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일지 8월18일

조회 수 1022 추천 수 0 2019.08.19 22:19:39

대구 샘터교회 주간일지

2019818, 성령강림후 10

 

1) 정의- 설교 제목이 정의입니다. 이런 주제의 설교는 청중들에게 불편하게 들릴 가능성이 큽니다. 교회에 나오는 교인들도 정의롭게 살기가 어렵기도 하고, 나름으로 정의를 추구해도 자기가 정의를 일관되게 추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이유는 이런 주제의 설교가 자칫 교훈이나 선동에 떨어지기 쉽다는 데에 있습니다. 제가 설교 중간에 여러 가지를 이야기했지만, 결론은 기독교의 칭의 사건이 정의로운 삶의 토대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에게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을 때만 우리는 사심 없이 세상의 정의를 위해서 투쟁할 수 있다는 말이 설득력이 있을까요? 오늘 기독교인들의 구체적인 삶에 그 답이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사람이 정의를 추구하는 것은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하는 순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2) 일일 수련회- 일일 수련회가 오늘 개최되어서 성황리(?)에 끝났습니다. 103일에는 야외 친목 모임이 계획되어 있습니다. 이미 예고해드린 대로 아래와 같은 순서로 진행되었습니다. 전체를 교육부장 양*희 집사가 진행하느라 수고가 많았습니다. 순서 처음인 주일 공동예배에 85명이 참석했고, 그 뒤로 조금씩 숫자가 줄더니 마지막 저녁 식사 시간에는 40여 명이 남았습니다. 오랜만에 저녁 식사를 교회에서 하니까 뭔가 기분이 새롭더군요. 전체적으로 오래 기억될만한 좋은 모임이었습니다.

1) 11:00-12:10 주일공동예배

2) 12:20-13:30 식사 친교 및 설거지

3) 13:30-14:30 특강(1) 정용섭 목사 니케아신조 강해

4) 14:30-15:00 함께, 또는 따로 노래 부르기

5) 15:00-16:00 특강(2) 서상규 집사“‘민족개념 분석을 통한 한일관계 고찰

6) 16:00-18:00 단편 영화 보기, “주전장

7) 18:00-19:00 공동 식사, 마무리

 

3) 니케아 신조- 수련회 특강(1)에서 저는 우리 교회가 매월 첫째 주일에 함께 나누는 니케아 신조를 설명했습니다. 니케아 신조는 3256월 니케아에서 열린 세계 최초 에큐메니컬 공회가 결정한 기독교 신조입니다. 니케아는 오늘날 터키의 이즈니크인데, 서쪽으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이스탄불이 있습니다. 당시 이스탄불은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불렸고, 그 이전 그리스 시대에는 비잔티움이라고 불렸습니다. 니케아 공회를 소집한 사람이 로마 황제이자 콘스탄티노플을 세운 콘스탄티누스라는 점에서 볼 때 니케아는 공의회 장소로 적합했습니다. 이 공회에서 가장 큰 이슈는 아다나시우스 주교와 아리우스 주교의 신학논쟁이었습니다. 긴 토론 끝에 예수의 본질이 하나님과 같다는 아다나시우스의 호모우시오스론이 다르다는 아리우스의 헤테로우시오스론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기독교의 가장 핵심 교리인 삼위일체론의 토대가 잡혔다고 보면 됩니다.

 

4) 7080- 수련회 네 번째 순서는 함께 노래 부르기였습니다. *진 집사의 인도로, 반주는 설*숙 집사, 7-8곡의 복음 찬송가를 불렀습니다. 동요도 한 곡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리 교회 예배에서 불리는 찬송가에는 복음 찬송가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모두 멋지게 노래를 불렀습니다. 저는 함께 따라부르면서 예배 시간에도 가끔 이런 찬송가를 도입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최신 CCM은 곤란하고 소위 7080 복음 찬송가는 가능해 보입니다. 예배 순서에 국악 찬송가가 나오니 복음 찬송가와 국악 찬송가를 번갈아 불러도 좋겠지요. 일단 괜찮은 곡이 얼마나 되는지 찾아보겠습니다. 추천할 곡이 있으면 추천해주십시오. 추천하실 때는 악보 파일도 함께 주셔야 합니다.

 

5) 민족- *규 집사의 특강(2) “‘민족개념 분석을 통한 한일관계 고찰은 이번 수련회에서 가장 뜨거운 반응을 부른 순서였습니다. 저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새로운 역사적 사실과 그것에 대한 해석을 배웠습니다. 강의 방법도 진지하면서 동시에 재미있었습니다. 이런 강의는 녹화로 남겨서 유튜브에 올려도 좋았을 텐데요. 시간이 짧아서 모두 아쉬워했고, 다음 기회를 약속받았습니다. 서 집사가 강조한 점은 민족개념에 대한 재정립이었습니다. 그냥 혈통이 같다거나 같은 나라에 살거나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같은 민족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민족을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과 그들에 의해서 이용당하는 사람들은 국적이 같아도 무조건 같은 민족으로서의 동질감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거지요. 공감합니다.

 

6) 주전장- 다큐 영화 주전장을 관람했습니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입니다. 배급사를 통해서 승인을 받아 교회에서 빔프로젝터로 관람했습니다. 들어보니 17천 원으로 계산했다고 합니다. 주제는 요즘 한창 한일관계에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위안부입니다. 저에게도 여러모로 유익한 영화였습니다. 단순히 위안부 문제만이 아니라 국제 정세의 돌아가는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만 화면이 너무 적어서 자막을 읽기가 불편했다는 점과 영화 상영시간이 길었다는 점이 단점이라면 단점이었습니다.

 

7) 뷔페- 수련회 마지막 순서는 저녁 식사입니다. 출장 뷔페를 불렀다고 합니다. 1인당 1만 원짜리입니다. 맛이 괜찮았지요? 마지막 순서가 식사라서 그런지 모두 마음이 훈훈했습니다. 수련회 중간에 장*아 집사가 간식으로 떡을 준비했습니다. 수박은 누가 내셨을까요? 잘 먹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뷔페 식사가 끝나고 밥과 반찬이 진열된 친교 실로 가보니 약간 남은 김치가 저의 눈에 띄었습니다. 지난 한 달간 집에서 김치를 먹지 못한 터라 체면 불고하고 진열대를 정리하던 집사에게 남은 반찬을 조금만 싸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조금씩만 주면 되는데, 제법 많은 양을 싸주셨네요. 다섯 가지 종류입니다. 앞으로 두 주일은 반찬 걱정을 덜었습니다. 우리 집에 배추김치가 없는 이유는 텃밭에서 오이가 나기 시작하면서 제 아내가 오이 김치만 담기 때문입니다. 사각사각, 오이 씹히는 느낌도 좋습니다. 그래도 오늘 배추김치를 보고 욕심이 생긴 겁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고 했는데 ...

 

8) 진보 교회- 오늘 예배에 방문하신 분이 계십니다. 이름은 들었지만 기억나지 않습니다. 식사 친교 시간에 교우들에게 인사를 하셨고, 저의 자리에서 몇몇 교우와 점심을 함께 먹었습니다. 어떻게 우리 교회를 알고 오셨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분 하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진보적인 교회....’를 찾았더니 대구 샘터교회가 나왔다고 합니다. 이전에 어떤 집사는 십일조 없는 교회를 쳐서 우리 교회를 찾아왔습니다. 마 아무개 집사라고 합니다. 대구 샘터교회가 진보적인 교회로 자리를 잡았나 봅니다. 이분은 칠곡에 살고, 영어 교사입니다. 또 재미있는 일은 혼자서 교회를 찾아왔는데, 이곳에서 지인을 만났다는 사실입니다. 그 지인 교사는 신*혜 집사입니다. 어디서 만났냐 물었더니 바보 주막이라고 하네요. 대구 샘터교회에 나와서 옛날 고등학교 동창을 만난 분들도 여럿 계십니다. 세상이 참 좁습니다.

 

9) 예배 참석인원: 85, 헌금: 1,236,000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예수의 믿음 [6]

  • 2013-11-05
  • 조회 수 4756

11월5일(화) 지난 설교 마지막 단락에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믿음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고 말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설교 제목에 따르면 당연히 우리의 믿음이 강조되어야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예수의 믿음이 강조되었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독교인 각자의 믿음은 물론 중요하다. 각 개인의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 믿음이라는 게 간단한 게 아니다. 이 세상적적인 원리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그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 나라(32)- 선교

  • 2010-06-10
  • 조회 수 4747

기독교 선교도 똑같이 권위주의적 전통의 흔적이 제거되어야만 오늘날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다. 기독교의 선교를 광범위하고 맹렬하게 거부하는 현상이 이 사회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 거부는 대부분 과거에 많은 선교사들이 행한 권위주의적 방법 탓이다. 그들은 모범과 논증으로 납득시키는 대신 개종을 강요했다. 대부분의 경우 오늘의 선교적 과제는 에큐메니컬적인 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정한 지역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들은 그 사회에서 인간 존엄의 진보적 모범이 되고, 또 그것에 동의하는 세력이 될 수 있도록 적...

교회에 나가는 이유(2)

  • 2010-06-26
  • 조회 수 4741

교회에 나가는 이유에 대해서 조금 더 솔직하게 생각해봅시다. 사실 솔직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도 쉽지 않소. 사람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이중적인 행동과 판단을 내릴 뿐만 아니라 자기 합리화에도 빠르기 때문이오. 그런 동물은 지구에 사람이 유일하지 싶소. 이런 한계를 안고 있다고 하더라도 솔직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할 필요는 없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나가는 이유를 ‘구원’과 연결시키고 있을 거요. 교회에 나가면 구원받는다고 믿는 거요. 그걸 확신하는 사람도 있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

아브라함의 자식들 [2]

  • 2017-06-20
  • 조회 수 4732

6월20일, 화 아브라함의 자식들 지난 설교 앞 대목에서 재미 삼아 아브라함이 몇 명의 여자에게서 몇 명의 아들을 낳았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얻었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86세(사라는 76세)였고,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얻었을 때는 100세였다. 100세에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 한다는 게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교에서 짚은 것처럼 그 나이는 과장된 게 틀림없다. 세 번째 아내는 그두라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사라가 127세에 죽었다는 사실(창 23:1)을 감안하면 140세 내외였을 것이...

복음 (2), 3월24일 [2]

  • 2006-03-24
  • 조회 수 4714

2006년 3월24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2>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복음(福音,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배경으로 기록된 구약성서에서 볼 때 가장 큰 기쁜 소식은 출애굽과 바벨론포로 귀환입니다. 먹고살기 힘들어 이집트 땅으로 이민 갔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곳에서 소수민족으로 당해야만 했을 고난,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하여 인질로 잡혀갔던 바벨론 제국에서 당해야만 했을 모욕이 그들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지는 긴...

5월14일 회개와 복음 (1) [3]

  • 2006-05-14
  • 조회 수 4710

2006년 5월14일 회개와 복음 (1)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를 뜻한 ‘메타노이아’라는 말은 세례요한이 선포한 설교의 핵심이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서 이 회개라는 사상을 배웠다는 의미일까요? 우리는 그런 내막을 정확하게 풀어낼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먼저 출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세례 요한에게서 나름대...

예수님의 시험 (3), 4월27일 [4]

  • 2006-04-27
  • 조회 수 4710

2006년 4월27일 예수님의 시험 (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 1:13) 예수님이 사탄에게 받은 첫 번 시험은 다음과 같은 요구였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사탄의 요구가 흥미롭습니다. 그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 ”하고 단서를 붙였습니다. 예수님은 주변에서 이런 질문을 숫하게 받았을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런 의심을 하지 않았을까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

몰아내는 힘, 성령, 4월20일 [3]

  • 2006-04-20
  • 조회 수 4701

2006년 4월20일 몰아내는 힘, 성령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12) 마가복음 기자는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성령이 광야로 몰아내셨다고 설명합니다. 그 성령은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하늘로부터 내려온 영이겠지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순절을 성령 임재의 시기로 잡지만 예수님의 활동이 이미 성령의 주도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오순절 운운은 정확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굳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정당화하려면 예수님의 활동과 함께 했던 성령이 오순절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구체화했다고 말할 수는 있지...

선지자 이사야의 글, 3월27일 [10]

  • 2006-03-27
  • 조회 수 4698

2006년 3월27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 마가는 지금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인용하고 있는 글은 분명히 이사야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마가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곤란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글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 문제입...

요한이 잡힌 후, 5월2일 [1]

  • 2006-05-02
  • 조회 수 4667

2006년 5월2일 요한이 잡힌 후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14). 마가는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이 활동을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이 본문에는 아직 설명이 없지만, 요한이 잡힌 이유는 헤롯왕의 부도덕성을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요한이 헤롯의 행위를 보고 못 본채 하거나 에둘러 비판했다면 이렇게까지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겠지만 아주 노골적으로 비판하다가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결국 요한은 풀려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이처럼 부도덕한 통치자와 그런 세력을 향해서 적극적으로...

들짐승과 함께!, 4월30일 [2]

  • 2006-04-30
  • 조회 수 4650

2006년 4월30일 들짐승과 함께!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 1:13)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없는 언급이 마가복음에는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는 언급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들짐승이 무엇인지에 관한 설명은 없습니다. 정황적으로 볼 때 이 들짐승은 광야에 사는 것들일 텐데, 토끼일까요? 사슴일까요? 조금 사나운 늑대일까요? 마가가 무슨 의미로 들짐승 이야기를 여기에 첨부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예수님과 짐승이 전혀 어울리...

12월27일 예수의 동생들과 누이들

  • 2006-12-27
  • 조회 수 4642

2006년 12월27일 예수의 동생들과 누이들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막 3:32) 예수를 찾으러온 가족 중에는 어머니 마리아만이 아니라 동생들과 누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동생들이 몇 명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오늘 본문에 따르면 제법 여러 명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님이 세상을 떠난 후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였습니다. 야고보 이외에도 교회 지도자 역할을 한 동생들이...

예수 어록(017)- 요 2:4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3) [2]

  • 2018-12-26
  • 조회 수 4628

요 2:4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3)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에 예수는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우선 번역이 마뜩찮다. 당시에 ‘여자여!’라는 호칭이 낮춰 부르는 게 아니었다고 해도 우리말로는 낮춤말로 들린다. 서술되는 대목에서 예수의 어머니라는 말이 나왔으니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번역해도 괜찮았다. ‘여자여!’라고 불렀다면 다음 문장도 극존칭인 ‘있나이까?’라고 하지 말고 ‘있...

니고데모, 요한복음 묵상(22) [6]

  • 2013-05-21
  • 조회 수 4627

요한복음 3장에는 그 유명한 니고데모 이야기가 나온다. 니고데모가 누군지는 본문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유대인의 지도자, 또는 산헤드린 의원이라는 설명만 나온다. 그가 실제 인물이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공관복음서에는 니고데모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니고데모는 가상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요한복음 기자가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서 니고데모라는 인물을 내세운 것이다. 없는 사람을 거짓말로 내세웠다는 말이냐, 하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그...

옥중서간(10)- 비종교화(6) [3]

  • 2010-05-25
  • 조회 수 4608

바르트는 종교비판을 시작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 후로 종교 대신에 실증주의적 계시론에 기울어졌다. 거기에 기독교 신앙의 운명을 걸었다. 즉 처녀 탄생이나 삼위일체, 그 밖의 어떠한 것이건 모든 기독교 교리는 전체적으로 용인되든지 또는 전체적으로 거부되든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성서적인 게 아니다. 인식에도 단계가 있고, 의미의 중요성에도 단계가 있다. 즉 기독교 신앙의 비의가 세속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또 하나의 비의가 고수되는 것은 곤란하다. 계시 실증주의는 결국 신앙의 율법을 ...

5월6일 하나님의 나라 (3) [4]

  • 2006-05-06
  • 조회 수 4600

2006년 5월6일 하나님의 나라 (3)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문장에서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부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존재하고 그의 나라가, 즉 그의 통치가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는 일치합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로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죠. 앞에서 나라는 곧 통치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결...

예수 어록(353) 요 16:1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 2020-06-16
  • 조회 수 4596

예수 어록(353) 요 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이제 새로운 장이 시작한다. 14장부터 17장까지 이어지는, 소위 ‘고별 연설’의 후반부가 시작된 것이다. ‘실족’하지 않기는 쉽지 않다. 실제 육체 활동에서도 발을 헛디딜 때가 있다. 나이가 들면 아무리 조심해도 이런 사고는 피할 수 없다. 실족해도 발목이나 무릎 관절을 다치지 않으려면 평소 하체 근육을 키워야 한다. 근육을 키우려면 걷기나 뛰기, 또는 자전거 타기와 같은 훈련을 꾸준히 해야 한다. 근육 키우기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믿음과 우상숭배 [2]

  • 2013-09-21
  • 조회 수 4586

9월21일(토) 내일 설교는 9월 첫 주일에 이어서 예레미야서가 본문이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의 운명 앞에서 그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한다. 목전에 처한 조국의 패망 원인이 우상숭배라는 그의 주장은 과연 옳은가? 이 문제를 풀어가려면 선지자들의 독특한 영적 통찰력이 무엇인지, 우상숭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낱말풀이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근원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죽음과 인간 문명과 그것의 속성들이 다 연루되어 있다. 설교 시간에 이런 문제들을 시시콜콜 해명할 수는 없다...

6월8일 예수의 형제들

  • 2007-06-08
  • 조회 수 4585

2007년 6월8일 예수의 형제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3) 본문이 나열하고 있는 예수의 가족에서 아버지 요셉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게 조금 이상합니다. 그가 일찍 죽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대목만이 아니라 복음서는 전반적으로 요셉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님 탄생설화에 잠간 등장하고 맙니다. 복음서 이외의 다른 신약성서는 요셉에 관해서 더 철저하...

2월15일 등경 위의 등불 [6]

  • 2007-02-15
  • 조회 수 4570

2007년 2월15일 등경 위의 등불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막 4:21)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21-25절에 나오는 두 개의 말씀은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니라 편집자가 이곳에 삽입한 것이라고 합니다. 1-20절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이고, 26-3절은 자라나는 씨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간에 등불과 헤아림이라는 말씀이 들어갔습니다. 신학비평 문제는 우리의 묵상에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맙시다. 오늘 ...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