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3일 주는 그리스도시다(1)

조회 수 2205 추천 수 19 2008.04.02 22:55:17
2008년 4월3일 주는 그리스도시다(1)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2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접어두고,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며칠 전 이 단락을 시작하면서 저는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는 누군가, 하는 질문이 현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우리의 후손들에게 여전히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라고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각을 묻습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라 바로 제자들의 생각이, 더 나아가서 바로 나의 생각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늘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신앙을 확인해야 합니다. 사도신경은 “I believe”로 시작합니다. 주어가 바로 ‘나’입니다. 주기도문은 ‘우리’가 주어로 구성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기도는 제자들이 함께 드리는 공동의 기도문이지만, 사도신경은 말 그대로 신앙을 고백하는 선언문이래서 그렇게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관심이 있는 분들은 개인적으로라도 조금 더 자세하게 주석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믿는다는 것은 내가 신앙적으로 주체가 된다는 뜻입니다. 이런 주체적인 신앙의 세계로 들어가는 게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닙니다. 스스로 신앙적으로(신학적으로) 사유하지 않으면 결코 주체적인 신앙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건 단순히 기독교 신앙의 깊이로 들어가는 게 신학적으로 까다롭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대면이 힘들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일단 단독자로 서야하는데, 사람들은 그것 자체를 두려워합니다. 혼자 죽어야 하듯이 지금 여기서 우리는 혼자 살아야 하는데, 즉 혼자서 생명 사건에 직면해야하는데, 그런 상황으로 들어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용기를 갖고 그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각자, 혼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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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달팽이

2008.04.03 20:58:46

*목사님 오타 수정바랍니다.
"스스로 신앙적으로(신학적으로) 산유하지 않으며"-- "산유"가 "사유"가 아닌지요?

늘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란 말이죠?
저는 요즘 어떻게 하루의 삶을 살아낼것인가 대한 깊은 생각을 해 봅니다.
때론 삶의 무게가운데 버거워 하지만, 그러나 그리스도안에 있는 평화와 기쁨이 늘 마음한가운데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습니다.
오늘도 주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힘과 용기를 가지고 하루를 시작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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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4.03 09:38:26

달팽이 님,
오타 지적 감사, 수정했어요.
내일 손님들을 맞이하겠군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레벨:3]가온

2008.04.13 19:21:27

제자들의 생각을 묻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주님이 과연 생각을 묻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은 생각일지라도 너희들은 나를 어떻게 아느냐는 것이지 어찌 그들의 생각을 물은 말씀이었겠습니까? 진정한 앎(야다)은 생각이 아니라 경험이요 일치요 그 위에서 터져 나오는 고백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 생각 너머에 계셔서 우리 생각으로는 다가설 수 없는 그런 분이 아니지 않습니까? 주체적 신앙, 단독자로서의 신앙이란 자기 생각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닙니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나와 관계를 맺는 지점은 과연 내 생각이 아닙니다. 나의 생각은 결코 주체적 신앙으로 가는 길이 못됩니다. 나의 생각은 주체적 신앙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작은 연못일 뿐 결코 머물러 살 곳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 주체적 신앙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고 내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깨친 사람이 가진 믿음입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 생각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삽니다. -- 생각과 믿음이 구별되지 않은 것 같아... 감히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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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4.13 20:24:44

가온 님,
안녕하세요.
짚어 주신 대목은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요,
위의 묵상은 인간 사유와 믿음의 관계가 아니라
기독론에 대한 진술이랍니다.
사유와 믿음의 관계는 또 다른 주제에 속하는 거 잖아요.
그건 그렇고,
생각과 믿음이 그렇게 이원론적으로 구분되는 것일까요?
믿음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로부터 이야기를 해야겠군요.
제가 믿음 만능주의를 경계하는데요.
믿음이라는 현상은 사이비 이단들에게서도 흔하게 나타나거든요.
그런 믿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알고 믿는 믿음을 말씀하시는 거지요?
그렇답니다.
바르게 아는 게 중요하지요.
거기서 사유가 필요하지요.
바르게 생각하는 사람은 당연히 바르게 믿겠지요.
내가 보기에 바르게 생각하는 것과
바르게 믿는 것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깊이로 들어가는 사람에게 필요한
동일한 영적 현실입니다.
주의 은총이.

[레벨:3]가온

2008.04.17 20:36:38

물론 생각과 믿음을 이원론으로 치부 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둘은 비교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문제 삼는 생각이란 깨지지 굳은 생각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그 뿌리가 육체에 속하는 육적 사고를 말합니다. 이렇게 깨지지 않은 생각이 믿음으로 가는 장애지, 영에서 오는 창조적 생각은 알차고 참된 사유이지요. 이런 창조적 생각은 육적 생각이 끝날 때 찾아오는 하나님의 선물일 것입니다. 결국 믿는 것과 아는 것, 혹은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어야 함은 틀림 없는 사실이라 믿습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바르다"는 것도 아는 것과 믿는 것의 일치가 아닐까 합니다. (짧은 제 생각에 그렇다는 건데 혹 아니라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믿음 만능주의란 말씀이 조금 위협적으로 들립니다. "주의"란 표현을 그렇게 함부로(!^*^!) 사용하는 것에 우리는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언어는 사고를 제한하고 규정짓고 상대를 위협하는 태도라고 느껴집니다. 그럼에도 목사님의 성심을 다한 댓글에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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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4.17 21:31:07

가온 님,
재미 있는 말씀을 하셨군요.
'육적인 사고'가 무엇인가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사유와
육적인 사고가 무슨 관계가 있는 건지요?
궁금해서요.
믿음 만능주의에서 '주의'가 위협적으로 들리셨어요?
그렇다면 내 글쓰기가 서툴러서 그런 거겠지요.
좋은 충고, 감사합니다.

[레벨:3]가온

2008.04.18 03:23:15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생각,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생각, 거짓을 합리화하기 위한 생각, 자신은 언제나 옳다고 착각, 죄를 감추기 위한 더러운 계산,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말한 속사람이 원하는 하나님의 법이 아닌 악을 향하는 마음, 육체의 생각은 현저하니 곧 음란과..... 이런 것이 아닐까요? 이런 육적 생각이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데 장애물이란 겁니다. 그런데 목사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으신 것을 통해 제자들이 고민하고 답을 해야하는 그 마음의 상태(?)를 "예수님을 알아가는 사유"로 이미 전제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사유가 필요한 것을 부인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또 그 물음에 대한 답이 사유의 과정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주님의 물음의 의도는 제자들의 생각을 묻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각의 끝에 도달한 그 무엇, 생각을 벗어던진 그 무엇을 보게 하려는 물음일 것이라는 것이 저의 부족한 소견입니다. 그리고 기독론을 말씀하고자 하시는 그런 의도까지 간파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제 생각에 물음의 의도가 그런 것(내가 생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글을 올린 것입니다. 아직 모르는 것이 많은 사람이라 글이 서투르고 주관이 강하게 드러날 때가 많습니다.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주시고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잘 배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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