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4일 주는 그리스도시다(2)

조회 수 1699 추천 수 13 2008.04.03 23:13:06
2008년 4월4일 주는 그리스도시다(2)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29)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여기서 ‘주’는 당신,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 대답에 기독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헬라어 번역이라는 점에서 똑같은 의미이기는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차이가 있습니다. 메시아는 유대의 정치적 차원의 구원을 강조한다면 그리스도는 유대를 넘어서는 보편적 구원을 강조합니다. 이 그리스도 개념은 부활과 연관된 기독교의 고유한 구원자 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원래 보통명사였지만 이제 기독교 신앙에 의해서 예수님과 일치하는, 즉 예수님의 운명을 가리키는 고유명사로 새롭게 자리매김 된 것입니다.  
어쨌든지 베드로는 지금 제자들을 대표해서 초기 기독교의 가장 핵심적인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이 고백은 앞서 전달된 사람들의 대답과 전혀 차원을 달리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 요한, 엘리야,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았지만 베드로는 그런 예언자를 넘어서는 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인간에게 부여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인 예언자와 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뜻입니다.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해 봅시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베드로는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런 질문은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무엇을 근거로 그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입니까? 이게 그렇게 간단한 질문이 아닙니다. 베드로만 해도 그렇습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한 뒤에 그는 예수님에게 책망을 받습니다. “사탄아!” 하는 말씀까지 듣습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책망을 듣기 전에 칭찬을 받기는 합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고 이렇게 불쑥 내뱉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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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0일 주는 그리스도시다(8) [10]

  • 2008-04-09
  • 조회 수 2156

2008년 4월10일 주는 그리스도시다(8)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29) 저주 받은 운명이 구원의 길로 인식된 이 맥락에 바로 기독교의 정체성이 담겨 있습니다. 이걸 놓치면 기독교의 본질을 잃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신앙을 계승하고 있는 교회에서도 이걸 잃는 경우가 제법 있습니다. 십자가가 축복의 비법쯤으로 받아들여지는 일이 흔합니다. 예수 믿고 범사에 모든 것이 잘 된다는 기복적인 신앙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승리의 길로 생각합니다...

4월9일 주는 그리스도시다(7) [2]

  • 2008-04-08
  • 조회 수 1468

2008년 4월9일 주는 그리스도시다(7)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29)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고대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를 아는 게 여기서 중요합니다. 십자가 처형은 로마의 사형법입니다. 십자가 처형 장소는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로마 제국이 통치하던 여러 곳에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죄수들은 십자형의 나무틀을 지고 목에는 죄목의 명패를 단 채 그곳으로 끌려가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키케로(Cicero)는 라비리우스(Rabirius)를 위한 연설에서...

4월8일 주는 그리스도시다(6) [2]

  • 2008-04-07
  • 조회 수 1558

2008년 4월8일 주는 그리스도시다(6)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29)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의 증거는 우선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라고 말해도 될까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았다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에 의하면 위의 주장은 당연하지만,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구절들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가 당할 십자가의 죽음을 뜯어 말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

4월7일 주는 그리스도시다(5)

  • 2008-04-06
  • 조회 수 1391

2008년 4월7일 주는 그리스도시다(5)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29) 어제에 이어서 다시 묻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어떤 분들은 “뜻은 무슨 뜻, 그것은 그대로 명백한 사실 아니냐?” 하고 생각할 겁니다. 그렇게 자꾸 따져 묻지 말고 소박하게 믿으면 충분하지 않느냐, 하고 말입니다. 옳습니다. 그것을 분명한 사실로 믿는 것만으로 우리는 기독교인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의 실질적인 의미를 가능한대로 깊이 아는 것은 우...

4월6일 주는 그리스도시다(4)

  • 2008-04-05
  • 조회 수 1850

2008년 4월6일 주는 그리스도시다(4)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29)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공관복음서에 따라서 제 각각 다르다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공통되는 부분은 ‘그리스도’입니다. 공관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의 대답이 원형에 가깝겠지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을 첨부한 마태복음은 아마 베드로의 권위가 막강했던 공동체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진술하는 누가복음의 노선은 마태...

4월5일 주는 그리스도시다(3) [1]

  • 2008-04-04
  • 조회 수 1527

2008년 4월5일 주는 그리스도시다(3)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29)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는 고백으로 제자 집단 중에서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은 약간 확장된 신앙고백을 제시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참고적으로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눅 9:20)라고 전합니다. 이 신앙고백의 중심은 똑같지만 그 표현 방식은 서로 다릅니다. 어제 묵상의 마지막 대목에서 짚었...

4월4일 주는 그리스도시다(2)

  • 2008-04-03
  • 조회 수 1699

2008년 4월4일 주는 그리스도시다(2)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29)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여기서 ‘주’는 당신,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이 대답에 기독교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헬라어 번역이라는 점에서 똑같은 의미이기는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차이가 있습니다. 메시아는 유대의 정치적 차원의 구원을 강조한다면 그리스도는 유대를 넘어서는 보편적 구원...

4월3일 주는 그리스도시다(1) [7]

  • 2008-04-02
  • 조회 수 2203

2008년 4월3일 주는 그리스도시다(1)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막 8:29)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묻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생각은 접어두고,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말입니다. 며칠 전 이 단락을 시작하면서 저는 초기 기독교에서 예수는 누군가, 하는 질문이 현안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우리의 후손들에게 여전히 가장 본질적인 질문이라고 말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제자들의 생각을 묻습니다. 그게 중요합니다. 세상...

4월2일 예언자 전통에서 [1]

  • 2008-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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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2일 예언자 전통에서 제자들이 여짜와 이르되 세례 요한이라 하고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막 8:28) 위의 구절에서 보듯이 제자들의 대답에 열거된 인물들은 한결같이 예언자들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언자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과 예수님을 일치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복음서가 일관되게 설명하듯이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의 뒤를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후계자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거꾸로 요한은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한 사람입니다. 그...

4월1일 도상의 물음(2)

  • 2008-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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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1일 도상의 물음(2)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막 8:27) 제가 기억하기로, 마틴 하이덱거는 철학을 가리켜 “사유를 향한 길”(Weg zum Denken)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길은 일종의 메타포입니다. 철학은 어떤 실증적인 대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의미한다는 뜻이겠지요. 저는 이런 철학의 본질이 신학, 또는 신앙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논리적 진술인 신학은 영적인 길입니다. 길은 멈춤이...

3월31일 도상의 물음(1) [1]

  • 2008-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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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31일 도상의 물음(1)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막 8:27) 위 구절에 등장하는 지명은 가이사랴입니다. 가이사랴로 불리는 지명은 두 군데입니다. 사도행전에 자주 등장하는 가이사랴는 갈릴리 호수에서 서남쪽 지중해에 붙어 있는 해안도시입니다. 이곳에는 유대 지역을 식민 통치하는 로마군이 주둔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이사랴라고 한다면 바로 이곳을 가리킵니다. 반면에 위 구절에서 빌립보 가이사랴로 일컬어진 그곳은 갈...

3월30일 예수는 누군가?

  • 2008-03-29
  • 조회 수 1565

2008년 3월30일 예수는 누군가? 예수와 제자들이 빌립보 가이사랴 여러 마을로 나가실새 길에서 제자들에게 물어 이르시되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막 8:27) 이제 위 구절부터 새로운 단락이 시작합니다. 이 단락은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는 누군가?” 신약성서에서 이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더 중요한 질문은 없습니다. 신약성서는 오직 이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는 누군가, 하는 질문은 교회 안과 밖, 양쪽에서 제기됩니다. 교회 안에 들어온 신자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누구...

3월29일 집과 마을 [2]

  • 2008-03-28
  • 조회 수 1479

2008년 3월29일 집과 마을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이르시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 하시니라. (막 8:26) 장애를 치유 받은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이르십니다. 집으로 가라, 그러나 마을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의 집이 마을 밖에 있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이런 진술에는 마가복음의 고유한 신학이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 사람의 치유를 가장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은 물론 가족입니다. 이 사람이 집으로 먼저 가야한다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집은 개인적인, 비...

3월28일 무엇을 밝히 본다는 것 [6]

  • 2008-03-27
  • 조회 수 1746

2008년 3월28일 무엇을 밝히 본다는 것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며 그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모든 것을 밝히 보는지라. (막 8:25) 예수님은 시각을 조금씩 되찾고 있는 이 장애인의 눈에 다시 안수를 베풀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은 모든 것을 밝히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장면도 개안수술 후에 일어나는 시력회복 과정과 비슷합니다. 실제로 시력이 회복되었다고 하더라도 망막에 들어온 어떤 사물을 확실하게 인식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을 인식하는 인간의 몸은 그렇게 절대적인 게, 또는 순수 객관적인 게 아니기 ...

3월27일 무엇을 본다는 것 [2]

  • 2008-03-26
  • 조회 수 1555

2008년 3월27일 무엇을 본다는 것 쳐다보며 이르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가는 것을 보나이다 하거늘(막 8:24) 무엇이 보이는가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이 맹인은 두 가지로 대답합니다. 사람들이 보인다는 것과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개안수술 후에 붕대를 풀면 그 환자의 망막에 무언가가 잡히기 시작하는 것처럼 이 맹인의 망막에도 무언가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아직은 흐릿하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본다는 사건 안으로 들어간 것이죠. 이 세상을 보지 못하는 상태가 무엇인지 잘 생각...

3월26일 치유자 예수 [1]

  • 2008-03-25
  • 조회 수 1421

2008년 3월26일 치유자 예수 예수께서 맹인의 손을 붙잡으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막 8:23) 어제 저는 8장의 맹인 치료 전승과 7장의 언어장애인 치료 전승이 닮은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증거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인 막 8:23절이 7:33절과 거의 똑같다는 겁니다. 3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따로 데리고 무리를 떠나사 손가락을 그이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며” 두 구절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당사...

3월25일 맹인 한 사람

  • 2008-03-25
  • 조회 수 1792

2008년 3월25일 맹인 한 사람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맹인 한 사람을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을 대시기를 구하거늘. (막 8:22) 시각장애인 치유를 다루는 오늘 본문 막 8:22절 이하는 언어장애 치료 이야기인 막 7:32절 이하와 전체적으로 아주 닮았습니다. 다른 점은 단지 각각 시각장애와 언어장애라는 것뿐입니다. 장애치유에 관한 여러 전승 중에서 마가가 나름의 신학적 의도에 따라서 이 두 전승을 선택해서 이 자리에 배치한 것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 이후에 이런 이야기는 알레고리로 해석되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시각장애인...

3월24일 질문(3)

  • 2008-03-23
  • 조회 수 1550

2008년 3월24일 질문(3) 이르시되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막 8:21)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이건 질문이라기보다는 절망이나 탄식에 가깝습니다. 이런 탄식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보십시오. 바리새인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실제로 먹는 떡을 걱정하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구체적으로 지난날 일어났던 사건을 기억나게 해주셨습니다. 오천 명과 사천 명, 그리고 열두 바구니와 일곱 광주리까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무언...

3월23일 질문(2) [2]

  • 2008-03-22
  • 조회 수 1299

2008년 3월23일 질문(2)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명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일곱이니이다. (막 8:20) 어제의 묵상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은 19절과 똑같은 질문을 20절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던졌고, 제자들도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진리를 깨닫게 하는 데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질문하는 겁니다. 진리의 중심에 들어간 사람만이 본질에 적중하는 질문을 던질 수 있고, 최소한 그렇게 들어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질문이라는 사태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질문이 거의 없다는...

3월22일 질문(1) [5]

  • 2008-03-21
  • 조회 수 1679

2008년 3월22일 질문(1)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이르되 열둘이니이다. (막 8:19) 예수님은 18절에서 제자들을 향해서 왜 기억하지 못하는가,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것은 물론 6장과 8장에서 보도된 군중 급식에 관한 두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제 예수님은 그걸 구체적으로 거론하십니다. 오늘 본문 19절에서는 6장의 내용을, 다음 20절에서는 8장의 내용을 질문하셨습니다. 그 질문에 제자들은 각각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고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였고, 사천 명을 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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