수님이 메시아 성을 원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미 그는 메시아로 살았기 때문에 아무런 상...

5월24일 사탄아!(5)

  • 2008-05-23
  • 조회 수 1371

2008년 5월24일 사탄아!(5)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예수님이 베드로를 향해서 “사탄아!” 하고 강한 어조로 책망하신 이유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을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앞에서 살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표면적인 이유이고,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메시아 성과 연관됩니다.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이야기의 흐름을 천천...

5월23일 사탄아!(4)

  • 2008-05-22
  • 조회 수 1584

2008년 5월23일 사탄아!(4)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사탄아!” 하는 표현이 불편하게 들리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건 바로 선악 이원론, 성속 이원론이 아니냐, 또는 사탄을 실체론적으로 인정하는 거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사탄은 악의 심층을 가리키는 고대인들의 종교적 메타포입니다. 사탄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으면 도저히 해명될 수 없는 사건...

5월22일 사탄아!(3) [5]

  • 2008-05-21
  • 조회 수 2006

2008년 5월22일 사탄아!(3)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이 대립할 때를 우리가 분간하기 어렵다고 어제의 묵상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이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며, 사람의 일은 그런 걸 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의 시각을 보면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구원이 아직 기독교의 신앙으로 받아들...

5월21일 사탄아!(2)

  • 2008-05-20
  • 조회 수 1649

2008년 5월21일 사탄아!(2)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우선 예수님의 설명에 대답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의 잘못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고난과 죽임과 부활이 일어나지 말도록 요구했습니다. 여기서 부활 문제는 조금 복잡하니까 빼고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과 죽임을 만류...

5월20일 사탄아!(1) [2]

  • 2008-05-19
  • 조회 수 2415

2008년 5월20일 사탄아!(1) 예수께서 돌이키사 제자들을 보시며 베드로를 꾸짖어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막 8:33) 베드로의 항변을, 사실은 예수님을 위한 항변인데, 들으신 예수님은 예상외의 태도를 보이셨습니다. 일단 제자들을 돌아보면서 베드로를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의 꾸짖음은 베드로만이 아니라 모든 제자를 향한 것이라는 뜻이겠지요. “사탄아!” 병행구인 마태복음 16:21절 이하에는 “사탄아!” 하는 예수님의 책망이 거론되지...

5월19일 베드로의 항변(2)

  • 2008-05-19
  • 조회 수 2069

2008년 5월19일 베드로의 항변(2)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막 8:32)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고난, 죽임, 부활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항변한 이유는 그 당시의 메시아 상이 이것과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라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아무래도 ‘부활’에 관해서 한 마디 더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기준으로만 본다면 아무리 고난과 죽임이 예고되었다고 하더라도 부활이 뒤따른다는 사실이 확실하다면 예수의 운명을 마다할 까닭이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명시적으로 ...

5월18일 베드로의 항변(1)

  • 2008-05-17
  • 조회 수 1793

2008년 5월18일 베드로의 항변(1) 드러내 놓고 이 말씀을 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매 (막 8:32) 고난, 죽임, 부활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서 본질적인 것인데, 그것을 베드로가 가로막았다는 건 약간 이상하게 보입니다. 우리가 이런 고난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면 어떻게 반응을 했을까요? 고난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었다면 베드로처럼 우리도 항변했겠지만,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도 함께 말씀하셨다면 당연히 아멘으로 화답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뜯어말린 ...

5월17일 케리그마(10) [3]

  • 2008-05-16
  • 조회 수 1650

2008년 5월17일 케리그마(10)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막 8:31)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임과 부활을 케리그마로 생각하는 이유는 바로 그것만이 우리의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원 공동체에 속한 우리는 이 케리그마에 매진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런 신앙을 관념적이라거나 실천이 없다고 비판하지만, 그건 케리그마를 잘 모르는 데서 나오는 오해입니다. 케리그마에 천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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