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8일 무엇을 밝히 본다는 것

조회 수 1736 추천 수 10 2008.03.27 21:17:26
2008년 3월28일 무엇을 밝히 본다는 것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며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막 8:25)

예수님은 시각을 조금씩 되찾고 있는 이 장애인의 눈에 다시 안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장면도 개안수술 후에 일어나는 시력회복 과정과 비슷합니다. 실제로 시력이 회복되었다고 하더라도 망막에 들어온 어떤 사물을 확실하게 인식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을 인식하는 인간의 몸은 그렇게 절대적인 게, 또는 순수 객관적인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은 아무리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고, 보고 싶은 것은 실제로는 없어도 보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본문의 시각장애인이 시나브로 세상을 알아볼 수 있었다는 건 아주 자연스런 현상입니다.
이 사람이 모든 것을 밝히 보았다고 하지만, 궁극적인 차원에서는 그가 보는 것도 역시 완전한 실체는 아닙니다.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이나 날아가는 새를 보기는 했겠지만, 그것이 과연 사람이며 새인지는 그렇게 정확한 게 아닙니다. 시간을 조금만 뒤로 돌리면 그 사람은 어머니 배속에 태아로 존재합니다. 조금 더 돌아가면 어머니의 난자와 아버지의 정자에서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의 흔적으로만 존재합니다. 그 뒤는 긴 말이 필요 없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 모든 것의 궁극적 실체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성서는 그 때를 세상의 마지막이라고 합니다. 그 마지막에 실체가 드러난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군요. 그러나 걱정하지 마세요. 그 마지막은 곧 시작이랍니다. 새로운 세계(에온)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절대타자이듯이 그 세상도 지금과는 질적으로 다른 생명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경험하는 무상하고 잠정적인 생명이 아니라 참된, 그래서 영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생명 말입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밝히 보는 것’을 유보해야 합니다. 인내심이 필요하겠군요. 그러나 그 때는 곧 옵니다.

[레벨:29]무위

2008.03.28 11:43:29

목사님, '타인의 삶'이라는 독일 영화를 아시나요?
혹시 못 보셨다면, 한 번 보셨으면 합니다.
이 영화를 보고 목사님의 설교가 많이 떠올랐거든요.

[레벨:8]Himalaya

2008.03.28 21:08:55

목사님,
오랫만에 다비아에 글을 쓰게 됩니다.
오늘은 QT라는 주제에 대해 저의 생각도 말씀드리고 질문도 좀 드리고 싶어서요.

나이들어 늦게 20대 중반에 신앙생활을 한 저는
매일 아침에 QT를 가짐으로 하루를 시작했고
그 시간이 저의 신앙과 성경연구, 나아가 신학적 사고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저는 작년까지 '매일성경'이라는 QT 안내서를 정기적으로 구입해서
아침에 그날 주어진 본문을 읽고 묵상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중간에 자주 땡땡이를 쳤지만.)
저도 그런적이 많았고, 다른 많은 분들이 QT를 오해하고 있듯이
'하나님을 알아 나가려는 노력' 보다는 '그날 그날의 유익'을 찾는데 치중하는 위험이 있더군요.
마치 '그날의 신탁'을 찾는 시간으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의 20년을 넘게 QT를 가지면서
여러가지 경로로 신앙의 전체적인 문제에 대해 배우면서
QT를 갖는 자세도 달라지고 성경을 대하는 자세도 달라지게 되는 것 같더군요.
저는 이 시간을 통해서
이 본문이 말씀하시는 객관적이고 궁극적인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말씀이 오늘 저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를 묵상해 보려고 노력합니다.
'내가 이 말씀 듣는다는 것이 오늘의 나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하는 질문을 가지고...
말씀을 통해 저의 생각을 바꾸게 되는 경우가 많았고 나아가 삶의 태도도 많이 바뀌는 것 같더군요.
목사님의 글, 강의를 포함한 많은 신학적 input을 통해 본문을 이해하는 범위가 풍성해 질 수록
QT도 더 풍성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목사님께서 '설교비평'을 하시면서
몇 번 QT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 마다 좀 의아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쓰신 설교비평을 다 읽고 나서
목사님께서 왜 부정적이신가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목사님의 마음을 다 이해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런데 다비아의 홈페이지에 QT란이 있다는 것이 더욱 의아했습니다.
그래서 작년 말 부터 '매일성경'을 덮어두고 이곳의 QT를 따라오고 있습니다.
하루에 한 두 문단을 묵상하는 '매일성경'도 저에게는 아주 유익했지만
하루에 한 절을 묵상하는 다비아QT도 참 좋습니다.

이제, 뭐좀 여쭤보려고 합니다.
목사님께서는 설교비평에서 줄기차게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집중해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저도 그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께서 '맹인 한 사람'을 눈뜨게 하시는 본문에 대한 QT에 대해 여쭤봅니다.
목사님께서는 지난 25일 QT에서 이 본문에 접근하는 두 가지 중요한 지침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이 맹인을 '영적인 맹인'으로 알레고리화 하지 말라는 것이었고
다른 '시각 장애인' 보다는 그를 치유하신 '예수님'에 집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바로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이해가 틀리면 아래의 이야기는 필요없는 것인데...)
저에게는 이렇게 성경을 보는 안목을 열어주시는 가르침이 참 소중하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오늘 (28일) QT에서는 '궁극적 차원'에서 '궁극적인 실체'를 알아보는 차원에서 접근하셨습니다.
온 종일 묵상해야 할 만큼 큰 화두를 던져 주셨습니다.
제가 드리려고 하는 질문은,
오늘의 목사님의 이런 접근을 '알레고리'라고 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목사님께서 25일 날 말씀하신 '시각장애인을 영적인 장애인으로 해석'하는 경우는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영적'이라는 말을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이 나오게 된것 같습니다.
분명히 저에게 '궁극적인 차원'에서 실체를 바라 볼 수 있는 눈이 필요하고
그러나 그것은 종말이 오기 전에는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임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다만 이런 접근이 목사님께서 25일날 말씀하신
'시각 장애를 영적인 장애로 해석'하는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제가 다른 본문을 다루면서도 이런 비슷한 접근을 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고
그럴 때 마다 '이렇게 해도 되는가'하는 의문을 늘 갖고 있었기 때문에
목사님께서도 비슷하게 접근하신게 아닌가 하고 여쭤봅니다.
오늘 QT 그 자체로는 저에게 너무나 도움이 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담겨있는 단락의 QT가 시작되는 25일 QT 부터 모두 모아서
하나의 '설교'로 엮어 본다면 뭐가 앞 뒤가 맞지 않는 듯 해서 질문드립니다.
그리고 이 '궁극적인 문제'가 '마가'가 이 본문에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였는가 하는 의문도 떠오릅니다.

제 질문의 의도가 잘 전달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3.28 23:28:13

무위 님,
그 영화 못 봤습니다.
기회가 되면 한번 봐야겠군요.

히말라야 님,
좋은 걸 지적해주셨습니다.
여기세 큐티라는 제목을 붙인 이유는요,
특별한 건 없습니다.
내가 평소에 큐티를 비판한 건
성서묵상 장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지나친 적용 중심이었습니다.
그건 이미 히말아야 님이 아시는 거구요.
또 <성구묵상>이라는 제목으로 바꾸고 싶은데,
제가 그걸 바꿀 줄 몰라서 그냥 두었어요.
이길용 박사 님의 손을 빌려야 하는데,
그것도 깜빡 잊어버려서요.

알레고리의 위험성을 제시한 사람이
다시 그쪽으로 간 거 아니냐, 하고 말씀하셨군요.
그렇게 읽혔다면 그런지도 모르겠군요.
이 문제는 아마 전문적인 성서학자가 판단해야 할 문제같네요.
그냥 내 입장에서 한 마디만 하면, 이렇습니다.
알레고리는 텍스트의 역사적 자리를 전혀 상관없이
어떤 영적인 의미만을 위해서 아전인수로 해석하는 거에요.
제가 맹인의 눈뜸을 참된 '봄'의 문제로 풀어낸 것은
이 텍스트의 역사적 자리와 상관이 있습니다.
예수와 맹인의 관계가 여기서 핵심이거든요.

그래도 예수님이 주체로 해석되어야 할 이 문단에서
맹인의 '몸'에 대해서 거론한 것은 결국 중심으로부터의 이탈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게 조금 미묘한 데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이 묵상 방법이 거의 한 구절을 집중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경우에 따라서 전체 문단의 주제와 밀착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걸 늘 염두에 두고 있는데,
이런 방식이 갖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인 것 같습니다.
다른 하나는 비록 맹인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예수와의 관계라는 그 긴장을 잃지 않았다는 겁니다.
물론 그걸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걸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아마 이 묵상을 읽는 분들도 그걸 어느 정도는 눈치채고 있을 거고,
히말라야 님도 역시 그걸 전제하고 계실 겁니다.

어쨌거나 22-26절 전체로 볼 때
앞뒤의 논리가 뒤틀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히말라야 님의 지적은 옳습니다.
고맙습니다.

[레벨:8]Himalaya

2008.03.29 00:12:58

목사님,
감사합니다.
질문에서 언급했듯이
제가 신학이 많이 부족해서 '알레고리'라는 해석 방법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저도 가끔씩 설교를 할 기회가 있는데,
어떤 단락을 선택해서 한 절 한 절을 풀어나가다가 보면
어떤 부분에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주제가 나타나면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 본문에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로 그 내용은 아닌 곳으로
흐르는 경우가 자주 있게 되더군요.
듣는 분들은 '그 본문이 그런 내용까지 담고 있는 줄은 몰랐다'며 '은혜 받았다'고들 하시지만
제가 본문을 잘 못 다룬거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설교를 '가끔' 하다 보니 그런 일이 생기는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직까지 본문의 의도를 깊이 파고 들어갈 실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목사님께서 자주 강조하시듯이
'이 본문을 쓴 저자가 원래 던진 질문이 무었이엇으며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자 했는가'를
끊임없이 되뇌이며 성경을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목사님께서는 이런 경우에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배우고 싶어서 질문드렸습니다.

그리고 'QT'라는 제목에 대해서는
저는 그대로 두셨으면 좋겠다 생각합니다.
목사님께서 QT가 잘못 흘러갈 수 있는 위험성을 염두에 두고 '비평'을 하신 것이지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그 본문의 의도에 맞추어 삶을 살아나가야려는 노력 자체를
비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 'QT' 코너에서 알게 되었고
대부분의 QT 안내서가 채택하고 있는 '문단'을 중심으로 한 방법 뿐만이 아니라
이렇게 한 절, 한 절 묵상할 수도 있구나 하고 배우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매일성경'을 따라가면 5년에 성경 전체를 한번 마치게 되는데,
요즘에는 이것도 늦다고 '속독'을 통한 일주간에 한 번 '통독'하는 것을 강조하는 분들도 있으니
목사님께서 좋은 발란스를 맞춰주신다 생각하거든요.
이렇게 천천히 묵상하는 것, 저는 아주 좋습니다.
아마 사람마다 자라가는 과정에서 이런 저런 방식을 취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목사님께서 스스로 성경을 묵상하는 내용을 나누어 주심으로써
'아,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하고 배우는 바가 크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레벨:2]운몽

2008.03.29 10:43:41

저는 지금까지 많은 부흥회를 경험한 부흥회세대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흥회때 많은 강사께서 힘주어 외친 주제가 '그날이 곧 옵니다.'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기억으로는 그러한 말씀을 들을 때에 무서움으로 다가 왔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글을 읽다가 보니 맨 마지막에 쓰신 '그때는 곧 옵니다.' 라는 문장이 기대감으로 다가오는군요. 참 이상합니다.
*그냥 제생각인데요. 마지막 문장인 -그때까지 우리는 ‘밝히 보는 것’을 유보해야 합니다.- 라는 표현보다- 밝히 본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란 표현이 목사님의 평상시의 주장을 더 잘 나타내 주는 표현이 아닐까 합니다.
(죄송^ㅣ^)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3.29 23:39:26

운몽 님은 언어 감각이 아주 예민하시군요.
동의 합니다.
밝히 본다고 생각하는 것을!
좋은 주일을 맞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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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8-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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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10일 주는 그리스도시다(8)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29) 저주 받은 운명이 구원의 길로 인식된 이 맥락에 바로 기독교의 정체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걸 놓치면 기독교의 본질을 잃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신앙을 계승하고 있는 교회에서도 이걸 잃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십자가가 축복의 비법쯤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 흔합니다. 예수 믿고 범사에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기복적인 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승리의 길로 생각합니다...

4월9일 주는 그리스도시다(7) [2]

  • 2008-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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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9일 주는 그리스도시다(7)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29)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아는 게 여기서 중요합니다. 십자가 처형은 로마의 사형법입니다. 십자가 처형 장소는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로마 제국이 통치하던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죄수들은 십자형의 나무틀을 지고 목에는 죄목의 명패를 단 채 그곳으로 끌려가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키케로(Cicero)는 라비리우스(Rabirius)를 위한 연설에서...

4월8일 주는 그리스도시다(6) [2]

  • 2008-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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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8일 주는 그리스도시다(6)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29)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의 증거는 우선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에 의하면 위의 주장은 당연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가 당할 십자가의 죽음을 뜯어 말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

4월7일 주는 그리스도시다(5)

  • 2008-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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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7일 주는 그리스도시다(5)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29) 어제에 이어서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어떤 분들은 “뜻은 무슨 뜻, 그것은 그대로 명백한 사실 아니냐?” 하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게 자꾸 따져 묻지 말고 소박하게 믿으면 충분하지 않느냐, 하고 말입니다. 옳습니다. 그것을 분명한 사실로 믿는 것만으로 우리는 기독교인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의 실질적인 의미를 가능한대로 깊이 아는 것은 우...

4월6일 주는 그리스도시다(4)

  • 2008-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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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6일 주는 그리스도시다(4)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29)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공관복음서에 따라서 제 각각 다르다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공통되는 부분은 ‘그리스도’입니다. 공관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의 대답이 원형에 가깝겠지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첨부한 마태복음은 아마 베드로의 권위가 막강했던 공동체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진술하는 누가복음의 노선은 마태...

4월5일 주는 그리스도시다(3) [1]

  • 2008-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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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5일 주는 그리스도시다(3)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29)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는 고백으로 제자 집단 중에서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약간 확장된 신앙고백을 제시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참고적으로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눅 9:20)라고 전합니다. 이 신앙고백의 중심은 똑같지만 그 표현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어제 묵상의 마지막 대목에서 짚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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