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6일 하나님의 나라 (3)

조회 수 4585 추천 수 24 2006.05.06 23:23:16
2006년 5월6일 하나님의 나라 (3)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문장에서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부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존재하고 그의 나라가, 즉 그의 통치가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는 일치합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로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죠. 앞에서 나라는 곧 통치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은 통치로서 존재한다는 말이 됩니다. 조금 더 풀어서 설명하면, 하나님은 통치이며, 행위이며, 힘입니다. 그는 평화, 정의, 기쁨, 자유라는 속성을 지닌 하나님의 나라로서 존재합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의 핵심이라 할 사랑으로 존재합니다. 하나님은 곧 사랑이십니다.
간혹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다거나, 그 하나님을 자기가 직접 만난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나라’를 직접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사랑을 직접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어떻게 바람을 직접 만날 수 있습니까? 물론 바람을 시원하게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람 전체는 아닙니다. 바람의 일부를 경험할 수는 있지만 전체를 경험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부분적으로는 경험할 수는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경험할 수는 없습니다. 전체를 경험하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없다는 말이 됩니다.
물론 성서에는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것처럼 진술된 텍스트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진술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서 진술은 일종의 시(詩)입니다. 시인들은 사물과도 직접적으로 대화하는 것처럼 시를 씁니다. “바람이 노래하네.” 이런 시구를 사실에 대한 진술로 생각하는 사람은 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성서 기자들의 진술도 이와 비슷합니다. 그들은 높은 영적 경지에서 하나님의 ‘나라’, 또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인식했습니다. 그런 인식을 그들은 야훼 하나님이 자기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아마 어떤 사람은 이런 설명에 불만스러워할지 모르겠군요. 하나님의 계시인 성서를 인간의 인식론으로 떨어뜨리지 말라고 말입니다. 필자는 그런 주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합니다. 필자는 지금 성서를 인간의 인식론적 범주로 제한하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행위와 그것을 알아들어야 할 인간과의 사이에 작동해야 할 인식론적 통로에 대해서 설명하는 중입니다. 하나님의 존재 신비와 계시의 존재론적 능력은 우리의 신앙과 행위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합리적 인식론이 파괴될 수는 없습니다. 오늘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계시를 받은 것처럼 주장하는 여러 이단과 교주들에게 나타나는 문제가 바로 이런 합리적 인식론의 파괴이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하나님 상은 어떻게 이해되고 있을까요? 대개는 왕처럼, 아버지처럼, 남자처럼 비쳐질 겁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최소한 산신령쯤으로 여겨지겠지요. 조금 더 열린 생각을 하는 분들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과 그의 나라, 그의 행위가 하나라는 사실은 별로 생각하지 못할 겁니다.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에 대한 상을 정적인 데서 동적인 데로 바꿔나가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건 우리의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게 곧 성서의 하나님 상입니다. 우리들이 그런 역동적인 하나님 이해를 자신의 작은 세계 경험에 한정시켰을 뿐입니다.
이제 열린 눈으로 이 세상에서 생명 사건들이 어떻게 열리는가 보십시오. 그 생명의 힘이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에게 우리의 운명을 맡기고 사는 게 곧 성서적 신앙입니다.

주님, 당신의 ‘나라’가 곧 당신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도와주십시오. 아멘.

[레벨:1]똑소리

2006.05.08 11:20:56

기도 중에 어떤 음성을 듣고 그것을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그건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고 직접적 하나님 경험이 아닙니다라고 말했을 때
그 분은 자신의 경험이 직접적 하나님 경험이 아니고 간접적 경험이고
그것이 하나님은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인다고 말하면 이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해 주어야 하나요? 물론 이런 분들은 하나님은 말씀으로 존재하시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는다는 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조직신학적 전이해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자신의 메마른 신앙에 역동적인 힘을 제공한다고 철썩같이 확신하고 있는 것도 기독교의 현실이구요. 이런 현상이 기독교 안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유독 기독교 안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심리적인 현상인가요? 아니면 종교적으로 그런 경험에 잘 빠지는 특이체질이 있는지요?
하여튼 궁금한 건, 기도 중에 들은 음성을 하나님의 간접적인 경험이란 주장이 맞는 말인가요?
그것이 간접적인 경험이 될 수 있나요?
목사님의 글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간접적 경험(말씀에 대한 깨달음, 마음에 일어나는 일시적 평안)에 대한 말씀을 몇 차례 하신 적이 있는데 사실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경험, 간접적 경험이란 말자체가 어떨때는 모호하게 들릴때가 있거든요.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마음에 일어나는 평안이나 말씀을 깨닫는 현상은 하나님의 간접경험이 될 수 있고, 기도 중에 들은 음성은 간접적 경험이 될 수 없다면 그 기준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사실 할 말이 없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5.09 00:16:17

똑소리 님,
하나님 경험에 관해서 제가 쓴 글이
어떤 배경을 둔 건지는
그 텍스트를 확인해 봐야만 알 수 있으니까
그건 여기서 접어두겠습니다.
감정, 깨달음 같은 것들을 하나님 경험이라고 볼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지요?
내가 혹시 기도 중의 들는 음성과 심리적 평화, 또는 말씀 해석을
완전히 구분해서 설명한 적이 있던가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데,
그건 나중에 확인해보구요.
어떤 경험이나 깨달음이건, 어떤 환상이나 느낌이건
그게 바로 하나님 자체에 대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은폐되어 있는 분이에요.
종말까지 말이지요.
하나님만이 아니라 사물과 생명의 본질도 역시 은폐되어 있어요.
그런 모든 존재자, 존재를 우리가 실체로서, 전체로서 만날 수 없다는 말이에요.
여기 책상 위의 책의 실체가 무엇인지 우리는 모르잖아요.
그런 마당에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는 게 말이 되나요?
제가 만약 하나님 경험이라는 말을 했다면
그건 이런 은폐의 속성을 깊이 인식한다는 뜻이었을 겁니다.
또는 하인리히 오토의 <누미노제> 경험처럼
이 세상에 직면해서, 또는 말씀의 깊이를 직면해서
우리가 느끼는 거룩한 두려움 같은 것 말입니다.
존재의 아득함 같은 것이죠.
부활과 종말의 신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하나님 자체에 대한 경험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요한복음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은 바람과 같아서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경험은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 아닌가 하는 말이 가능합니다.
그게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최소한, 아니 오직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를
그런 경험의 유일한 통로로 생각합니다.
너무 바르트 식의 발언이긴 하지만
그런 최소한의 규범이 허물어진다면
그리스도교의 인식론적 근거는 훼손됩니다.
그런 근거를 유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성서를 규범으로 삼는다는 말은 아닙니다.
성서는 그럴만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판넨베르크 식으로 말한다면 성서가 아니라 역사이겠지요.
저도 저는 성서와 역사가 함께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는 그래요.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들의 진술을
성서와 역사의 틀에서 검증하려는 거죠.
그 틀이 어떻게 작동되는가에 대해서는 여기서 말하기가 힘드네요.
그냥 그런 윤곽만 말하는 것으로 이만.

조현아

2006.05.09 08:31:12

똑소리님이 간과하신 것이 하나 있네요.

물론 하나님을 직접 본자는 죽는다는 말씀이 있긴 합니다만..
모세의 경우, 하나님을 대면한 자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예수 그분도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그분을 보았다고 죽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음성을 들었다고 해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이시자 하나님이신 분이니까요.

잘 모르면서 잘 아는 척 하거나
잘 모르면서 모르는 것에 대해 그럴듯하게 합리화한다면
그는 하나님앞에서 거짓말하는 것이며 속이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사무엘시대뿐 아니라 사도바울 시대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분이 살아계신 연고요
말씀이 진리인 까닭이요, 변함없이 역사하시는 까닭입니다.
다만 그럴듯한 지식과 말의 한계라는 안개가 더 자욱해졌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그럴듯한 말로 현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장차 하나님 앞에 설 자로,(물론 그런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계실지 모르겠군요)
확신의 여부를 떠나, 자신의 지식이 전부인냥 제단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이런 멘트를 남기고 싶지 않지만, 말하지 않으면 직무유기죄가 성립되지 않을까싶은
두려움도 있고... 하나님 앞에서 똑소리님의 말이 사실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아니라 " 말하지 않은 제 책임이 있을 것 같아서 입니다.
잘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하는 것이
그럴 듯한 말을 끌어와서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입니다.

다만 상대적인 한계 안에 갇힌 유한한 인간의 지식으로, 단지 그것만으로
추측하고 결론을 내려, 성경과 정 반대의 말을 하면서 마치 그것이 사실인냥
암시하려는 것은 제발 그만 두었으면 좋겠습니다.
섯부른 선무당이 현란하게 휘두르는 칼(말)에 많은 영혼이 다칠수 있으니까요.
말씀이 아닌 인간의 말에 속는 영혼도, 그 결과에 대해 자기변명이 불가하겠지만
속이는 사람은 더더욱 자기 변호가 불가능하겠기에 말입니다.

[레벨:1]똑소리

2006.05.09 18:36:27

조현아님!
저와 정목사님과의 대화에 끼어들기 하셨군요.
그런데 끼어들기 방식이 상당히 서툴러 보이는군요.
적어도 주행중에 끼어들기라면 손을 내미는 정도는 운전자의 기본예의인데
님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실은 댓글을 달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습니다.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확신감+사명감이 대단해 보입니다.
님의 글에 따르면 저는 졸지에 거짓말장이에 사기꾼이 되어 버렸네요.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님의 일방적인 생각이니까.

"~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현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지식이 전부인냥 제단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물론 그런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계실지 모르겠군요)"

괄호 안의 글을 보면 저를 구원의 확신조차 없는 사람으로 생각하시는듯 한 느낌도 드네요.
신학을 하셨다고 하셨지요?그래서인지 모르지만 글투가 거의 훈계쪼군요.
전도사님이셔서 말투가 그러신가요? 평소 님의 글투와 대조적입니다.
도대체 내가 무슨 말로 당신을 자극했기에
님에게서 거짓말장이로 취급받아야 되는지 이유를 모르겠군요.

조현아님!
제 글을 잘 읽어보세요. 제가 누구를 현혹했나요? 아니면 누구를 비난하고 있습니까?
저는 단지 개인적인 차원에서 신학적 신앙적 궁금증을 선생님께 질문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에게는 시시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저는 이런 문제를 붙들고 씨름중에 있습니다.

참 신기합니다. 님께서 제기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을 수 있는가
직접 대면이 가능한가 하는 문제는 몇 달전에 제가 정목사님께 던졌던 질문이고
이제 저는 그 문제를 시나브로 신학적으로 극복해 나가고 있는 중인데
불과 몇달전에 했던 그 고민을 님에게 답해야 할 위치에 서 있군요.
이런 걸 아이러니라고 하나요?

님의 질문에 답하기 전에 제가 한가지 질문해 보죠.
만일 제 물음에 답하신다면 저도 대답하겠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면 죽는다는 저의 글을 읽고
님께서는 예수님도 하나님인데 그러면 사람들이 왜 죽지 않느냐는 식으로 대꾸하셨군요.
아마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런 말씀을 하신가본데 그렇다면 예수가 하나님이었다면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죽으셨다는 주장도 가능하겠군요. 이 부분에서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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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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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어록(353) 요 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이제 새로운 장이 시작한다. 14장부터 17장까지 이어지는, 소위 ‘고별 연설’의 후반부가 시작된 것이다. ‘실족’하지 않기는 쉽지 않다. 실제 육체 활동에서도 발을 헛디딜 때가 있다. 나이가 들면 아무리 조심해도 이런 사고는 피할 수 없다. 실족해도 발목이나 무릎 관절을 다치지 않으려면 평소 하체 근육을 키워야 한다. 근육을 키우려면 걷기나 뛰기, 또는 자전거 타기와 같은 훈련을 꾸준히 해야 한다. 근육 키우기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5월6일 하나님의 나라 (3) [4]

  • 200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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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6일 하나님의 나라 (3)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문장에서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부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존재하고 그의 나라가, 즉 그의 통치가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는 일치합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로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죠. 앞에서 나라는 곧 통치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결...

6월8일 예수의 형제들

  • 2007-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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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8일 예수의 형제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3) 본문이 나열하고 있는 예수의 가족에서 아버지 요셉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게 조금 이상합니다. 그가 일찍 죽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대목만이 아니라 복음서는 전반적으로 요셉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님 탄생설화에 잠간 등장하고 맙니다. 복음서 이외의 다른 신약성서는 요셉에 관해서 더 철저하...

믿음과 우상숭배 [2]

  • 2013-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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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1일(토) 내일 설교는 9월 첫 주일에 이어서 예레미야서가 본문이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의 운명 앞에서 그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한다. 목전에 처한 조국의 패망 원인이 우상숭배라는 그의 주장은 과연 옳은가? 이 문제를 풀어가려면 선지자들의 독특한 영적 통찰력이 무엇인지, 우상숭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낱말풀이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근원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죽음과 인간 문명과 그것의 속성들이 다 연루되어 있다. 설교 시간에 이런 문제들을 시시콜콜 해명할 수는 없다...

2월15일 등경 위의 등불 [6]

  • 2007-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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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15일 등경 위의 등불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막 4:21)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21-25절에 나오는 두 개의 말씀은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니라 편집자가 이곳에 삽입한 것이라고 합니다. 1-20절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이고, 26-3절은 자라나는 씨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간에 등불과 헤아림이라는 말씀이 들어갔습니다. 신학비평 문제는 우리의 묵상에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맙시다. 오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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