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일지 12월1일 대림절 1주

조회 수 1213 추천 수 0 2019.12.01 19:44:24

대구 샘터교회 주간일지

2019121, 대림절 1

 

1) 칼과 창- 오늘 설교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가 오래, 그리고 깊이 간직해야 할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람이 더는 싸우지 않고 전쟁 연습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때를 사람이 만들어낼 수 없고 하나님이 실행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이제 세상에서 평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평화 연습을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이루실 평화의 나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칼과 보습, 창과 낫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는 대림절 절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2) 국악 찬송- 오늘 국악 찬송이 예배 참석자들에게 낯설었나 봅니다. 우리 교회 신자들의 찬송가 부르기 실력이 뛰어나다는 말을 평소에 들었는데, 오늘 국악 찬송은 어설프게 불렀습니다. 알리는 시간에 다시 한번 연습했습니다. 오는 주일에도 이 찬송가를 부르겠습니다. 잘 기억하고 있다가 산만하지 않게, 은혜롭게 잘 불러봅시다.

 

3) 대림절- 몇 번이나 언급했지만 한 번 더 설명하겠습니다. 교회력은 대림절부터 시작합니다. 성탄절 전 4주간이 대림절입니다. 올해 대림절은 121일입니다. 어떤 해에는 11월 마지막 주일이 여기에 해당하기도 합니다. 대림절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과 현재의 임재(파루시아)를 의미합니다. 초림은 과거를 가리키고, 재림은 미래를 지향한다면, 임재는 현재의 생명 경험을 의미합니다. 이 세 차원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예수로 인해서 이미 세상에는 하나님의 구원이 발생했으며, 예수로 인해서 미래에 하나님의 구원의 완성될 것이며, 예수로 인해서 현재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상에 놓은 대림절 장식을 보셨는지요. 오늘은 촛불이 한 개만 켜졌고, 차례대로 4개까지 켜질 겁니다. 어둠을 밝히는 빛입니다. 대림절 장식을 준비해주신 분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12월 한 달, 대림절의 희망과 성탄절의 기쁨이 교우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4) 1세기 후반- 오늘 2시부터 <초기 기독교의 형성> 10장을 공부했습니다. 10장은 예루살렘 성전이 붕괴한 기원후 70년부터 100년 사이에 주류 기독교가 어떤 선교 정책을 펼쳤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룹니다. 흥미진진한 내용이었습니다. 그 시기의 기독교에는 이미 십여 년 전에 중요한 세 명의 지도자가, 즉 바울과 베드로와 야고보가 죽었기 때문에 구심점이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나름으로 최선을 다해서 유대교를 기독교의 복음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런 시도의 흔적을 저자 트로크메는 야고보서와 마태복음을 근거로 설명했습니다. 그 시도는 결국 실패했습니다. 유대교 바리새파의 개혁 운동은 활성화한 반면에 기독교의 복음 운동은 소수파로 전락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하면 기독교는 역사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11장에 나옵니다. 내년 1월 첫째 주일은 교인총회가 열리기에 시간 관계상 내년 2월부터 다시 시작해야겠습니다.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미리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오늘 10장은 내용이 길지 않아서 한 시간만 하고 끝냈습니다. 시간을 반으로 줄이니 모두 호응이 좋네요. 앞으로도 한 시간만 공부하겠습니다. 정확하게 60!

 

5) 빵과 포도주- 성찬 예식이 있는 주일마다 저는 예배에서 받는 느낌이 색다릅니다. 성찬상 위에 놓인 빵과 포도주를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몸과 피로 믿고 받았습니다. 즉 생명의 궁극적인 현실로 받은 겁니다. 기독교 성찬식의 깊은 의미를 알고 경험하려면 빵과 포도주라는 사물의 심연을 뚫어볼 줄 알고, 또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 능력을 실제로 깨달아야 합니다. 가장 소박한 먹을거리인 빵과 포도주에 담긴 우주론적인 깊이를 안다면,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로 인한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을 경험한다면 그는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영혼의 자유와 안식을 실제로 누릴 것입니다.

 

6) 교회 간판- 요즘 교회 밴드에서는 교회 간판 디자인에 관해서 여러 의견이 오가는 듯이 보입니다. 제 핸드폰으로는 밴드에 접근이 안 되지만 대략 어떤 이야기가 오가는지는 간접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교회가 시작한 지 16년 반이 지나는 시점에 처음으로 간판을 달게 되었군요. , 초창기 2년 정도는 예배 처소로 사용하던 아파트 출입문 옆에 작은 목제 간판을 걸어두기는 했습니다. 교우들의 의견을 잘 모아서 좋은 결과물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7) 카페- 오늘 오후에는 대구에 비가 제법 내렸습니다. 교회에 간 오전에도 뜨문뜨문 빗방울이 떨어지긴 했는데, 예배 마치고 보니 제법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습니다. 신학책 강독까지 마치고 나왔을 때는 여름비처럼 본격적으로 비가 쏟아지더군요. 카페에서 내다보는 비 내리는 겨울 풍경이 낭만적이었습니다. 오늘도 예배 후에 카페에 여러 그룹이 모여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중앙의 라운드 테이블은 청년들이 차지했습니다. 마당을 향한 유리창 옆자리에는 비슷한 나이 또래의 여자 교우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나이입니다. 카운터 쪽으로 탁자 몇 개를 늘어놓고 앉은 팀도 있었습니다. 어느 교우의 다음과 같은 멘트가 인상 깊네요. “아무래도 우리가 이 카페, 접수해야겠습니다.”

 

8) 2020 예배 위원 외- 이제 2019년이 끝나는 12월에 들어섰으니 내년 2020년 새로운 예배 위원을 결정해야 합니다. 기꺼이 맡아주신 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사회자: 류동규(1,2), 박정연(3,4,5), 성경봉독자: 방성수(1), 권정숙(2), 신광혜(3), 정지은(청년 몫, 4), 5주는 돌아가면서 맡습니다. 사정에 따라서 순서를 바꿀 수 있습니다. 참고로 내년부터는 예배 때 목사와 예배 위원 모두 가운을 입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운영위원으로는 현재 청년회 몫으로 한 명이 결정되었고, 다른 한 명은 미정입니다. 인사 문제는 전체적으로 잘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9) 예배 참석인원: 90, 헌금: 2,88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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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일지 12월15일 대림절 3주 file [7]

  • 2019-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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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샘터교회 주간일지 2019년 12월15일, 대림절 3주 1) 찾으라- 지난 주일(12월5일) 설교 마지막 문장은 “찾는 자는 찾게 될 것입니다.”입니다. 이게 진리의 속성입니다. 저는 요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씀에 꽂혀있습니다. 예수가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분명히 지금 여기서 그 하나님 나라를 찾을 수 있겠지요. 그게 무언지 조금씩 눈에 안개가 걷히듯이 저의 눈에 들어오고 있긴 합니다. 훗날 좀더 확연해지면 설명해보겠습니다. 2) 성경봉독- 이번 주일의 제1독서는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이사야 35:1-10절...

예수 어록(215) 요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 2019-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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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록(215) 요 10: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보다 먼저 온 자는 절도며 강도라는 요한복음 기자의 진술은 오해받을 수 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선지자들을 다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간 사람들이다. 그들을 통해서 유대 민중들은 하나님 말씀을 전해 들을 수 있었으며, 그들의 신앙 전통이 살아있었기에 예수도 역사에 등장할 수 있었다. 그들을 절도라고 말한 이유는 그들이 실제로 절도이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를 통한 생명 경험이 절대적이...

예수 어록(214) 요 10:7 나는 양의 문이라.

  • 2019-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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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록(214) 요 10: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예수는 ‘양의 문’이다. 양은 저 문을 통해서 생명을 얻는다. 양치기도 문으로 들어와야 한다. 울타리를 넘는 자는 양치기가 아니라 도적이다. 양의 문이라는 표현은 요 14:6절의 표현과 같은 의미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가 곧 구원의 문이라는 뜻이다. 이런 요한복음의 고백이 나의 신앙고백으로 좀 더 굳건하게 자리를 잡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예수 어록(213) 요 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 2019-12-11
  • 조회 수 1109

예수 어록(213) 요 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여기서 타인은 바리새파 지도자들이다. 1세기 마지막 30년 어간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전 붕괴로 지리멸렬에 떨어졌을지 모를 유대교가 바리새인들의 개혁 운동으로 상당한 성과를 내던 시기였다. 그 운동의 본거지는 예루살렘에서 그리 멀지 않은 얌니야다. 그곳에 랍비 학교가 세워졌다. 역설적으로 그들의 성공적인 바리새파 운동으로 인해서 기독교 세력은 위축되었다. 요한복음 기자는 그런 상황...

예수 어록(212) 요 10:4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

  • 2019-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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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록(212) 요 10: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 본문의 묘사가 한편의 동화처럼 전개된다. 양치기는 양의 문을 열고 앞서 풀밭과 시냇가로 걸어간다. 그 양치기는 노래를 부르거나 피리, 또는 휘파람을 불었을 것이다. 하늘은 푸르고 구름은 멋진 모양을 그리는 중이다. 새도 날고 나비와 벌이 양치기 주변을 오갔을지 모른다. 어디선가 꽃향기가 날아온다. 양은 양치기의 음성을 알기에 뒤를 따른다. 양치기와 양은 말 그대로 혼연일체가 되어 삶을 풍성하게 누린다. 예수를...

주간일지 12월8일 대림절 2주 file [2]

  • 2019-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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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샘터교회 주간일지 2019년 12월8일, 대림절 2주 1) 불 심판- 목사가 자신의 설교에 은혜를 받는다는 게 이상해 보이지만, 저는 가끔 그런 일을 경험합니다. 오늘(12월8일)이 그런 날입니다. 알곡은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는 말씀이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이 말하는 심판은 복음입니다. 우리에게 더 할 나위 없는 복된 소식입니다. 심판을 복음으로 들을 수 있다니, 얼마나 은혜로운 설교입니까. 더군다나 우리를 심판할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

예수 어록(211) 요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 2019-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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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록(211) 요 10:3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양은 우리에서 보호받는다. 그 양의 우리는 하나님이다. 양치기는 양을 위해서 문을 여닫는다. 아침에 문을 열고 초장과 물가로 인도하고 저녁에 다시 문을 열어 양을 우리에 넣고 문을 닫는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알기에 목자가 하라는 대로 하고, 목자도 자기 양을 알기에 최선의 방식으로 양을 지킨다. 예수만이 양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는 양치기처럼 우리의 생명을 지키는 자라는 뜻...

예수 어록(210) 요 10: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 2019-12-06
  • 조회 수 1050

예수 어록(210) 요 10:2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목자는 문으로 들어간다. 예수만이 양과 목자를 연결하는 통로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라면 예수를 근거로 삼아야 한다. 어떤 이가 참된 목자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예수와의 관계를 확인해야 한다. 예수와 관계없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자는 양의 목자가 아니라 도적이다. 원래 목자는 하나님이지만 이 구절에서는 목자를 예수라고 볼 수도 있긴 하다. 11절에서는 예수가 선한 목자로 나온다. 어쨌든지 예수만이 양의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 존재라...

예수 어록(209) 요 10:1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 2019-12-05
  • 조회 수 1152

10장 예수 어록(209) 요 10:1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10장 1절부터 21절까지 다시 긴 연설이 시작한다. 주제는 양과 목자의 관계다. 유대인들의 가장 중요한 하나님 표상에는 목자 상이 있다. 구약성경 곳곳에 나온다. 대표적으로 시편 23편이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고대 유대인들의 삶이 늘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돈독하기만 하면 모든 삶의 조건이 풍족하게 느껴졌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불...

예수 어록(208) 요 9:41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 2019-12-04
  • 조회 수 1464

예수 어록(208) 요 9:41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예수의 말을 듣던 바리새인들이 40절에서 자신들도 시각장애인에 속하느냐고 예수에게 반문한다. 기분이 나빠서 그렇게 반문하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궁금해서 질문하는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두 가지 가능성이 다 있다. 예수의 대답은 정곡을 찌른다. 당신들이 본다고 하니 오히려 죄가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대답이 약간 특이하다. 시각장애인이냐, 하고 물었는데, 죄가 없다거나 있다고 대답한다. 이 대답은 이 ...

예수 어록(207) 요 9:39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2]

  • 2019-12-03
  • 조회 수 1479

예수 어록(207) 요 9:39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제자들은 예수를 인자로 인식하고 믿었다. 인자 외에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거나 그리스도라는 표현도 있다. 인자는 묵시문학에서 온 개념으로, 세상 마지막 때 심판할 자를 가리킨다. 제자들은 무슨 근거로 예수를 마지막 때에 올 심판자라고 믿었나? 어떤 이들은 예수를 옥황상제 비슷한 존재로 여긴다. 예수를 믿는 자는 살기 쾌적한 천국으로 보내고, 믿지 않는 자는 유황불에 던진다는 식이다. 이런 ...

예수 어록(206) 요 9:37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 2019-12-02
  • 조회 수 921

예수 어록(206) 요 9:37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전에 시각장애인이었던 이 사람은 인자가 누군지 알려달라고 했다. 예수가 그에게 한 대답이 바로 요 9:37절이다. 문장이 일반적이지는 않다. 일반적인 문장이라면 단순히 “내가 바로 인자다.”라거나 “아니다.”라고 하면 된다. 예수는 우회적으로 대답한다. 이런 표현이 당시 아람어나 그리스어 문장의 문학적인 특징인지는 모르겠지만 깔끔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이와 비슷한 방식의 대화가 요 18:28절 이하에도 나온다. 예수가 로마 총독 빌라도 법...

주간일지 12월1일 대림절 1주

  • 2019-12-01
  • 조회 수 1213

대구 샘터교회 주간일지 2019년 12월1일, 대림절 1주 1) 칼과 창- 오늘 설교 본문을 기록한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가 오래, 그리고 깊이 간직해야 할 메시지를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람이 더는 싸우지 않고 전쟁 연습도 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때를 사람이 만들어낼 수 없고 하나님이 실행하십니다. 이 말씀을 믿는 사람들은 이제 세상에서 평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평화 연습을 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이루실 평화의 나...

예수 어록(205) 요 9:35 네가 인자를 믿느냐.

  • 2019-11-30
  • 조회 수 1234

예수 어록(205) 요 9:35 네가 인자를 믿느냐. 9:8-34에는 예수의 어록이 일절 등장하지 않는다. 공관복음과 달리 예수의 긴 어록 중심으로 전개되는 요한복음에 잘 나타나지 않는 대목이다. 눈이 밝아진 이 사람과 이런 일이 일어난 날이 하필 안식일이었다는 이유로 시비를 거는 바리새인들과 이 사람의 부모 사이에 벌어진 논쟁이다. 이 대목에서 요한복음이 기록된 당시에 예수 공동체가 처한 상황이 어땠는지를 암시하는 두 구절이 눈에 띈다. 하나는 22절이다. 바리새인들의 닦달을 받은 부모가 아들에게 대답을 미룰 수밖에 ...

예수 어록(204) 요 9:7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 2019-11-29
  • 조회 수 971

예수 어록(204) 요 9:7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예수는 시각장애인에게 이상하게 보이는 의식을 집행한다. 흙을 침으로 이겨서 그 사람의 눈에 바른다. 이런 장면은 복음서에 드물다. 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처럼 예수도 침과 흙이 치유 효과를 낸다고 생각했기에 이런 퍼포먼스를 실행한 것인지, 아니면 이 사람에게 플라시보 효과를 내려 했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예수의 평소 모습으로만 본다면 그의 눈에 손을 얹고 하나님을 향해서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드렸어야만 한다. 예수는 이 사람에게 실로암 못에 가...

예수 어록(203) 요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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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록(203) 요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예수는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다. 이런 말을 우리는 입에 달고 살지만 이게 실제로 무슨 뜻인지는 별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구호로만 우리에게 승하고 신앙의 능력으로는 쇠하기 때문이다. 와 닿지 않는데 어쩌랴. 평소 신앙생활의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을 허투루 대했다는 증거가 바로 이것이다. 도대체 예수는 왜 세상의 빛인가? 그가 빛이라면 우리는 왜 여전히 어두움에 들어간 사람처럼 사는가? 이런 질문은 우리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한 앞으...

예수 어록(202) 요 9:4 때가 아직 낮이매

  • 20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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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록(202) 요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아직은 ‘낮’이다. 아직은 우리가 숨 쉬고 먹고 배설하고 두 발로 걷고 커피 향과 맛을 즐기고 예배를 드리며,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아직은 낮이기 때문이다. 곧 ‘밤’이 온다. 밤이 오면 일할 수 없다. 숨을 쉬지 못하고 먹지도 배설하지도 못하며, 두 발로 걷지 못하고, 사랑할 수도 없다. 지금 우리는 몇 시의 인생을 사는가. 오전을 사는 사람도 있고, 오후를 사는 사람도 있고, 지금 글을 쓰...

예수 어록(201) 요 9:3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 2019-11-26
  • 조회 수 1412

9장 예수 어록(201) 요 9:3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9장부터 새로운 단락이 시작한다. 예수와 함께 길을 가다가 시각장애인을 만난 제자들이 예수에게 누구의 죄로 인해서 이 사람이 장애인이 되었냐고 물었다. 오지랖이 넓은 제자들이다. 재난은 죄의 결과라는 주장이 고대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욥의 친구들도 욥에게 죄를 회개하라고 다그쳤다. 욥은 친구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신에게는 그런 재앙을 받을 만큼의 죄가 없다고...

주간일지 11월24일 창조절 13주

  • 2019-11-25
  • 조회 수 816

대구 샘터교회 주간일지 2019년 11월 24일, 창조절 13주 1) 흑암- 저는 설교 중에 우리의 실존이 흑암의 권세 아래 놓여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자기를 성취하는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강요입니다. 그 방식으로는 우리 삶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거기에 매달리게 하는 세력이 매우 강력하게 이 세상을 지배합니다. 흑암이 깊어가는 상황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의 인식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아는 게 하나도 없습니다. 작은 사물 하나도 어디서 왔는지 모릅니다. 심지어 시간이 상대적으로 흐르고...

예수 어록(200) 요 8:58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 2019-11-23
  • 조회 수 1346

예수 어록(200) 요 8:58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예수는 유대인들의 비판 앞에서 더 파격적으로 발언한다. 자신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존재했다고 말이다. 유대들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59절에 따르면 그들은 유대 종교 형벌인 돌로 예수를 치려고 했다. 예수는 그 자리를 피했다. 사람이 피할 때는 피하는 게 좋다. 떳떳하다고 맞서다가는 의미 없는 피해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아브라함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말도 신학적인 수사이지 객관적인 사실은 아니다. 이런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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