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믿음

조회 수 4773 추천 수 0 2013.11.05 22:50:33

11월5일(화)

 

지난 설교 마지막 단락에서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예수의 믿음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고 말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설교 제목에 따르면

당연히 우리의 믿음이 강조되어야 하지만

결론적으로는 예수의 믿음이 강조되었다.

 

기독교 신앙에서 기독교인 각자의 믿음은 물론 중요하다.

각 개인의 믿음을 통해서 의롭다 인정받는다는 사실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 믿음이라는 게 간단한 게 아니다.

이 세상적적인 원리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그것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어둔 시간을 견뎌내기는 불가능하다.

믿음의 근처에 이른 사람들은 있을지 몰라도

실제로 믿음의 중심에 들어간 사람은 없다.

 

예수는 하나님과 본질이 동일한 분이기 때문에

그에게만 궁극적인 차원에서 믿음이 가능하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너무 신성으로만 접근하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을 믿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예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실존 안에서 살았다.

회의, 불안, 절망감이 우리와 똑같이 그에게도 있었다.

그가 미래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런 점에서는 그의 믿음도 우리와 똑같이 한계가 있었지만

어떤 결정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그의 믿음은 우리와 질적으로 다른 것이 되었다.

그에게 일어난 부활 사건이 그것이다.

그 부활의 능력 안에서 그의 믿음은 생명과 직결된다.

 

설명이 좀 복잡하게 되었다.

이렇게 정리해야겠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감에 빠진 적이 있었으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줄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었다는 뜻이다.

그의 믿음으로 이제 온 인류는 생명을 얻게 되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를 믿는 것이다.

 

이게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다.

전통적으로 생각하던 믿음과 다를 게 없다고 말이다.

거기에 분명한 차이가 있다.

기독교인들은 겉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믿음을 믿는다.

자기가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그 사실에 떨어지고 만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가 누군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무조건 믿기만 하면 된다.

오늘 교회 현장에서는

믿음조차도 자기 의(義)로 떨어졌기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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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길위의벗

2013.11.07 00:03:42

어떤 분들은 로마서 3장 22절 등에 나오는 'πιστεως ιησου χριστου' 를,
마르틴 루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라고 번역한 것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혹은 신실함)으로써' 라고 번역하는 것이
원어 용례상 옳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목사님의 묵상 글과 같은 결론을 맺고 있어서 신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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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3.11.07 10:34:24

재미있는 관점이군요.
말, 언어라는 게 그 안에 미묘한 늬앙스가 숨어 있어서
전체적인 맥락과 늘 연결해서 해석해내야 할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레벨:18]부스러기 은혜

2013.11.07 11:15:12

목사님께선 우리의 믿음과 예수님의 믿음의 본질적인 차이가 부활이라고 하셨지요
비교의 시공간적 전제가 이생에서의 믿음이 아닌가요?
부활은 여기서 우리가 죽기전까지 가진 믿음
즉 하나님이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온전한 믿음에 내 운명을 맡긴 것에 대한 결과로 주어지는것 아닌가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그 분이 하나님께 보여드린 그 믿음의 결과로
주어진것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이 땅에서 "우리와 예수님이 가지신 믿음으로 비교를 해주셔야함이 맞는게 아닐까 해서요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설교를 기회로
이번에 " 믿음의 본질"을 확실히 각성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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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13.11.07 22:58:59

부스러기 님,
질문 자체가 답을 주고 있습니다.
배운다는 건 질문한다는 거와 똑같은 의미이니
지금 부스러기 님은 저의 대답을 굳이 듣지 않아도
이미 그 어떤 신학적인 세계 안으로 들어간 겁니다.
예수님의 믿음과 부활,
우리의 믿음과 예수님의 믿음... 좀 복잡하지요?
이런 문제들은 다른 것들과 유기적으로 관계가 있어요.
예컨대 하나님 나라 개념을 정확하게 파악해야만
예수님의 믿음이 무언지를 알 수 있겠지요.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존재론에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구요.
어쨌든지 이렇게만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예수님의 믿음과 우리의 믿음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분과 우리 사이에는 존재론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그 차이를 좁힐 수가 없는 거지요.
그 존재론적 차이를 가리키는 것이 부활이라고 할 수 있어요.
부활은 곧 예수님이 하나님의 생명과 일치된 사건입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그것이 일어나지 않았지요.
약속으로 주어졌을 뿐입니다.

[레벨:18]르네상스

2013.11.07 12:28:19

어떤 분은  한국교회의 '믿음주의'를 지적하시면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문장에서 중요한 단어가
'믿음'이 아니라 '예수'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

즉, 믿음 그 자체가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게 아니라
'예수'에게 구원의 능력이 있다는 뜻이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또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것이지
'우리의 믿음' 그 자체는 우리를 구원하는 능력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한국교회는 '유난히' 믿음을 강조하는데
목사님 말씀대로 그 믿음 자체가 '자기 의'가 되어버렸습니다.

한국교회가 종교다원주의를 많이 비판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보다 '믿음'을 훨씬 더 많이 강조하는
한국교회가 오히려 종교다원주의에 가깝다고 지적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인즉슨, 예수보다 믿음을 더 강조하면
무엇이든 '열심히 믿기만 하면 된다'는 논리가 되어버린다는 말씀이죠.

믿음의 대상과 내용보다
믿는 자의 '열심'과 '열정'을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생각하는 오류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믿는 그 예수 그리스도가 도대체 어떤 분이신가?'에
별로 깊은 관심이 없어 보이는군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13.11.07 23:00:47

그렇습니다.
주관적 믿음을 절대화하는 태도를 조심해야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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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중서간(10)- 비종교화(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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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우상숭배 [2]

  • 2013-09-21
  • 조회 수 4594

9월21일(토) 내일 설교는 9월 첫 주일에 이어서 예레미야서가 본문이다. 누란의 위기에 처한 조국의 운명 앞에서 그는 슬픔을 억제하지 못한다. 목전에 처한 조국의 패망 원인이 우상숭배라는 그의 주장은 과연 옳은가? 이 문제를 풀어가려면 선지자들의 독특한 영적 통찰력이 무엇인지, 우상숭배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낱말풀이로 해결되는 게 아니다. 근원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의 창조와 인간의 죽음과 인간 문명과 그것의 속성들이 다 연루되어 있다. 설교 시간에 이런 문제들을 시시콜콜 해명할 수는 없다...

6월8일 예수의 형제들

  • 2007-06-08
  • 조회 수 4593

2007년 6월8일 예수의 형제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막 6:3) 본문이 나열하고 있는 예수의 가족에서 아버지 요셉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게 조금 이상합니다. 그가 일찍 죽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대목만이 아니라 복음서는 전반적으로 요셉에 대해서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님 탄생설화에 잠간 등장하고 맙니다. 복음서 이외의 다른 신약성서는 요셉에 관해서 더 철저하...

2월15일 등경 위의 등불 [6]

  • 2007-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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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15일 등경 위의 등불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막 4:21)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21-25절에 나오는 두 개의 말씀은 원래 이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니라 편집자가 이곳에 삽입한 것이라고 합니다. 1-20절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이고, 26-3절은 자라나는 씨의 비유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간에 등불과 헤아림이라는 말씀이 들어갔습니다. 신학비평 문제는 우리의 묵상에 별로 중요하지 않으니까 더 이상 이야기하지 맙시다. 오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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