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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침대에 걸터앉아서 간단히 기도드린다. 귀한 잠을 허락해주신 것과 보석 같은 오늘 하루를 선물로 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상투적인 기도이긴 하지만 영혼의 진심을 담으려고 늘 노력한다. 기도 후에 눈을 떠서 방안을 둘러본다. 책상도 그 자리에, 벽시계도 그 자리에, 컴퓨터에 연결되어 있는 스피커도 그 자리에 놓여 있다. 서재이자 침실이며 생활공간인 이층 내 방의 모습이 한편으로 익숙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낯설다. 그 공간 안에서 내가 숨을 쉬고 움직인다는 사실을 놀라워하면서 일어나서 머리맡의 커튼을 열고 마당의 소나무를 본다. 지난 가을에 심은 소나무 다섯 그루가 여전히 그곳에서 세 달 이상 혹한기를 잘 버텨주는 게 대견스럽다. 잠옷을 벗고 평상복으로 갈아입는다. 화장실에 들어갔다 나온다. 슬리퍼를 신는다. 이 모든 일을 세련되게 처리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일정한 공간 안에서 내가 내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것이다. 그때만이 아니라 매 순간이 놀랍다.
오늘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영양소 통 뚜껑을 열면서 이상한 희열을 경험했다. 그 뚜껑은 그냥 돌리면 열리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이 마음대로 열고 먹지 못하게 하기 위한 안전장치로 보이는데, 일단 위에서 적당한 힘을 가하면서 시계 바늘 반대 방향으로 돌려야만 열린다. 뚜껑을 열고 그 안에 손을 넣어서 젤리형태로 된 비타민 결정체 하나를 꺼내서 먹었다. 그 장면은 생각할수록 신기했다. 그 동작을 하고 있는 사람을 로봇이라고 가정해보자. 그것도 내가 만든 로봇이다. 그런 정도로 유려하게 동작할 수 있는 로봇을 만들었다면 그야말로 로봇 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다.
지금 내 책상 위에 많은 사물들이 놓여 있다. 작은 카메라, 엠피쓰리 녹음기, 안경, 몇 권의 책과 책 받침대, 연필, 수첩, 장갑, 그 외에도 각양각색의 사물들이 많다. 나는 그것들을 손으로 집어들 수 있다. 먼저 눈으로 그것을 보고 손을 그쪽으로 옮긴다. 순간적으로 거리가 좁혀진다. 어느 정도나 더 손을 뻗어야 연필을 손에 집을 수 있는지는 내 머리가 판단하다. 연필을 들다가 떨어뜨릴 수도 있지만 그런 실수는 흔하지 않다. 떨어뜨리면 허리를 굽혀서 그걸 다시 들어 올릴 수 있다. 이런 모든 생각과 느낌과 움직임들은 내가 이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실증이다. 나는 여기서 매 순간 동화 속의 요정처럼 일상을 살아가는 셈이다. 존재의 신비에 빠져드니 무엇이 부러우랴. 그러나 악한 영의 시비에 걸려들면 존재의 신비와 그 기쁨을 놓치고 삶이 너무 무거워져서 자신과 남에게 공격적인 언행을 가할 때도 없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기도드릴 뿐이다. 존재의 힘인 성령이여, 나를 도우소서.
존재의 충만, 영혼의 자유, 범사에 감사
이 셋이 서로 상통한다....는
늘상 접하는 익숙한 것들에서 문득 낯섬을 경험하고
낯섬을 넘어 경이로움, 신비감, 거룩한 경외감을 경험하기까지 그 영적 여정의 시발점이 존재의 충만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시선, 그런 영적 감수성을 가진 목사님이 부럽기만합니다. 소천하기 전까지 그 경지에 이를수 있을지... 남의 간증만 듣다가 하직하게 되는건 아닌지..
거룩한 낯섬, 존재의 충만!!
아.. 하나님!
어찌해야 저도 그런 영적 통찰에 이를수 있단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