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2일, 목
루터(8)
1520년이 루터와 종교개혁 역사에서 중요하다. 그 해에 루터가 종교개혁 3대 논문이라 이름 붙여진 글을 썼기 때문이다.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1520년 8월18일)과 『교회의 바벨론 유수』(10월6일)와 11월에 나온 『그리스도인의 자유』이다. 더구나 루터는 60일간의 여유를 준 교황의 파문 교서 <엑수르게 도미네>를 1520년 12월10일에 공개적으로 불살랐다. 이 교서는 앞서 6월15일에 발송된 것이다. 이제 루터는 교황청과의 본격적인 투쟁을 앞둔 상황에서 강을 건너고 배를 불사른 겪이다. 루터의 나이 서른일곱 살 때의 일이다. 3대 논문을 잠시 살펴보자.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고함』에서 루터는 교황청의 세 가지 담을 비판한다. 세속 지위 위의 영적 지위라는 담, 성서해석에 대한 교황의 우월권이라는 담, 공의회소집권에 대한 교황의 독점권이라는 담. 당연히 이런 담은 무너져야 한다.
『교회의 바벨론 유수』에서는 성례전 문제를 다룬다. 루터는 세례와 성찬만 인정한다. 참회는 세례에 속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당시와 지금의 가톨릭은 7개의 성례전을 주장한다. ‘바벨론 유수’는 기원전 587년에 있었던 예루살렘 함락 이후 왕족과 귀족들과 지도급 인사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을 가리킨다. 이처럼 로마가톨릭교회의 7가지 성례전으로 인해서 참된 신앙이 포로로 잡힌 것과 같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루터는 “기독교인은 (내면적인 믿음에서)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외면적인 행위에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다.”는 사실을 피력했다. 이것은 칭의 안에서만 가능하다. 여기서 자유롭다는 것은 방종이나 낭만적인 심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실질적인 삶의 투쟁을 포함한다. 루터가 교황의 교권과 목숨을 걸고 투쟁할 수 있었던 힘이 거기에 있다.
목사님 첫줄에 오타 같습니다~
"바르트"가 아니라, "루터"아닌가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