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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12월11일 집으로 모인 무리

  • 2006-12-11
  • 조회 수 1464

2006년 12월11일 집으로 모인 무리 집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막 3:20) 3장19절은 세 문장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집에 들어갔다. 무리들이 다시 모여들었다. 식사할 겨를도 없었다. 이 집은 물론 가버나움에 있는 어떤 사람의 집입니다. 베드로의 집일 수도 있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떤 제자의 집일 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집에 들어가신 이유는 식사와 휴식이었겠지요.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밖에서의 일이 끝나면 당연히 집에 들어가실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문...

12월10일 열두 제자 (11)

  • 2006-12-10
  • 조회 수 1671

2006년 12월10일 열두 제자 (11)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막 3:19) 열두 제자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가룟 유다입니다. 개역 성서는 유다의 별칭을 ‘가룟’이라고 부르고, 공동번역은 가리옷이라고 하고, 루터 번역은 이스카리오트라고 합니다. 그닐카의 설명에 따르면 앞에서 언급된 가나안은 열광주의자라는 뜻이고, 이스카리오트는 시카리(무법자, 칼잽이)라는 뜻, 또는 “거짓말쟁이”라는 의미로 새길 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스카리오트는 유다가 배신적인 행위를 한 다음에 교회 공동체로부터 얻은 별칭이라고 ...

12월9일 열두 제자 (10)

  • 2006-12-09
  • 조회 수 1804

2006년 12월9일 열두 제자 (10)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안인 시몬이며.(막 3:18) 앞에서 세 명의 제자가 거명됐고, 17절에는 8명이 거명됩니다.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야고보(2), 다대오, 시몬(2)이 그들입니다. 여기서 안드레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이고, 빌립은 그들과 같은 동네 출신이며(요 1:44), 야고보(2)는 알패오의 아들이며, 시몬(2)은 시몬 베드로와 동명이인입니다. 그런데 알패오의 아들이 야고보(2)라는 진술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은 레...

12월8일 열두 제자 (9) [2]

  • 2006-12-08
  • 조회 수 1532

2006년 12월8일 열두 제자 (9)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막 3:16) 병행구인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베드로에 이어서 그의 동생인 안드레를 거명하는데 반해 마가복음은 베드로 뒤로 야고보와 요한을 거명합니다. 예수님은 이들 형제에게 “우레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새길 수 있는 보아너게라는 이름을 덧붙이셨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서 이들 세 명,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 본명 이외의 이름을 받은 셈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들 세 명에게만 특별...

12월7일 열두 제자 (8)

  • 2006-12-07
  • 조회 수 1571

2006년 12월7일 열두 제자 (8)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막 3:16) 열두 제자 중에서 제일 처음으로 거명된 사람은 역시 시몬 베드로입니다. 원래의 이름은 시몬인데, 예수님이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라는 이름을 보태주었습니다. 마태복음의 전승에 따르면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하는 시몬의 신앙고백이 있을 후에 예수님이 그에게 이런 이름을 주셨다고 합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마 16:18)는 예수님의 말씀은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12월6일 열두 제자 (7)

  • 2006-12-06
  • 조회 수 1290

2006년 12월6일 열두 제자 (7)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막 3:15) 어제 설명한 전도와 축귀 능력은 일단 구별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똑같습니다. 이 양자 모두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로 변증되어야 하고, 동시에 축귀의 능력으로 증명되어야 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오직 한 가지 사실, 즉 가까이 임박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그 능력에 사로잡히신 분이었습니다. 복음서의 비유는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주제로 한 것입니다. 네 종...

12월5일 열두 제자 (6)

  • 2006-12-05
  • 조회 수 1596

2006년 12월5일 열두 제자 (6)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막 3:15)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준 두 번째 사명은 “귀신을 내쫓는 권능”이었습니다. 첫 번째 사명인 전도와 두 번째인 축귀의 권능은 약간 성격이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라면, 축귀는 악한 영을 내쫓는 능력입니다. 전자는 그야말로 사명이고, 후자는 권한일지 모릅니다. 전자는 언어의 세계이고, 후자는 능력의 세계입니다. 전자를 논리라고 한다면, 후자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

12월4일 열두 제자 (5)

  • 2006-12-04
  • 조회 수 1717

2006년 12월4일 열두 제자 (5)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 3:14) 예수님이 제자들을 밖으로 내보낼 때 맡긴 구체적인 사명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전도”입니다. 우리말 성서에 “전도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케뤼소”는 proclaim, make known, preach이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what is preached, message, proclamation이라는 뜻의 “케뤼그마”와 이웃지간이기도합니다. 이렇게 볼 때 전도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임했다고 하는 사실을 전하는 ...

12월3일 열두 제자 (4) [2]

  • 2006-12-03
  • 조회 수 1481

2006년 12월3일 열두 제자 (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 3:14) 어제 저는 예수님과 존재론적으로 함께 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그렇게 먼데 있지 않습니다. 존재를 우리가 외면하면서 살아가는데 매우 익숙해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이 우리의 일상과 온 우주에 가득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별로 감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이미 여기에” 우리가 무엇을 하기도 전에 그 은총이 존재하고 있다...

12월2일 열두 제자 (3) [1]

  • 2006-12-02
  • 조회 수 1396

2006년 12월2일 열두 제자 (3)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 3:14) 열두 제자에게 부여된 사명은 우선 예수님 곁에 머무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라는 마가의 표현은 어떤 뜻이 담겨 있을까요? 저자가 별 생각 없이 한 말일 수도 있겠지요. 본문의 맥락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큐티의 차원에서 이 진술의 의미를 한번 짚어보는 것도 괜찮을 듯합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 산다는 사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

12월1일 열두 제자 (2) [1]

  • 2006-12-01
  • 조회 수 1781

2006년 12월1일 열두 제자 (2)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막 3:14)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하필이면 열두 명일까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유대인들에게 12라는 숫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들은 열두 지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이 열두 지파는 야곱의 열두 아들들에게 뿌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전승에 따라서 열두 지파의 분류가 약간씩 다릅니다. 거기에는 레위 지파와 요셉 지파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원래대로 한다면 레위와 요셉이 당연히 열두 지파에 ...

11월30일 열두 제자 (1)

  • 2006-11-30
  • 조회 수 1819

2006년 11월30일 열두 제자 (1)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막 3:13) 막 3:13-19절은 열두 제자를 부르고, 사명을 주신 사건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들이 바로 열두 사도인지 아닌지는 그렇게 정확하지 않습니다. 열두 제자, 또는 열두 사도에 대한 내용도 복음서에 따라서 약간씩 차이가 납니다. 그런 건 조금 복잡하고, 현재 우리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접어두기로 하지요. 우선 예수님이 왜 제자들을 부르셨는지 잠시 생각해보시죠. 이 문제와 연관해서 우리는 세 가지 가능성을 내다볼 수 있습니...

11월29일 자기 은폐

  • 2006-11-29
  • 조회 수 1456

2006년 11월29일 자기 은폐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막 3:12) 예수님은 귀신들의 외침을 듣고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셨습니다. 누구에게 경고한 걸까요? 귀신처럼 행동하고 있는 병자들인가요, 제자들인가요? 아니면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인가요? 어쨌거나 예수님은 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말라고 경고하신 걸까요? 큐티는 신학적인 문제로 들어가기보다는 우리의 삶에 교훈되는 것을 찾는 공부인데, 저는 습관적으로 신학적인 쪽으로 끌고 갑니다. 못된 버릇이네요....

11월28일 더러운 귀신 (3)

  • 2006-11-28
  • 조회 수 1404

2006년 11월28일 더러운 귀신 (3)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막 3:11)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귀신들의 진술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런 구절을 만나면 저도 매우 당혹스럽습니다. 일단 이 장면을 냉정하게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나와서 갈릴리 호숫가로 물러나셨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곳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대개 병자였습니다. 예수님의 몸이라도 만지려고 밀려드는 그들을 예수님은 피하려고 하셨습니다....

11월27일 더러운 귀신 (2) [1]

  • 2006-11-27
  • 조회 수 1960

2006년 11월27일 더러운 귀신 (2)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막 3:11) 간혹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목사님은 귀신의 실체를 믿습니까?” 이런 질문은 의미가 없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전이해가 필요합니다. 만약 귀신을 악한 기운이라고 말한다면 귀신의 작용은 분명한 현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런 작용을 명백하게 목도하고 있으니까요. 제가 일일이 그걸 여기서 설명하지 않아도 대충 알만한 분들은 알고 있겠지요. 한 가지만 예를 든다면...

11월26일 더러운 귀신 (1) [3]

  • 2006-11-26
  • 조회 수 1494

2006년 11월26일 더러운 귀신 (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막 3:11) 오늘 본문보도에 따르면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님을 보고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으면서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앞에서 등장한 병자들과 귀신의 활동은 긴밀히 연관됩니다. 성서시대 사람들은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 온갖 질병의 원인을 귀신의 활동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귀신을 실체로 이해했다는 걸 크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이런 문제를 그들의 ...

11월25일 병자 (5)

  • 2006-11-25
  • 조회 수 1332

2006년 11월25일 병자 (5)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막 3:10)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예수님이 많은 사람을 고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몰려왔다고 합니다. 복음서 기자는 예수님에게서 몸과 마음의 치유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말하는 중입니다. 재미삼아 이런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병든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당연히 그곳에는 병이 없겠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병이 없다면 건강이 실감이 날까요? 아파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건강...

11월24일 병자 (4) [3]

  • 2006-11-24
  • 조회 수 1720

2006년 11월24일 병자 (4)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막 3:10) 어제 저는 한미 FTA 체결로 인한 미국 의료시스템에 대해서 한 마디 했습니다. 미국의 의료보험이 다원화되어 있다는 사실과 그래서 빈곤층이 의료 사각지대라는 정도는 알고 있지만 자세한 건 잘 모릅니다. 제가 독일에 잠시 있었기 때문에 그쪽 이야기를 조금 하겠습니다. 복지에 관한한 미국보다는 유럽 나라들이 훨씬 잘 발달되어 있습니다. 스웨덴 같은 북유럽 국가들은 세계 모든 나라가 부러워하는 ...

11월23일 병자 (3)

  • 2006-11-23
  • 조회 수 1619

2006년 11월23일 병자 (3)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막 3:10) 병 치료는 거룩한 구원행위입니다. 이런 점에서 의사도 역시 목사요 사제입니다. 그들은 모두 인간의 생명에 자기 실존을 건 사람들입니다. 목회와 의료행위는 생명의 문제와 직결된다는 점에서 경제논리를 뛰어넘어야 합니다. 생명이 거룩하다면 그 생명을 다루는 사람들의 행위도 역시 거룩하니까요. <기독교사상> 11월호 포지인물로 장기려(1911-1995) 박사가 소개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의 슈바이처, 살...

11월22일 병자 (2)

  • 2006-11-22
  • 조회 수 1359

2006년 11월22일 병자 (2)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막 3:10)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지려고 몰려왔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예수님의 몸에 손을 대기만 해도 혹시 병이 치료되지 않겠나 하는 다급한 심정이 있었겠지요.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처럼 병은, 특별히 지병이나 불치병은 사람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습니다. 제가 현풍에서 목회할 때 50대 후반쯤 되는 가장이 폐암에 걸린 가족이 있었습니다. 그 부인과 자녀들만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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