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6일- 바리새인 (1)

조회 수 1677 추천 수 17 2006.09.06 23:15:37
2006년 9월6일 바리새인 (1)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6)

아래의 글은 요아킴 그닐카의 <마가복음 주석>(국제성서주석 39,1)에서 각주를 빼고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전문적인 신약학자의 눈을 통해서 신약성서가 형성되던 시기의 정황을 조금 맛볼 수 있을 겁니다.

바리사이파는 예수의 시대에 (사두가이파와 에쎄네파와 함께) 중요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녔던 종교적인 당파를 이루었다. 이 운동의 발단은 약간 모호하다. 일반적으로 종교단체로서 바리사이파의 성립은 BC 2세기로 소급되며, 하씨딤의 옛 집단에서 갈라져 나왔다고 생각되었다. 바리사이파는 하스몬 왕가에 대해서는 거의 언제나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으나 장로회의(Gerusia)에의 가입을 허용했던 살로메 알렉산드라(BC 76-67)는 예외적인 중요한 인물이다. 그들은 헤로데 대왕의 총애를 받아 중요한 사람들이 되었다. 헤로데가 죽고 유다 국가체제가 몰락하는 동안에 바리사이파의 중요성은 감소되었던 것 같다. 이것은 바리사이파 내부의 통일되지 못한 견해들이 새로운 당파인 첼롯파의 형성을 촉진시켰던 것과도 관련이 있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파멸 이후에야 비로소 바리사이파 사람들, 또는 그들 가운데 반(反)첼롯당적인 분파가 유다교에서, 종교적인 통일체로서의 유다 민족집단을 율법에 엄격히 결속시킴으로써 보존하고 구해냈던, 지도적이면서 유일하게 권위 있는 집단이 된다. 페루심(Peruschim: 분리된 자들)에서 유래한 “바리사이파”란 이름은 아마 외부에서 그들에게 주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처음에는 경멸적인 말이었던 것 같다. 전차로 이 말은 긍정적인 의미를 얻게 된다. 어쨌든지 이 이름은 이 운동단체의 일부만을 나타낸다. 외적으로 관찰하면 바리사이파는 일정한 규약에 따라 사는 잘 조직된 공동체로 보인다. 개개인은 일정한 시험 기간을 거친 후에야 이 공동체에 받아들여졌다. 공동체에는 다양한 단계의 구성원들이 있었으며 제명조치도 가능했다. 사제들이나 지식인들만이 아니라 주구나 구성원이 될 수 있다. 바리사이파 운동의 강점은 초기에는 그렇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운동이 평신도들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끊임없이 매력을 발산하는 폐쇄적인 집단으로 평범한 사람을 받아들였다는 데 있었다. 성서와 마찬가지로 지혜문학에서도 정통한 사람들이 지도적인 계층을 이루었는데 이들이 공동체적 삶을 규정하였고 바리사이파 내부에 다양한 학파를 세웠으며 바리사이파 공동체 외부에까지 민중에 대해 점증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이들이 예수 시대에 예루살렘의 산헤드린에서 독자적인 당파를 이루었던 율법학자들이다. 물론 바리사이파가 아닌 율법학자들도 있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산헤드린에서 바리사이파의 영향력을 평가하기는 어렵다. 바리사이파 안에서 나란히 존속할 수 있었던 상이한 견해들에 대하여 잘 알려진 예는 서로 경쟁하고 있던 두 학파의 거두인 힐렐(Hillel)과 샴마이(Schammai)가 있다. 그러나 주후 70년 이후에는 힐렐 학파가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바리사이파적 이념의 중심에는 고유한 평가를 받는 율법이 있다. 사제들을 위한 거룩한 규정들을 일상생활로 적용시키는 일이 여기서 추진된다. 이런 노력의 목표는 성전에서 봉직하는 사제에게 고유한 정결과 거룩성을 일상적인 삶 속에서 획득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순수한 공동체, 즉 이스라엘 중에 참 이스라엘을 제시하려 한다. 사제적인 생활양식을 지향하는 이러한 평신도의 경건생활은 율법을 제의보다 앞세우며 예언자들을 율법에 종속시켰는데, 성소(聖所)를 상실한 이후의 삶을 위해 형성되었다. 율법학자들의 말을 특히 즐겨들 수 있었던, 그리고 순수한 하느님 말씀의 봉사가 수행되었던 회당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이런 발전이 강화되었다. 모세의 율법이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했던 창조의 도구로 이해될 수 있다면 이것은 지혜문학적 사변에 의존한 것이다. 직접 모세에게 소급되며 토라와 동등한 것으로 간주된 선조들의 구전 전승이 율법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서게 되었다.
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었던 전통에 힘입어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의 교훈을 변화된 시대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었다. 이 사실은 그들이 진보적인 신학자라는 사실을 입증했으며, 민중들의 공감을 얻으려고 했으나 사두가이파와 에세네파의 예리한 비판을 받게 하였다. 사두가이파와 에세네파는 바리사이파를 변절자들로 간주했으며, 태만하고 오류에 빠졌으며 (민중을) 오도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하였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그들이 율법의 울타리라고 불렀던 해석의 규정들에 의해 율법을 엄수하려고 하였으며 율법규례들을 현저히 증가시킴으로써 종교적인 삶을 많은 영역들에 확대시키려 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자부심은 그들의 업적과 의로움에 대한 비범한 자부심과 신적인 자비에 대한 갈망이라는 두 가지 감정에 의해 유지되었다. 이 같은 분열된 의식은 민중에 대한 관계에 반영된다. 한편으로 바리사이파는 평신도 운동으로서 민중에게 나아갔으며 민중들의 공감을 얻었으나, 반면에 민중을 율법에 무지한 자들도 경멸하였으며 비천한 민중(암-하-아레츠)을 모멸하였다. 그들의 분리는 이중적이다. 즉 외적으로는 독자적인 집단으로서 민중과 분리되고, 내적으로는 이미 언급된 거룩 사상을 철저화함으로써 분리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그들과 민중 사이에 넘을 수 없는 벽이 세워진다.
바리사이파의 윤리는 의로운 사람들과 악인들이 엄격히 그들의 행위에 따라 보상받거나 처벌되는 엄격한 응보사상에 의해 지배된다. 예컨대 그들의 윤리에는 인식일 계명의 해석에서도 동정적이고 인간적인 특징이 없지 않다. 그들의 메시야 기대는 이스라엘을 정치적 예속으로부터 해방시킬 메시야에게 향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의 멸망 이후에야 비로소 묵시문학적 자료를 받아들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 시대에 그들은 임박한 기대에 대하여는 회의적이었던 것 같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예수와, 후에는 그의 공동체에 대해 가장 예리한 적대자들이 된 것은 (비록 그들이 이들과 많은 경우에 결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비극임에 틀림없다. 복음서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묘사는 대체로 후대에 있었던 그들과 그리스도교적 공동체와의 대결에 일치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거의 언제나 폐쇄적이고 적대적인 집단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마르코는 몇 구절들에서 좀 달리 서술하고 있다.(2:16,7:1) 누가복음 7:36절과 11:37절, 14:1절에 의하면 예수는 그들과 식탁교제를 나누기도 했다. 가장 오래된 수난전승 층에서는 그들이 언급되지 않는다. 물론 산헤드린의 율법학자들 사이에 그들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가 여기서 문제가 될 것이다. 부활절 이후의 교회 공동체에서, 그리고 특히 70년 이후에 고조된 그들과의 투쟁이 이미 예수의 활동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을 향한 예수의 요구도 거룩함에 대한 그들의 의식에 도전하는 것이었다. 비천한 민중과 예수가 가진 교제도 그들에게는 하나의 도전이었다. 바리사이파적인 율법해석과 그들의 의로움에 대한 자만을 예수가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써 그들은 예수의 심각한 적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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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1일 혼인집에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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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21일 혼인집에서 (1)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막 2:19) 마가복음 기자는 사람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예상 외로 길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질문과 관련된 상황은 18절 한 절에 불과한데 답변은 19-22절에 이르고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이렇게 길게 답변하셨는지 우리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고유한 말씀과 그 당시의 격언과 초기 공동체의 해석이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9월20일 어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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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20일 어찌하여?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막 2:18) 오늘 본문은 요한과 바리새인을 한 묶음으로 놓고 예수님을 거기에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앞의 사람들은 금식을 중요한 종교행위로 삼고 있는데 반해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라고 말하지만 예수님까지 포함해야겠지요. 출가 직후 40일 동안의 광야생활을 제외하고 예...

9월19일 세례요한과 바리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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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19일 세례요한과 바리새인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막 2:18) 오늘 본문의 문장은 약간 부정확합니다. 앞부분에서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다고 했는데, 뒷부분에서는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금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이 금식한다는 말인가요, 아니면 바리새인의 제자들이 금식한다는 말인가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요한은...

9월18일 죄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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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18일 죄인 (3)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7) 제가 보기에 죄와 연관해서 그리스도인의 의식은 분열증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입으로는 “죄인입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의인입니다.” 하니까요. 그러나 이런 분열증적인 현상을 실감하는 분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그런 심리작용은 아주 은밀해서 자기 자신도 눈치 채기 힘들 정도니까요. 누가복음 18:9-14...

9월17일 죄인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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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17일 죄인 (2)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6) 죄인은 죄를 지은 사람일까요? 아니면 죄에 대한 인식이 강한 사람일까요?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기가 힘든 이유는 죄의 정의가 간단하지 않다는 데에 놓여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으로는 실정법을 위반한 행위가 죄이며, 또는 한 사회의 전통과 관습을 어긴 행위도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실정법 자체가 절대적...

9월16일 죄인 (1)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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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16일 죄인 (1)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6)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죄인은 어떤 사람을 의미할까요? 본문의 배경을 전제한다면 세리, 창녀, 이방인처럼 유대교 율법에서 부정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겠지요. 이 죄인의 목록에 실제로 살인자, 강도, 성폭력범, 유아 납치범들이 포함되는지 단정하기는 어렵네요. 물론 근본적으로는 그런...

9월15일 의인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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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15일 의인 (3)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6) 어제 저는 “의인은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노파심으로 다시 말씀드린다면, 의로움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게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들의 의를 부정하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의 불행이라는 것은 의가 자기 능력, 소유, 업적으로 나타나는 사태를 가리킵니다. 의는 옳...

9월14일 의인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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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14일 의인 (2)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6) 우리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앞서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미가 쓸데없다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특별한 해석이 없어도 그 뜻이 우리에게 그대로 들어옵니다. 우리도 평소에 아파야만 병원이나 의사를 생각합니다. 의인은 의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 건강한 사람처럼 하나님...

9월13일 의인 (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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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13일 의인 (1)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막 2:16) 왜 죄인들과 어울려 다니느냐는 서기관의 불만을 듣고 주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야말로 촌철살인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듯이 의인에게는 예수가 필요 없다는 말보다 더 정확하게 인간의 내면을, 그리고 예수의 정체성을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습니다. 그런데 사실 의인(義人)은 구약성서의 중심 사상입...

9월11일- 바리새인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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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11일 바리새인 (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6) 바리새인 서기관에게서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그의 진보성입니다. 바리새인이 과연 진보적인 사람들인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사두개인들처럼 로마의 체제 안에 안주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그들이 진보적이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진보적이었던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님과 대립...

9월10일- 바리새인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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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10일 바리새인 (5)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6) 지식인이 신비를 못 본다는 어제의 말은 그렇게 기계적인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모든 지식인들이 아니라 지식이라는 외피에 눈을 가린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자기의 업적이 큰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통치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건 아주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이는 흡사 티브이를 크게 틀어놓는 집에서는 사는 사람들은 가을바람소리, 귀뚜...

9월9일- 바리새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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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9일 바리새인 (4)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6) 저는 어제 지식인의 한 전형인 바리새인 서기관의 문제가 진리보다는 정보에 치우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죄인들과 밥을 먹는 그 행위 안에 담긴 생명보다는 자기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율법을 기준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지식인의 한계를 다른 각도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려고 합니다. 자신의 지식에 사로잡...

9월8일- 바리새인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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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8일 바리새인 (3)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6)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서기관은 대표적인 지식인입니다. 서기관은 유대교 율법을 연구하고, 수많은 불문율법을 해석하거나 구약성서의 사본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이 사람은 보수적인 사두개파가 아니라 진보적인 바리새파라고 합니다. 진보 지식인! 멋있는 말이군요. 그가 바로 나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지식인은 지적인 능력이 뛰...

9월7일- 바리새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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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7일 바리새인 (2)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6) 우리는 어제 ‘바리새인’에 관한 요아킴 그닐카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 설명의 핵심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 어느 한 순간에 만들어진 조직이 아니라 상당히 점진적인 변화의 과정을 거쳤다는 것입니다. 그 안에 서로 다른 신학적 경향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바울은 산헤드린에서 심문을 받을 때 부활 신앙으로 ...

9월6일- 바리새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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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6일 바리새인 (1)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6) 아래의 글은 요아킴 그닐카의 <마가복음 주석>(국제성서주석 39,1)에서 각주를 빼고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우리는 전문적인 신약학자의 눈을 통해서 신약성서가 형성되던 시기의 정황을 조금 맛볼 수 있을 겁니다. 바리사이파는 예수의 시대에 (사두가이파와 에쎄네파와 함께) 중요한 정치적 영향력을 지녔던 종교적인 당파를 이루었다. 이 운동의 발단...

9월5일- 세리와 죄인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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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5일 세리와 죄인들 (3)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막 2:15) 요즘 설교비평을 하면서 가장 곤혹스러운 순간이 여러모로 괜찮은 목사들의 설교에서 복음과 신앙의 본질을 발견하기 힘들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기복적이지도 않고 감정에 치우지지도 않은, 매우 건전한 신앙을 설교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런 모든 가르침들이 그리스도교의 근본을 드러내기보다는 단지 모범적인 신앙만을 해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9월4일 세리와 죄인들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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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4일 세리와 죄인들 (2)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막 2:15) 예수님 주변에 세리와 죄인들이 늘 함께 했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그들을 모범생으로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오늘 우리는 복음과 설교의 근본이 무엇인지에 대한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설교는 청중들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통치에 마음을 열라는 초청이지 그들을 쓸 만한 인간으로 개조하려는 훈계가 아닙니다. 초청과 훈계는 근본적으로 다...

9월2일- 세리와 죄인들 (1) [4]

  • 2006-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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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9월2일 세리와 죄인들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막 2:15) 본문에 세리와 죄인이 병렬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세리와 죄인이 별 다를 게 없다는 뜻이겠지요. 신약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본문에 나오는 세리들은 국경을 통과하는 상품에 대해 부과되었던 변칙적인 세금을 징수하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조세는 로마 황제의 국고로 들어가지만 관세는 지방 군주의 금고로, 즉 갈릴리의 분봉왕인 헤로데 안...

9월1일- 잡수시는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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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 수 1627

2006년 9월1일 잡수시는 예수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막 2:15) 본문에 따르면 예수님은 세리 레위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성서기자는 예수님이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셨다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언급합니다. 그 당시는 오늘과 달리 먹을거리가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불어서 무엇을 먹는다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겁니다. 특히 오늘 본문 뒤로 이어지는 일련의 상황을 보면 먹는 문제는 나사렛 예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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