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지자 이사야의 글, 3월27일

조회 수 4687 추천 수 91 2006.03.27 23:03:18
2006년 3월27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

마가는 지금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인용하고 있는 글은 분명히 이사야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마가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곤란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글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예언자들에게 실제로 말을 전해준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실제로 말씀하신다는 건가요? 조금 노골적으로 표현해서, 하나님이 입으로 말씀하신다는 건가요? 아니면 실제로 말하는 건 사람이지만 그게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뿐인가요? “선지자 이사야의 글”은 이사야의 글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글입니까? 이 질문을 단순화해 봅시다. 이사야의 글은 왜 하나님의 말씀인가요?
역사적 사실이라는 차원에서만 본다면 유대교가 기원후 70년 얌니야 회의에서 구약의 거룩한 문서 중에서 39권을 자신들의 정경으로 결정한 사건에 의해서 이사야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정경화 이전에는 이사야서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말일까요? 또한 정경으로 인정받지 못한 문서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닐까요? 이런 질문은 신약성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데, 이것은 단지 학문적인 호기심만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생활에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현실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삶을 규정하는 준거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간혹 설교하는 분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금 오버하는 분들은 자신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것처럼 설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가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직접 만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이 세상의 실체를 본다는 말인지요. 삶과 죽음까지 포함한 궁극적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죽음 이전에 한정되어 있는 인간이 직접 만나서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이사야서는 하나님이 이사야에게 직접 들려준 소리나 글로서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영적인 깊이에서 들여다보고 해석했습니다. 자기 민족이 처한 운명을 창조자이고, 정의와 평화의 왕이신 하나님의 시선으로 해석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말을 거신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을 거실 때 그걸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예언자이겠지요. 이사야는 그런 영적인 귀가 밝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는 바로 그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통해서 주님의 길을 예비해야 할 세례 요한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마가는 이사야의 글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만났으며, 오늘 우리는 마가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영적으로 깨어있는 사람들, 즉 예언자들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하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계시의 역사, 구원의 역사이겠지요. 그런 역사의 한 순간에 지금 우리의 삶이 걸려 있습니다.

[레벨:1]똑소리

2006.03.28 11:24:28

짧지만 명쾌한 글이어서
귀에 쏙쏙 눈에 쏙쏙 들어옵니다.
그런데 목사님!
또 궁금증이 제 안에서 발광을 하는군요.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습니다>
이 표현은 성경에 나오지요
그리고 이를 근거로 목사님께서도 줄기차게 주장해 오셨구요.
하나님을 직접 본 사람도 없고 그렇기에 음성도 들을 수 없었다면
하나님을 단 한번도 직접적으로 경험해 보지 않은 인간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게 참 궁금하네요.
하나님을 어떤 형상으로 만들지 말라는 성서의 주장도
유대인들의 이런 신관과 무관하지 않을 것도 같구요.
다른 고대인들과 달리 유대인들이 단지 자신들의 신, 야훼를 인간과 엄격하게 구분된다는
사실을 그런식으로 표현한 것인지 아니면 자기내부에 존재의 불안감을 떨쳐버리지 못한 인간이
그런 신의식에 근거하여 갖는 공연한 공포심인지 궁금하군요.

성경에 보면 이성으로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적지 않더군요.
신앙으로 받아들여지면 그냥 넘어갈수도 있는데 그것도 안되니 미치겠고요.

어떤 사람이 성전 지성소에 들어갔다가 급살맞아 죽는가하면
짐을 싣고 가던 수레가 삐꺽해서 짐짝이 쏟아질 것 같으면
마땅히 조치를 취하는 것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상식인데
법궤를 운반하던 도중에 자격없는 사람이 법궤에 손을 댔다가
현장에서 급살맞아 죽은 성서의 사건 같은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요?
(아주 인간적인 추측을 해 본다면)
실제로는 심장마비인 것을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징벌로 신앙적으로 해석한 것인가요?
이런 사건이 세계관이 미숙한 고대 유대인들에게는 당연히 하나님의 징벌로 받아들여질수 있다하더라도
비유대인들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에게는 그런 사건들이 어떻게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실제로는 그것이 아닌데
신앙으로 그렇게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뜻일까요? 그건 아니지 않습니까?
만일 신앙의 이름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다면
오늘날 어떤 기독교인이 사업하다가 망하거나
교통사고 나서 죽을 뻔 한 경험들을 자신의 신앙적 결함과 연관해서 해석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목사님께서도 그런 식으로 자주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성서는 해석이 필요하다구요.

어쨌든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서
이제서야 조금씩 눈이 열리는 것 같아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보지 못하는 자가 보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결코 육신적인 소경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요즘들어 깨닫습니다.
감사 감사 감사 감사 감사합니다. ^-^

[레벨:1]정세웅

2006.03.28 15:31:42

목사님,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사람들/목사들의 문자적태도가 문제이기는 하지만,
시어를 이해한다면, 그 말들을 시어로 - 본인이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서 - 표현(간직)하는 마음까지 버리는 것은 좀... 문제가 있지 않을까요?
가능하지 않은 일들을 사실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진짜 시인이냐/시어를 이해하느냐가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3.28 23:24:38

똑소리 님,
재미있게 질문하고, 또 설명하셨군요.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는 말을
바르트식으로 바꾼다면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인 차이라고,
또는 하나님은 전적 타자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것은 또한 하나님이 역사 전체로 자기를 계시한다는 사실에 대한
실존적인 고백이기도합니다.
우리는 전체를 아직 모릅니다.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네요.
그런 절대적인 세계 앞에서
인간의 인식론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는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3.28 23:27:07

정세웅 목사님,
우리는 전체 역사로 계시하는 하나님을 모르지만
동시에 그를 직접적으로 경험해야 합니다.
불가능한 가능성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지요.
직접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간접적으로는 가능한 하나님의 경험이 그것입니다.
그걸 영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절대적인 생명, 누미노제, 절대의존감정 등등,
이런 힘에 대한 경험을 수사적으로
하나님을 보았다거나, 만났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요.

[레벨:0]riveroad

2006.03.29 02:54:14

목사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와 관련해서 궁금증을 느끼게 하는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그 귀절들을 (한영성경전서(NIV), 한영성경협회)에서 발췌해서 아래에* 옮깁니다. 짧게 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제 주변에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직접 만났다"고 하는 분들이 여럿 있고,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사람(비유하자면 법정에서의 변호사)과는 다른 하나님을 직접 만난 증인(witness *물론, 여호와의 증인으로 불리는 사람은 아님)이다"라는 설명을 듣기도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아는 사람과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직접 체험한 사람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겠지요.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저는 혼란을 느낍니다.
과연 신학적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직접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말입니다. 아래의 귀절들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설명해 주시면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창세기32:24-30] 밤중이지만, 야곱은 하나님을 대면했다고 주장함
28: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니니라 (Then the man said, "Your name will no longer be Jacob, but Israel, because you have struggled with God and with men and have overcome.")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So Jacob called the place Peniel, saying, "It is because I saw God face to face, and yet my life was spared.")

[출애굽기4:24-26] 모세의 아내가 하나님께서 모세를 죽이려 하시는 것을 목격했다는 듯한 대목
24: 하나님께서 길의 숙소에서 모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시는지라 (At a lodging place on the way, the LORD met Moses and was about to kill him.)
25: 십보라가 차돌을 취하여 그 아들의 양피를 베어 모세의 발 앞에 던지며 가로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But Zipporah took a flint knife, cut off her son's foreskin and touched Moses' feet with it. "Surely you are a bridegroom of blood to me," she said.)
26: 여호와께서 모세를 놓으시니라 그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를 인함이었더라 (So the LORD let him alone. (At that time she said "bridegroom of blood," referring to circumcision.))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3.30 00:02:07

riveroad 님,
관련성구를 잘 챙기셨군요.
하나님이나 천사 목격담은 성서에 자주 등장합니다.
하나님을 본 사람은 죽는다는 말도 있구요.
사실 성서는 어떤 기독교 교리에 대해서 일관성을 갖고 저술한 신학책이 아닙니다.
수천년 동안, 서로 다른 사람들이 경험한 신앙에 관한 상이한 진술들입니다.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성서에 없으며,
구원표상도 가지각색입니다.
믿음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고난 자체가 강조되기도 합니다.
결국 성서는 어떤 해석학적 관점을 통해서 들어가야만 한다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비교하면 될까요?
성서 텍스트는 모짜르트 악보와 같습니다.
악보가 음악은 아닙니다.
악보는 음악을 지시할 뿐입니다.
성서 텍스트는 하나님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지시할 뿐입니다.
야곱과 모세의 아내가 무엇을 경험했을까요?
그들은 왜 자신들이 하나님을, 또는 하나님의 천사를 만났다고 생각했을까요?
그들이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생명 자체를 만날 수 있을까요?
게놈 지도를 만드는 생물학자들은 생명을 만나는 걸까요?
생명은 그런 방식으로 현상하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생명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인류는 여러 방식으로 하나님의 자기 알림을 경험했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 자체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성서의 보도는 사실이 아니라는 말인가, 하고 질문하겠지요.
성서는 사실에 대한 보도가 아닙니다.
성서는 사실에 대한 해석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서는 사건에 대한 보도입니다.
팩트가 아니라 이벤트에 대한 보도입니다.
하나님은 팩트가 아니라 이벤트로 사람과 만나실 수 있겠지요.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만났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닐까요?
간단하게 대답하라고 했는데,
말하다보니, 횡설수설하다보니 길어졌군요.
끝으로,
성서의 텍스트는 '부분과 전체의 해석학적 순환'으로 읽혀야 합니다.
성서에 무엇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성서 전체 안에서만 정당성이 확보된다는 말입니다.

[레벨:0]riveroad

2006.03.30 01:38:26

답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목사님의 의견에 동감하는 바가 많으나, 한편으론 참 마음이 무겁습니다.

제가 다니는 현실교회는, 이런 주제에 대해 의문을 풀려고 질문을 하거나 또는 의견을 나누고자 토론을 하려고 하면, 믿음이 없는 불순종하는 자로 몰리거나 대화가 불가능한 험악한 상황으로 변한답니다.
유대인 랍비(Marc Z. Brettler)조차 성서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How to Read the Bible, Jewish Publication Society of America, October 15, 2005, 384p. )에서, 골리앗과 싸워 이긴 사람이 실제로 다윗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는 주장까지 하는 때에,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는 성서무오류설과 축자영감설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권장됩니다.

바르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아나가는 것과 교인들과 화합하는 것이 현실에서 공존하기 위해서는, 우째 해야 할지...

다시 한번 주신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레벨:15]namoo

2006.03.30 12:18:29

지금의 교회 현실은 조금씩 비슷한 경향이 있는듯 합니다.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는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그럴때 일어나는 질문자체를 아주 불경스럽게 여기는듯한 태도를 자주 봅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질문을 멈춘지도 스무살적부터해서 이십년도 더 된 일입니다.
이상스럽게도 물음에 대한 이야기는 않고,
본인이 말하고 싶은 준비된 말만 되풀이 하는지.. 도무지 모를일 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 대답이란것도 늘 누군가에의해 주어지는게 아니라
내가 찾아 나선길에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것 같습니다.
태양을 향해 얼굴을 돌리자 태양빛이 나를 비추듯이 말이죠.

성서를 '해석'과 '신화적 표현'이란 말 안에서
연애편지를 읽듯 말씀을 보니 좋네요.
마치 처음 편지를 받아들고 봉투를 열어가는 마음이 새롭습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것까지 다시 점검해보니 아는게 아니였단것을 알게 되네요.
그리고 용어 하나하나부터 개념을 바로 잡아가는게 필요한걸 느낍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풀 수 있는 문제를 모두 내 믿음이 부족한 탓으로 여기니
알게 모르게 앎과 신앙 사이에 분열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던거 같구요.

길은 아직 멀지만
길을 나선 이상
그 길 위에 있음만으로도 행복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것과 교인들과의 화합' 이거 지금 제게도 당면한 문제 입니다.
제가 좀 더 분명해지면 이런 문제들에서도 더욱 자유로워 질것 같기도 하네요.


profile

[레벨:13]토토

2007.04.18 08:56:03

앎의 길을 나선 이상 화합의 길도 처음부터 다시 나서는게 어떨지요
한발짝 물러나서..........

[레벨:18]눈꽃

2008.10.30 19:23:26

성서는 해석이 필요하다! ....Q,T 따라가다보면 마음속에많은것들이 일어나는데 영 표현력이부족하여서....이런글 올려도 될까? 잠깐제경험 -___-- 새벽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차안에서 그즈음 나의 기도는 일방통행이 아니어서 참으로 즐거운시간이였었습니다 어떤사항에대하여 열심히궁금해하고나름 노력도하고 기도로 여쭤보기도한일이 있던중 ...그답이 머리속에 떠오르는건지 누가 말해준건도같고...그런데그것이 하나님에관한어떤것인데 그것이 내가 알게된 것이 하나님에대한 아주작은것 예를들자면 여기 코끼리가있다면 그코끼리꼬리에있는 눈에보이지도않을 작은점정도일것같은데....그순간 그깨달음의 희열이얼마나크던지 가던차를급정거하여..... 왜냐하면 이렇게작은 부분을 알게되었는데 더 아니 하나님의 실체를아니 실체까지는아니더라도.... 알게된다면.... 그순간 그느낌....
떠오르는 성서의 한귀절 아 화로다 나는망하게되었구나! 그귀절이 실감이났습니다>>>>> 생략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예수의 믿음 [6]

  • 2013-11-05
  • 조회 수 4751

11월5일(화) 지난 설교 마지막 단락에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믿음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고 말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설교 제목에 따르면 당연히 우리의 믿음이 강조되어야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예수의 믿음이 강조되었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독교인 각자의 믿음은 물론 중요하다. 각 개인의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 믿음이라는 게 간단한 게 아니다. 이 세상적적인 원리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그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 나라(32)- 선교

  • 2010-06-10
  • 조회 수 4739

기독교 선교도 똑같이 권위주의적 전통의 흔적이 제거되어야만 오늘날 정상적으로 작동될 수 있다. 기독교의 선교를 광범위하고 맹렬하게 거부하는 현상이 이 사회에 자리하고 있다. 그런 거부는 대부분 과거에 많은 선교사들이 행한 권위주의적 방법 탓이다. 그들은 모범과 논증으로 납득시키는 대신 개종을 강요했다. 대부분의 경우 오늘의 선교적 과제는 에큐메니컬적인 과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특정한 지역에 있는 기독교 공동체들은 그 사회에서 인간 존엄의 진보적 모범이 되고, 또 그것에 동의하는 세력이 될 수 있도록 적...

교회에 나가는 이유(2)

  • 2010-06-26
  • 조회 수 4729

교회에 나가는 이유에 대해서 조금 더 솔직하게 생각해봅시다. 사실 솔직하게 생각한다는 것 자체도 쉽지 않소. 사람은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이중적인 행동과 판단을 내릴 뿐만 아니라 자기 합리화에도 빠르기 때문이오. 그런 동물은 지구에 사람이 유일하지 싶소. 이런 한계를 안고 있다고 하더라도 솔직해지려는 노력을 포기할 필요는 없소.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나가는 이유를 ‘구원’과 연결시키고 있을 거요. 교회에 나가면 구원받는다고 믿는 거요. 그걸 확신하는 사람도 있고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

아브라함의 자식들 [2]

  • 2017-06-20
  • 조회 수 4723

6월20일, 화 아브라함의 자식들 지난 설교 앞 대목에서 재미 삼아 아브라함이 몇 명의 여자에게서 몇 명의 아들을 낳았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하갈을 통해서 이스마엘을 얻었을 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86세(사라는 76세)였고, 사라를 통해서 이삭을 얻었을 때는 100세였다. 100세에 아내와 잠자리를 함께 한다는 게 실제로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교에서 짚은 것처럼 그 나이는 과장된 게 틀림없다. 세 번째 아내는 그두라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사라가 127세에 죽었다는 사실(창 23:1)을 감안하면 140세 내외였을 것이...

복음 (2), 3월24일 [2]

  • 2006-03-24
  • 조회 수 4700

2006년 3월24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막 1:1) <복음 2> 마가복음 기자가 전하는 복음(福音, 유앙겔리온)이라는 단어는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이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의 역사를 배경으로 기록된 구약성서에서 볼 때 가장 큰 기쁜 소식은 출애굽과 바벨론포로 귀환입니다. 먹고살기 힘들어 이집트 땅으로 이민 갔던 이스라엘 민족이 그곳에서 소수민족으로 당해야만 했을 고난, 그리고 전쟁에서 패배하여 인질로 잡혀갔던 바벨론 제국에서 당해야만 했을 모욕이 그들에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 것이었는지는 긴...

5월14일 회개와 복음 (1) [3]

  • 2006-05-14
  • 조회 수 4698

2006년 5월14일 회개와 복음 (1)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마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까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회개를 뜻한 ‘메타노이아’라는 말은 세례요한이 선포한 설교의 핵심이기도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서 이 회개라는 사상을 배웠다는 의미일까요? 우리는 그런 내막을 정확하게 풀어낼 수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이 먼저 출가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세례 요한에게서 나름대...

예수님의 시험 (3), 4월27일 [4]

  • 2006-04-27
  • 조회 수 4692

2006년 4월27일 예수님의 시험 (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 1:13) 예수님이 사탄에게 받은 첫 번 시험은 다음과 같은 요구였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사탄의 요구가 흥미롭습니다. 그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 ”하고 단서를 붙였습니다. 예수님은 주변에서 이런 질문을 숫하게 받았을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그런 의심을 하지 않았을까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

선지자 이사야의 글, 3월27일 [10]

  • 2006-03-27
  • 조회 수 4687

2006년 3월27일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막 1:2) 선지자 이사야의 글 마가는 지금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마가가 인용하고 있는 글은 분명히 이사야에 의해서 작성된 것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곧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마가도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로 이사야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우리는 여기서 매우 곤란한 문제에 봉착합니다. 성서 기자들의 글을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바로 그 문제입...

몰아내는 힘, 성령, 4월20일 [3]

  • 2006-04-20
  • 조회 수 4686

2006년 4월20일 몰아내는 힘, 성령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1:12) 마가복음 기자는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을 성령이 광야로 몰아내셨다고 설명합니다. 그 성령은 예수님이 세례 받을 때 하늘로부터 내려온 영이겠지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오순절을 성령 임재의 시기로 잡지만 예수님의 활동이 이미 성령의 주도로 일어났다는 점에서 오순절 운운은 정확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굳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정당화하려면 예수님의 활동과 함께 했던 성령이 오순절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구체화했다고 말할 수는 있지...

요한이 잡힌 후, 5월2일 [1]

  • 2006-05-02
  • 조회 수 4653

2006년 5월2일 요한이 잡힌 후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1:14). 마가는 요한이 잡힌 후에 예수님이 활동을 시작했다고 전합니다. 이 본문에는 아직 설명이 없지만, 요한이 잡힌 이유는 헤롯왕의 부도덕성을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요한이 헤롯의 행위를 보고 못 본채 하거나 에둘러 비판했다면 이렇게까지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겠지만 아주 노골적으로 비판하다가 이런 일을 당했습니다. 결국 요한은 풀려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이처럼 부도덕한 통치자와 그런 세력을 향해서 적극적으로...

들짐승과 함께!, 4월30일 [2]

  • 2006-04-30
  • 조회 수 4637

2006년 4월30일 들짐승과 함께!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막 1:13)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없는 언급이 마가복음에는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는 언급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들짐승이 무엇인지에 관한 설명은 없습니다. 정황적으로 볼 때 이 들짐승은 광야에 사는 것들일 텐데, 토끼일까요? 사슴일까요? 조금 사나운 늑대일까요? 마가가 무슨 의미로 들짐승 이야기를 여기에 첨부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예수님과 짐승이 전혀 어울리...

12월27일 예수의 동생들과 누이들

  • 2006-12-27
  • 조회 수 4632

2006년 12월27일 예수의 동생들과 누이들 무리가 예수를 둘러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막 3:32) 예수를 찾으러온 가족 중에는 어머니 마리아만이 아니라 동생들과 누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동생들이 몇 명인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오늘 본문에 따르면 제법 여러 명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예수님이 세상을 떠난 후 예루살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이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였습니다. 야고보 이외에도 교회 지도자 역할을 한 동생들이...

니고데모, 요한복음 묵상(22) [6]

  • 2013-05-21
  • 조회 수 4618

요한복음 3장에는 그 유명한 니고데모 이야기가 나온다. 니고데모가 누군지는 본문이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유대인의 지도자, 또는 산헤드린 의원이라는 설명만 나온다. 그가 실제 인물이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공관복음서에는 니고데모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니고데모는 가상의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요한복음 기자가 어떤 것을 말하기 위해서 니고데모라는 인물을 내세운 것이다. 없는 사람을 거짓말로 내세웠다는 말이냐, 하고 불편하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걸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글을 쓰는 사람은 그...

예수 어록(017)- 요 2:4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3) [2]

  • 2018-12-26
  • 조회 수 4616

요 2:4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3)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마리아의 말에 예수는 의외의 반응을 보인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우선 번역이 마뜩찮다. 당시에 ‘여자여!’라는 호칭이 낮춰 부르는 게 아니었다고 해도 우리말로는 낮춤말로 들린다. 서술되는 대목에서 예수의 어머니라는 말이 나왔으니 ‘어머니!’라는 호칭으로 번역해도 괜찮았다. ‘여자여!’라고 불렀다면 다음 문장도 극존칭인 ‘있나이까?’라고 하지 말고 ‘있...

옥중서간(10)- 비종교화(6) [3]

  • 2010-05-25
  • 조회 수 4604

바르트는 종교비판을 시작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는 그 후로 종교 대신에 실증주의적 계시론에 기울어졌다. 거기에 기독교 신앙의 운명을 걸었다. 즉 처녀 탄생이나 삼위일체, 그 밖의 어떠한 것이건 모든 기독교 교리는 전체적으로 용인되든지 또는 전체적으로 거부되든지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성서적인 게 아니다. 인식에도 단계가 있고, 의미의 중요성에도 단계가 있다. 즉 기독교 신앙의 비의가 세속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또 하나의 비의가 고수되는 것은 곤란하다. 계시 실증주의는 결국 신앙의 율법을 ...

예수 어록(353) 요 16:1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 2020-06-16
  • 조회 수 4588

예수 어록(353) 요 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이제 새로운 장이 시작한다. 14장부터 17장까지 이어지는, 소위 ‘고별 연설’의 후반부가 시작된 것이다. ‘실족’하지 않기는 쉽지 않다. 실제 육체 활동에서도 발을 헛디딜 때가 있다. 나이가 들면 아무리 조심해도 이런 사고는 피할 수 없다. 실족해도 발목이나 무릎 관절을 다치지 않으려면 평소 하체 근육을 키워야 한다. 근육을 키우려면 걷기나 뛰기, 또는 자전거 타기와 같은 훈련을 꾸준히 해야 한다. 근육 키우기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6월8일 예수의 형제들

  • 2007-06-08
  • 조회 수 4580

2007년 6월8일 예수의 형제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3) 본문이 나열하고 있는 예수의 가족에서 아버지 요셉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게 조금 이상합니다. 그가 일찍 죽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대목만이 아니라 복음서는 전반적으로 요셉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님 탄생설화에 잠간 등장하고 맙니다. 복음서 이외의 다른 신약성서는 요셉에 관해서 더 철저하...

5월6일 하나님의 나라 (3) [4]

  • 2006-05-06
  • 조회 수 4580

2006년 5월6일 하나님의 나라 (3)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막 1:15)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문장에서 우리가 착각하기 쉬운 부분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따로 존재하고 그의 나라가, 즉 그의 통치가 따로 존재한다는 생각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는 일치합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로서 존재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존재 방식이죠. 앞에서 나라는 곧 통치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결...

믿음과 우상숭배 [2]

  • 2013-09-21
  • 조회 수 4579

9월21일(토) 내일 설교는 9월 첫 주일에 이어서 예레미야서가 본문이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의 운명 앞에서 그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한다. 목전에 처한 조국의 패망 원인이 우상숭배라는 그의 주장은 과연 옳은가? 이 문제를 풀어가려면 선지자들의 독특한 영적 통찰력이 무엇인지, 우상숭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낱말풀이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근원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죽음과 인간 문명과 그것의 속성들이 다 연루되어 있다. 설교 시간에 이런 문제들을 시시콜콜 해명할 수는 없다...

2월15일 등경 위의 등불 [6]

  • 2007-02-15
  • 조회 수 4552

2007년 2월15일 등경 위의 등불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막 4:21)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21-25절에 나오는 두 개의 말씀은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니라 편집자가 이곳에 삽입한 것이라고 합니다. 1-20절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이고, 26-3절은 자라나는 씨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간에 등불과 헤아림이라는 말씀이 들어갔습니다. 신학비평 문제는 우리의 묵상에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맙시다. 오늘 ...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