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아내는 힘, 성령, 4월20일

조회 수 4688 추천 수 25 2006.04.20 22:22:38
2006년 4월20일 몰아내는 힘, 성령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12)

마가복음 기자는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성령이 광야로 몰아내셨다고 설명합니다. 그 성령은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하늘로부터 내려온 영이겠지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순절을 성령 임재의 시기로 잡지만 예수님의 활동이 이미 성령의 주도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오순절 운운은 정확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굳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정당화하려면 예수님의 활동과 함께 했던 성령이 오순절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구체화했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이런 설명은 조금 궁색합니다. 이런 설명은 복음서와는 달리 사도행전의 배경이 되는 누가 공동체와의 관계에서 해명되어야 합니다.
그건 그렇다 하고,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려면 우선 ‘성령’이 누구인지를 한번 짚어야 합니다. 헬라어 성서는 성령을 ‘프뉴마’라고 표현합니다. 프뉴마는 영, 정신, 바람, 힘 등등,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위의 문장을 이렇게 바꿔서 읽어보십시오. “바람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또는 “힘이 ... 몰아내신지라.” 이런 표현은 여러분에게 약간 불경하게 들릴지 모르겠군요. 그러나 그게 원래의 의미인 걸 어떻게 합니까? 그걸 억지로 부정할 수는 없지 않나요?
우리에게는 이 성령이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협의로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프뉴마가 그리스도교 안에서만 특별하게 활동하는 영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말씀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바람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부나요? 힘이 그리스도교 교회 안에서만 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성서가 채용하고 있는 헬라어 프뉴마는 온 세계에 가득한 영이며, 숨이며, 바람이며, 힘입니다. 즉 그 프뉴마는 온 세계에 가득한 생명의 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냈다는 것만 보아도 역시 프뉴마는 힘으로 작용한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고대인들이 왜 바람을 프뉴마로 생각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미룹시다.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낸 그 프뉴마는 구체적으로 무엇, 또는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는 그 프뉴마를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이게 참으로 난감한 문제입니다. 히브리어 ‘루아흐’와 비슷한 의미인 헬라어 ‘프뉴마’는 결코 우리가 규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서 기자는 프뉴마를 바람처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우리가 모른다고 했습니다. 프뉴마가 우리의 계산서 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프뉴마에 관해서 아무 것도 모르고, 아무런 경험도 할 수 없다는 말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미 신구약성서가 이에 관해서 많은 설명을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2천년 역사는 그걸 해명하려는 흔적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계속해서 성서에 귀를 기울어야만 합니다. 처음 인간을 창조할 때 인간의 코에 들어간 하나님의 그 숨이 무엇인지, 이스라엘의 전쟁에서 승리를 안겨준 그 힘은 무엇인지, 궁극적으로 예수의 부활 사건을 일으킨 그 영이 무엇인지 설명해야 합니다. 그 설명이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성서와 그리스도교의 신앙고백이 여전히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이미 진리의 강물에 들어가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걸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하고 성급하게 질문하지는 마십시오. 천천히 진도를 나갑시다.
아직도 저는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낸 그 프뉴마의 실질적인 현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하지 못했군요. 일부터 이렇게 늦춘 게 아니라 그건 기본적으로 내 능력을 벗어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저는 바람처럼 움직이는 생명의 영이 예수의 온 영혼을 가득 채웠다고만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영은 바로 하나님 자체이십니다. 그 영과 일치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드러낸 분이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주님, 생명의 바람을 온 몸으로 받으며 살기 원합니다. 온 세계를 살리는 그런 힘 안에서, 그런 영 안에서, 그런 바람 안에서 살기 원합니다.

[레벨:18]은나라

2016.07.11 21:00:48

이것 질문해도 될지 잘 모르겠지만, 그때의 고대 사람들은 광야에서 수련을 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했듯이..

예수님도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시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기위한 수련을 한건 아니었을까?

금식하면서 드는 여러가지 유혹들을 성서기자들은 성령의 몰아가심으로 이해했고, 금식을 실패하지 않았기에..

승리로 기록한것은 아니었을까? 나름 상상해 봅니다.[시대속의 인간예수시니까요..]

우리의 삶도 보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각각의 성품과 위치와 관계와 환경속에서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면..

우연같은 삶의자리나 모습들이.. 훗날 돌아보면, 하나님의 이끄심이었구나! 하고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 이치로 이해해도 될는지..? 요. 제가 신학을 잘모르니.. 제 이해가 이현령 비현령일수도 있을거 같아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6.07.11 22:10:42

대글로 설명하신 내용이 전반적으로 이상한 건 없습니다.

다만 '금식을 실패하지 않았기에...'는

무슨 말인지 제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수련'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훗날 돌아보면.... 하고 생각이 들거든요.'

정확한 말씀입니다.


[레벨:18]은나라

2016.11.05 10:46:36

그 영과 일치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드러내셨다 하셨는데..

"온전하게" 의 모든것을 알고 싶습니다. 그걸 알면 예수가 왜 하나님이신지.. 이해하는데,

좀더 가까이 다가갈수 있을것도 같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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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2월27일 예수의 동생들과 누이들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막 3:32) 예수를 찾으러온 가족 중에는 어머니 마리아만이 아니라 동생들과 누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동생들이 몇 명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오늘 본문에 따르면 제법 여러 명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님이 세상을 떠난 후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였습니다. 야고보 이외에도 교회 지도자 역할을 한 동생들이...

니고데모, 요한복음 묵상(22) [6]

  • 2013-05-21
  • 조회 수 4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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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록(017)- 요 2:4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3) [2]

  • 2018-12-26
  • 조회 수 4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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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서간(10)- 비종교화(6) [3]

  • 2010-05-25
  • 조회 수 4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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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록(353) 요 16:1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 2020-06-16
  • 조회 수 4588

예수 어록(353) 요 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이제 새로운 장이 시작한다. 14장부터 17장까지 이어지는, 소위 ‘고별 연설’의 후반부가 시작된 것이다. ‘실족’하지 않기는 쉽지 않다. 실제 육체 활동에서도 발을 헛디딜 때가 있다. 나이가 들면 아무리 조심해도 이런 사고는 피할 수 없다. 실족해도 발목이나 무릎 관절을 다치지 않으려면 평소 하체 근육을 키워야 한다. 근육을 키우려면 걷기나 뛰기, 또는 자전거 타기와 같은 훈련을 꾸준히 해야 한다. 근육 키우기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5월6일 하나님의 나라 (3) [4]

  • 2006-05-06
  • 조회 수 4585

2006년 5월6일 하나님의 나라 (3)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문장에서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부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존재하고 그의 나라가, 즉 그의 통치가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는 일치합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로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죠. 앞에서 나라는 곧 통치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결...

6월8일 예수의 형제들

  • 2007-06-08
  • 조회 수 4582

2007년 6월8일 예수의 형제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3) 본문이 나열하고 있는 예수의 가족에서 아버지 요셉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게 조금 이상합니다. 그가 일찍 죽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대목만이 아니라 복음서는 전반적으로 요셉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님 탄생설화에 잠간 등장하고 맙니다. 복음서 이외의 다른 신약성서는 요셉에 관해서 더 철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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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09-21
  • 조회 수 4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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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15일 등경 위의 등불 [6]

  • 2007-02-15
  • 조회 수 4555

2007년 2월15일 등경 위의 등불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막 4:21)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21-25절에 나오는 두 개의 말씀은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니라 편집자가 이곳에 삽입한 것이라고 합니다. 1-20절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이고, 26-3절은 자라나는 씨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간에 등불과 헤아림이라는 말씀이 들어갔습니다. 신학비평 문제는 우리의 묵상에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맙시다. 오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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