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5일- 버림과 따름 (3)

조회 수 5652 추천 수 29 2006.05.25 23:39:52
2006년 5월25일 버림과 따름 (3)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막 1:18)

우리의 현실적인 신앙에서 “버림”이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으니까, 이 문제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등지고 십자가 보네!” 유와 같은 복음찬송에서 볼 수 있듯이 무언가를 크게 버린 것처럼 생각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버렸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딱히 내세울게 없을 겁니다. 물론 여기에도 개인 차이가 큽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포기했을 것이며, 어떤 사람은 그런 게 전혀 없기도 하겠지요. 과연 우리는 무엇을, 어느 정도나 버렸을까요?
그냥 쉽게 생각해봅시다.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살아가는데 가장 우선적으로 다가오는 어려움은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일과 헌금을 드리는 일, 그리고 나름으로 교회 조직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그 이외에 신앙의 이름으로 참여하는 사회봉사도 있긴 하지만 이건 그렇게 본질적인 요소는 아닙니다. 일주일에 최소한 한번, 아니면 두세 번을 교회에 나온다는 것은 시간을 포기해야만 가능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매일 새벽 시간과 정기적인 특별 기도회와 모임을 위해서 시간을 내야합니다. 웬만한 정성이 아니면 이런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힘듭니다. 헌금도 역시 마찬가지이겠지요. 웬만큼 신앙생활에 익숙한 사람들은 소위 십일조 헌금을 합니다. 돈을 포기한다는 건 오늘과 같이 자본이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는 이런 시대에서는 웬만한 결기가 아니고 가능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무언가를 조금 더 포기한 사람들은 목사가 되거나 선교사가 되고, 그것도 아니라면 장로가 되겠지요. 그들은 거의 모든 세속의 삶을 포기할 정도로 교회생활에 묶여서 지닙니다. 이런 게 모두 시몬 형제처럼 그물을 버리는 태도와 비슷하다고들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과연 그런가요?
이런 “버림”은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결정적이거나 본질적인 게 아닙니다. 만약 이런 버림이라고 한다면 개신교 목사들보다는 천주교의 신부들이, 더 나아가서 세속과 완전히 결별한 수도사들이 한 수 윗길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일상적인 삶을 포기하는 일은 그렇게 불가능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체면 때문에, 또는 종교적 명예심 때문에도 가능합니다. 이런 버림은 율법의 차원에 불과합니다. 도덕적인 가치로서는 그런대로 괜찮지만 신앙의 본질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버림”은 무엇일까요?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를 버리는 게 핵심입니다. 이 말은 곧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게 가장 힘들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 이게 가장 힘든지에 대해서 제가 여기서 일일이 언급할 필요가 없겠지요. 아마 저를 포함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포기하지 못할 겁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합니다. 돈이나 시간이나, 심지어 명예까지 포기할 수는 있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자아를 포기하지는 못합니다. 저는 아직 그런 분을 못 보았습니다. 그런 장로도, 목사도 못 보았습니다. 물론 저도 똑같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은 아예 불가능한 건지 모르겠군요. 이런 불가능한 일은 베드로 같은 사도 정도의 영적 경지에 들어간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걸까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지 이것만은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자기 자신을 버릴 능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버리지 못한 채 돈 몇 푼, 시간 몇 조각을 바쳤다는 이유로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받겠다는 심보는 놀부와 같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포기한 게 없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게 정직한 게 아닐는지요.
조금 강하게 말씀드리는 걸 용서하십시오. 주님을 위해서 억지로 헌금하거나 시간을 내지 마십시오. 교회 중직이라는 체면 때문에 그런 일들을 하지 마십시오. 그런 행위는 우리의 영성을 파괴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행위들이 우리를 바리새인들처럼 자기의 업적에 의존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자기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한 세리처럼 주님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게 그의 영혼에 훨씬 바람직합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무언가를 버린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버리지 않은 사람이 있고, 겉으로는 아무 것도 버린 것이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서 자기가 무엇을 버린 것 같은 생각과 그런 말들은 아예 꺼내지 맙시다. 그 판단은 마지막 심판 때 주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이런 기도를 드립시다.

키리에 엘레이송! 아멘.

[레벨:7]늘오늘

2006.05.26 06:11:24

버리려 애쓰지 않아도…
빛과 물과 시선의 만남이 빚어낸 무지개,

[레벨:4]이동주

2006.05.27 15:13:26

정목사님이 전에 말씀하셨듯이 해석학적 순환으로 (부분은 전체의 빛 안에서 ,전체는 다시 부분의 그림자의 총합으로)성서를 대하는게 균형있는 자세라 여겨집니다 사실 저도 "버림과 따름"에서 많은 혼란을 겪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버림을 끊임없이 강조(요구)하다 보니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놓칠때가 많았죠
물론 버림과 따름의 양자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무엇을 우리 신앙의 본질로 놓느냐 하는 문제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만의 경우를 놓고 보더라도 집(한국)떠나온지 만3년이나 되고 예수님을 잘 믿어 볼려고 얼마나 많은 시간과 물질 가정의 일을 뒤로 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기 위해 집,형제 자매,부모와 자녀, 자기의 터전등을 뒤로 합니다 아마 오늘도 세계각국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 예수를 따르려고 하는 무리들이 이 버린다는 현실앞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겠지요

한국어 성경(개역 표준 새번역 공동번역등)이나 NIV성경에는 예수님의 부르심과 그에 따른 제자들의 반응 장면을 거의 일관되게 "버리다(left)"라는 단어로 진술하고 있습니다 제가 찾아 본 중국어 성경이나 일본어 성경등도 예외는 아닙니다 헬라어 성경이든 독일어 성경이든 버리다 자체에 각 나라마다 어떤 심오한 뜻이 따로 있지는 않는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것을 말씀하시는 장면에서 중국어나 일본어 성경은 부인하다를 捨(버리다)라는 단어로 똑같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버리는것과 자기를 부인하는 것을 같이 보는 것 입니다 또한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자기를 드리겠다고 할 때도 역시 동일하게 버린다는 뜻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런 언어상의 해석이 아니더라도 결국 버림의 심층으로 들어가면 어떤 외관상의 눈에 보이는 차원을 넘어서서 예수를 따라야 할 바로 자가자신이 버려져야 할 대상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말이 그렇지 자신을 버린다는게, 포기한다는게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저 자신을 보아도 그렇고 주변의 그리스도인 심지어는 타종교인들(수행을 많이 했다는 고승들을 포함해서)마저 과연 이 경지를 넘어섰는지는 의문입니다 우리들에게 과연 버릴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는 더더구나 의문이구요 김인범 목사님이 언급하신 인간의 한계상황이 아닌지 모르겠네요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출발보다는 예수로부터의 출발, 예수중심에서의 방향잡기가 곧 따름이요 버림이 아닐는지요
이런 면에서 우리 기독교의 본질 내지는 핵심은 여전히 예수 중심이겠지요 우리가 따라야 할 예수. 이분이 과연 누구인지 집중할 때 성서 기자가 표현하는 존재론적 변화의 산물인 버림의 결단이 나오겠네요
금요일마다 이곳 대만 신학교에서 채플이 있는데 지난번의 어느 강사도 예수를 따르는것 자체를 철저히 묻기 보다는 지나치게 버린다는 일에 집착해서 설교하는 바람에 저는 솔직히 복음과 율법이 무엇인지 되묻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혹 예수를 전혀 모르고도 율법적인 차원에서만 설교한들 그래서 우리의 버리지 못한 영역들에 대해 끊임없이 자백과 결단을 요구하는 설교인들 누군들 못하겠습니까만 ....

오늘 또 다시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접하고 보니 따르고 있는 나보다는 따라야 할 예수에게 전부를 거는 무게중심의 이동이 필요하네요 정 목사님의 귀한 묵상나눔 가운데 가닥을 잡아 나가니 감사합니다 김 목사님의 글에서도 예수님께 집중하는 힘이 느껴져 귀한 은혜를 받습니다 다시 감사드립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6.05.27 23:48:42

이동주 님,
찬찬하고, 깊이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의 근본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우리가 이 땅에서의 삶이 끝날 때까지
붙들고 있어야 할 화두 같네요.
갈 데까지 한번 가보죠.
도반이 되는 길이라면 더욱 좋구요.
좋은 주일이...

[레벨:18]은나라

2016.11.08 00:37:09

그동안 버리는 삶에 신앙의 중심을 두었는데..

목사님의 묵상글을 통해 다시 한번 신앙의 중심에 내 결단이나 결심이 깃든 버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고, 그분께 집중했을때 버림과 부인의 삶이 가능함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떤분임을 알게 되면, 그분을 신뢰하게 되고, 그러면 내가 노력하지 않아도 내 삶의 방식이나 방향이 내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바뀌어 질테니.. 묵상 말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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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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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는 우리는 성실할 수가 없다. 우리는 이것을 신 앞에서 인식한다. 신 자신이 우리를 강요하여 이런 인식을 하게 한다. 이렇게 성인이 된 세상은 우리로 신 앞에 있는 우리의 상태를 바로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신은 우리들이 신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자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신은 우리를 버리는 신이다.(막 15:34) 신이라는 작업가설 없이 우리를 이 세계에 살게 하는 신은 우리가 항상 그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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