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어록(156) 7: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유대 당국자와 군중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는 조건들에 집착했다. 요한복음 기자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1:46). 예수는 당시 주류에 속하지 못했다. 제사장의 아들도 아니고, 왕족도 아니었다. 넓은 의미에서 다윗의 후손이기는 했으나, 그런 조건만으로 예수가 주류에 포함될 수는 없었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조건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을 알았다. 우리에게 익숙한 말로 바꾸면, 그는 하나님 나라와 하나 된 사람이었다.

우리는 예수와 같은 차원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삶의 방향에서만은 하나님을 안다고 말해도 된다. 아니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는 곧 생명을 안다는, 또는 생명 지향적으로 살겠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수여자이기에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생명을 안다는 뜻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뜻이다. 이 사실을 실제의 삶에서 충만하게 느끼는 삶이 바로 생명을 아는 삶이다.

그런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여러 관점이 필요하다. 여기서 한 가지 관점만 말하겠다. C.S. 루이스의 말을 인용하겠다. “자신의 뒤뜰에서 낯선 기분을 느낄 수 없는 사람은 달에 가서도 그런 기분을 절대 느낄 수 없다.”(더글라스 길버트, 클라이드 컬비 엮음, 씨 에스 루이스: 그의 삶 그의 세계, 90쪽에서 재인용). 지금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이 순간안에서 살아있음의 신비를 충만하게 느낄 줄 알 때 하나님을 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느낌을 아는 사람은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감을 느낄 것이며, 거기서 참된 기쁨에 참여할 것이다. 이런 삶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다. 나도 잘 안 된다. 완전히 그쪽으로 방향 선회를 해야만 가능하다. 이를 가리켜 성경은 메타노이아, 즉 회심이라고 말한다.


[레벨:18]은나라

2019.07.17 06:32:23

6월말 설교에서..
'고통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선하시다.' 이말씀을 묵상하게 되었어요.

''함께 한다''는 의미가 우리인간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같이 있는다.'머 그런 뜻하고는 좀 다른 차원같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거죠.

그런데 오늘 아침..
이 묵상을 보고 어렴풋이 알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하나님이 함께 한다는건..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거고..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건..
예수님과 똑같은 방식은 아니지만,
메타노이아, 회심이라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안다.(삶의 방향에서)
생명을 안다.(생명 지향적으로 살겠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나님 나라를 산다. ]
라는 뜻이라는걸 알게 되네요.

중요한건 순간속에서 영원(낯섬, 생명의 신비)를 충분히 느낄수 있어야..
내 모든 삶(고통중에 있더라도..)에서 생명(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자유와 해방과 기쁨을 충만하게 살수 있다는 건데요.
이건 좀 어려운거 같아요.
주님의 도움이 강력히 필요한..
감사합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9.07.17 23:06:11

은나라 님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려는 노력과 조짐이 보입니다. ㅎㅎ

하나님은 '고통 중에 함께 하신다.' 보다는 '고통 중에'도' 함께 하신다.'가 더 정확하겠지요.

여기 평생 편두통을 앓거나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당해보지 않으면 그 고통을 알기 힘든 건 분명합니다.

그 가운데서도 우리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며,

친구와 악수를 통해서 전달받는 촉감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런 분들의 친구로 사는 게 기독교인의 책무이겠지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천사의 역할을 하는 거니까요.

그리고 어쩌다가 편두통이 사라지는 순간도 있고,

짧은 시간이나마 숙면하는 순간도 주어집니다.

그걸 붙들고 사는 삶도 우리가 멋진 인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삶보다

크게 못하지 않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삶의 저 나락과 바닥에는 죽음이 자리하고 있어서

그 어떤 삶도 죽음은 아니니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이 아닐지라도 생명의 기쁨을 만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우리 주 예수가 우리를 지탱해준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된 사람들이니 어떤 상황에 떨어질지라도

기쁨과 자유의 삶을 예민한 영성으로 찾아서 누려야 합니다.

[레벨:18]은나라

2019.07.18 07:27:59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려는 노력과 조짐이 보인다고 하시니..
한줄기 빛이 느껴지네요.ㅎ
목사님의 설명을 들으니..
기쁨과 자유의 삶을 저도 충분히 누릴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이 보입니다.
죄에서 이미 해방되었음을 늘 기억하면서..
예민한 영성으로 이 삶을 찾아 누려야 겠어요.
아주 아주 많이 감사드려요.^^

[레벨:18]부스러기은혜

2019.07.17 09:50:34

살아있음의 신비, 존재의 신비란
어쩜 가난으로 통칭되는 결핍, 고통, 절망,소외,고독, 허무가운데서 더 생생히 실감할수 있게 되지 않을까요?

본질은 비유를 통해서만 드러낼수 있다고 하지요?
이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적확히 비유하는 가시적인 실체가 '가난, 가난한 자'일진데,

우린 믿음을 동원해서 어떻게든  그 가난에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겠죠?
이 이율배반의 역설과 자기모순속에서 경건의 모양만큼은 나날이 강고해져 가고 있으니

우리 신앙여정에 존재의 신비를 경험하기란 연목구어겠구나... 싶습니다.


'까르페 디엠'이 주는 메세지처럼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언제나 오늘일뿐일진데

오늘 여기서 존재의 신비, 생명의 신비에 대한 거룩한 낯섬의 인식없이 J를 좇는다면

우리에게 구원이란 한낱 성경속의 추상명사요,

평생 무지개를 좇으려다 백발이 된 어느 소년 이야기를 써가는 것이겠지요?


고승의 반열에 올랐다 할수있는(ㅎㅎ) 목사님조차도 완전한 회심에 이르지 못했다 하시니,

우리야 평생 시늉만 내다 마는 땡중 신세로 지내다가 소천하게 되는건 아닐런지요?

방향성을 잃은지도 모른채 내고 있는 이 열심들이 모두 도로(徒勞)에 그치고 말겠구나.....

되풀이 되는 탄식과 자책속에서 한 발자욱도 못나간채 늘 제 자리를 맴돌고 있기만 하는것 같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9.07.17 23:16:18

저야말로 땡중입니다.

그런데도 매 순간 한 걸음씩 앞으로 나가는 기분이 드는 건 무슨 연유일까요?

책읽기가 재미있고, 강독이 재미있고, 성경공부와 설교가 재미있고,

사람과 업적은 점점 축소되고 하나님과의 관계만 크게 느껴지는 게 재미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 부스러기 님의 고민을 목회자로서 저도 안고 있습니다.

교우들을 기독교 영성의 중심으로 안내해야 하는데,

이게 사람의 뜻대로만은 절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ㅎㅎ

성령이 알아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큰 깨우침을 주시겠지 하고 마음 먹었습니다.

언젠가 모두가 자기의 얼굴을 확인하게 될 때에는 아쉬움이 있겠으나

하나님의 자비로 모두 치유받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예수 어록(169) 요 8:18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 2019-08-02
  • 조회 수 1011

예수 어록(169) 요 8:18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예수가 신명기에서 인용한 ‘두 사람의 증언’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가 아버지라고 부른 하나님의 증언이 중요하다. 두 사람이 아니라 천 명이 증언한다고 해도 진리가 보장되지는 않는다. 사실 예수가 종교 법정인 산헤드린과 정치 법정인 빌라도 총독 관저에서 받은 심문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신성 모독자라고 증언했다. 마 26:57절 이하에 산헤드린 심문 과정이 나온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모든 의원이 예수에 ...

예수 어록(168) 요 8: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 2019-08-01
  • 조회 수 2417

예수 어록(168) 요 8:17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예수는 신 19:15절과 17:6절을 인용하여 자신의 주장이 율법적으로도 옳다고 말한다. 이 구절에는 법적인 다툼이 발생한 경우에 한 사람의 증인만으로 결정하지 말고 두세 명의 증인을 세워야 한다는 명제가 나온다. 사람은 감정에 따라서, 또는 이해타산에 따라서 거짓 증언을 할 수 있으니 이로 인한 오류를 막아보자는 취지다. 율법은 정의를 세우기도 하고, 정의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율법은 문자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관...

예수 어록(167) 요 8:16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 2019-07-31
  • 조회 수 1636

예수 어록(167) 요 8:16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예수의 판단이 참된 이유는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예수와 함께하기에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판단을 받지 않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궁극적인 판단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이런 발언은 사이비 교주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신으로부터 자신이 계시를 받았기에 자기의 판단이 옳다는 식의 발언이 그것이다. ‘내 판단이 옳다.’라는 예수의 발언을 당시 바리새인들도 그렇...

예수 어록(166) 요 8: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1]

  • 2019-07-30
  • 조회 수 1344

예수 어록(166) 요 8:15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예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서 육체를 따라(카타 텐 사르카) 판단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육체를 따른다는 말은 인간적인 조건으로 판단한다는 뜻이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는 명백하다. 바리새인들이 볼 때 예수는 내세울 만한 인간적인 조건이 전혀 없었다. 왕족은 물론 아니고 제사장 출신도 아니다. 공부를 많이 한 흔적도 없고 지방 유지도 아니다. 예루살렘 주민도 아니고, 유대 주민도 아니다. 변방에 속한 나사렛 출신으로 목수의 ...

주간일지 7월28일 file

  • 2019-07-29
  • 조회 수 942

대구샘터교회 주간일지 2019년 7월28일, 성령강림후 일곱째 주일 1) 살아계신 하나님- 저는 평생 설교에 매달려 살았지만, 성경과 기독교 신앙에서 모르는 대목이,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충분히 알지 못하는 대목이 여전히 많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한편으로는 답답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즐겁습니다. 확실하게 알지 못하니 답답하고, 공부해야 할 게 많아지니 열정이 솟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에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게 무슨 뜻인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

예수 어록(165) 요 8:14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 2019-07-27
  • 조회 수 1088

예수 어록(165) 요 8:14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예수의 말을 바리새인들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예수 자신의 증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14절부터 다시 긴 연설문이 8장59절까지 계속된다. 아주 길다. 중간에 요한복음 기자의 간략한 콤멘트나 유대인들의 반응이 나오지만, 대부분은 예수의 연설이다. 어떤 이들에게는 연설이라는 표현이 불편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

예수 어록(164) 요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 2019-07-26
  • 조회 수 1590

예수 어록(164) 요 8:12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사실 요 8:1-11절 이야기는 요한복음에 어울리지 않는다. 어떤 사본에는 이 대목이 나오지 않는다. 정확하게는 7:53-8:11이 여기에 해당한다. 우리말 성경과 루터 번역 독일어 성경에는 이 대목이 큰 괄호 안에 들어있다. 쿠어드 아랜드(Kurt Aland) 외 4인이 편집한 헬라어 성경 <THE GREEK NEW TESTMENT>에는 이 대목이 아예 빠졌다. 요 8:12절부터 다시 예수의 연설이라는 요한복음의 특징이 나타난다. 그것도 아주...

예수 어록(163) 요 8: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 2019-07-25
  • 조회 수 1325

예수 어록(163) 요 8:11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간음 현장에서 잡혀 끌려온 이 여자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본문은 자세하게 말하지 않는다. 사창가에서 몸을 파는 여자인지, 불륜을 행한 여자인지, 성폭행을 당한 여자인지, 신전 창기인지 확실하지가 않다. 어떤 경우에도 당시에는 여자에게만 책임이 돌아간다. 성폭행을 당한 경우는 물론 다르게 처리되었다. 이에 관해서 구약성경에 자세하게 나온다. 상대가 유부남인지 총각인지에 따라서 처리가 다르다. 어쨌든지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 어록(162) 요 8:10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2]

  • 2019-07-24
  • 조회 수 1170

예수 어록(162) 요 8:10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의 발언을 들은 이들은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른부터 시작하여 젊은이들까지 모두 그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거기 모였던 군중들이 무지막지한 사람들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상황에서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어느 한두 사람이 배 째라 하는 식으로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면 다른 이들도 따라 하지 않겠는가. 예수는 이 여자에게 당신을 고발하던 이들이 여전히 남아있느냐고 묻는다. 형식은 물...

예수 어록(161) 요 8:7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 2019-07-23
  • 조회 수 1723

8장 예수 어록(161) 요 8:7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요한복음 기자는 니고데모와 다른 유대교 고위층이 예수에 관해서 보인 이견을 잠시 짚은 뒤에 8장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수는 예루살렘 인근 감람산에 잠시 머물렀다가 아침에 다시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와서 사람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감람산에서 밤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성전 당국자들에게 예수는 골칫거리였을 것이다. 유형무형의 압력을 가하는데도 예수는 성전에서의 활동을 접지 않는다. 예수가 성전 중심으로 작동되는 유대교의 개...

주간일지 7월21일

  • 2019-07-22
  • 조회 수 1151

대구샘터교회 주간일지 2019년 7월21일, 성령강림후 여섯째 주일 1) 자기 구원- 저는 설교원고를 200자 35매 분량으로 준비합니다. 설교 현장에서는 가능한 그 원고에 충실합니다. 소위 ‘원고 설교’입니다. 여기에 장단점이 있는데, 단점의 하나는 설교 현장에서 주어지는 영감을 억제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설교에서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는 구절을 읽는 순간에 ‘빼앗기지 않는다.’라는 느낌이 강력하게 다가왔습니다. 그 느낌을 좀서 설명하고 싶었지만, 설교의...

예수 어록(160) 요 7:38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 2019-07-20
  • 조회 수 1676

예수 어록(160) 요 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예수의 발언이 이어진다. 요 7:38절이 가리키는 내용을 정황에 맞게 바꾸면 다음과 같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그 영혼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올 것입니다.’ 초막절은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임시 거처인 초막을 짓고 살았던 역사적 사건을 기리는 절기다. 마실 물과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만으로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던 시절이었다. 초막절에 사람들은 실로암 못에서 물을 길어 제단에 붓는 의식을 행...

예수 어록(159) 요 7:37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 2019-07-19
  • 조회 수 1341

예수 어록(159) 요 7:37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앞으로 예수를 만날 수 없다는 말을 유대인들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요 7:35절에 따르면 그들은 예수가 헬라인들을 가르치려고 헬라 지역으로 간다는 말인가, 하고 생각했다. 당시에 유대 랍비 중에서 외국으로 나가 활동하던 랍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당할 것이라는 사실을 유대인들은 상상할 수 없었으니까 앞으로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는 예수의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는 건 당연하다. 더 궁극적으로 예수가 부활과...

예수 어록(158) 요 7: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 2019-07-18
  • 조회 수 1311

예수 어록(158) 요 7:34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요한복음은 여러 가지 점에서 공관복음과 대비된다. 공관복음에 나오지 않는 긴 연설문이 요한복음에는 여러 대목 나온다. 예수의 정체성에 관한 자기규정이 요한복음에는 흔하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공관복음에는 예수의 행위가 중심이지만 요한복음에는 예수의 말이 중심이다. 그 말도 대체로 관념적이다. 시작부터 예사롭지 않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

예수 어록(157) 요 7:33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1]

  • 2019-07-17
  • 조회 수 1135

예수 어록(157) 요 7:33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는 공개적으로 자기 생각을 거기 모인 군중들에게 전했다. 그 내용은 유대인들의 기분을 언짢게 할 만하다. 예수는 하나님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반면에 유대인들은 모른다는 뜻으로 예수가 발언했기 때문이다. 일부 사람들이 예수를 결박하려고 시도했으나 동조하는 이들이 없어서 실패했다. 대부분은 예수의 말을 듣고 예수에 대해 호의적인 생각을 품게 되었다. 그 사실을 요 7:31절이 이렇게 전한다. “무리 ...

예수 어록(156) 요 7: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5]

  • 2019-07-16
  • 조회 수 1905

예수 어록(156) 요 7:29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유대 당국자와 군중들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는 조건들에 집착했다. 요한복음 기자는 처음부터 그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 예수는 당시 주류에 속하지 못했다. 제사장의 아들도 아니고, 왕족도 아니었다. 넓은 의미에서 다윗의 후손이기는 했으나, 그런 조건만으로 예수가 주류에 포함될 수는 없었다. 예수는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조건이 아니라 더 근원적인 조건에 부합하...

주간일지 7월14일

  • 2019-07-15
  • 조회 수 1481

대구샘터교회 주간일지 2019년 7월14일, 성령강림후 다섯째 주일 1) 죄 용서- 오늘(7월14일) 설교 제목은 ‘아들과 죄 용서’(골 1:3-14)이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죄 용서를 협의로 이해합니다. 자신의 잘못된 생각이나 행동에 대한 용서라고 말입니다. 잘못과 실수는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걸 다시 용서받습니다. 죄를 짓고 용서받고, 다시 죄를 짓고 용서받는 악순환이 일어납니다. 이런 방식으로 그 사람의 인격과 영성은 성장하지 못합니다. 폭행, 거짓말, 분노 등등, 이런 부도덕하고 비인격적인 행동은 하나님으로부터...

예수 어록(155) 요 7:28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 2019-07-13
  • 조회 수 1369

예수 어록(155) 요 7:28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예수 당시에 예수에 관한 의견이 분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 7:25-27절에 따르면 성전에서 드러내놓고 유대 군중들과 논쟁하는 예수를 보고 예루살렘 주민 중에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견을 낸다. 유대교 당국자들이 죽이려고 작심한 예수가 공개적으로 활동하는데도 아무도 이렇다 할 제재를 가하지 못하는 걸 보니 당국자들이 속으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간주하는 ...

예수 어록(154) 요 7: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 2019-07-12
  • 조회 수 1881

예수 어록(154) 요 7:24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외모로 판단하지 말라.’라는 표현은 성경 곳곳에 나온다. 일례로 바울은 외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고후 5:12)이라고 규정했다. 그들은 고린도교회에 와서 자신들이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추천장을 받은 유일한 대표자들이라고 자랑했다. 이는 곧 바울은 권위 있는 추천장이 없으니 바울의 말을 비중 있게 듣지 말라는 뜻이다. 외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특징의 하나는 자신을 기준으로 남을 비난한다는 ...

예수 어록(153) 요 7:23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 2019-07-11
  • 조회 수 1240

예수 어록(153) 요 7:23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 유대인들에게는 할례도 중요했고, 안식일도 중요했다. 두 가지 규정 모두 그들이 하나님과의 약속에 근거를 둔 민족이라는 증거였다. 그들은 이 두 규정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자신들의 삶 자체로 여겼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절대 규범이었다. 문제는 이 두 규범이 상호 충돌한다는 사실이다. 할례받아야 할 날이 안식일이면 어떻게 해야 하나...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