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2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1)

조회 수 2467 추천 수 7 2007.11.21 23:26:33
2007년 11월22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1)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예수님이 물위를 걸은 이 사건 앞에서 보인 제자들이 모습에 대해서 마가복음 기자는 비판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앞서 일어났던 오병이어 사건에 나타난 예수님의 메시아적 능력을 깨닫지 못했다고, 결국 마음이 둔해진 것이라도 말입니다.
이런 보도를 읽는 오늘 우리는 제자들을 이상한 사람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직전에 오병이어를 경험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호수에서의 사건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며칠 전의 묵상에도 암시되었지만, 이런 사건들은 시간이 상당히 흐른 다음에 제자들의 기억에 의해서 재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오병이어도 그것이 일어난 바로 그 순간에는 아주 평범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제자들은 그 순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잘 몰랐다는 말씀입니다. 호수 사건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부활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올림을 받은 후에 이 호수 사건을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구약사건도 이와 비슷합니다. 출애굽, 홍해, 광야의 만나, 불기둥과 구름기둥, 여리고 함락 등등,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수많은 증거들이 구약성서에 보도되고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주 쉽게 하나님을 배신하고 바알을 섬기곤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믿음이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그 놀라운 사건들도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대수롭지 않게 보였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것은 사람에게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습니다.
아마 오늘도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나는 그런 큰일을, 즉 오병이어와 물위를 걷는 사건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그만큼 우리가 영적으로 민감하지 못하다는 뜻이겠지요.

profile

[레벨:23]모래알

2007.11.22 00:50:15

대체 어찌하여야 영적인 민감성을 가질 수 있을까요?.
어찌하면 그 깊이와 그 높이와 그 넓이에 닿을 수 있을까요?
파도일까요? 바람일까요? 아니면...
profile

[레벨:13]바다지기

2007.11.22 06:21:24

마음이 둔하여진 사람,
영적인 민감함이 사라져 버린 사람,
영적인 예민함이 전혀 없는 사람,
늘 망각하고 사는 사람,
그를 알고 있답니다.

[레벨:0]청구

2007.11.22 09:36:00

영육간의 일용할 양식은 그리스도의 몸인 제물로서 매일 먹어야하고 먹는 생명나무의 열매입니다.

나무는 그 열매가 썩어 싹이 터 뿌리를 내리고 싹이 돗고 줄기가 되어 계속 자라면서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니 눈에 보이는 육적인 측면 에서 보는 나무는 땅으로부터 물과 영양을 공급 받고
하늘의 태양으로 부터 빛을 받으며 존재하는 모든 각종 생명체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일체의 모든 것
을 공급하는 식물입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영적인 측면에서 보는 나무는 땅과 하늘 사이 물가운데 창조된 궁창에 존재하니 땅
의 성질인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뿌리하며 또 한편으로는 하늘의 성질인 의와 평강과 희락에 뿌리를
두고 생육하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나무는 땅의 기운으로 형상과 모양을 형성하며 하늘의 생기로 숨을 쉬며 자라갑니다.
사람이 흙으로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을 받고 생기를 코에 불어 너어 살아있는 존재가 되였
으니 나무와 사람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이 먹는 식물인 나무의 뿌리와 줄기와 잎과 꽃과 열매는 사람에게 영육간에 필요한 일용할 양식
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니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따라서 형상과 모양에 초점을 두면 선과 악을 알게하는 선악나무가 되는것이며 생명을 공급하는 생기
에 초점을 두면 생명나무가 되는것입니다. 이것이 에덴동산 중앙에 있는 두 나무입니다.
현실적으로 에덴동산 밖에있는 오늘 우리 앞에는 믿음의 조상 아부라함을 인도한 목적지인 가나안 세
겜에있는 축복의 상수리나무와 다윗의 아들로 아버지에게 반기를든 압살롬의 상투를 잡아 죽게한 저
주의 상수리나무로 축복과 저주의 양면성을 지닌 상수리나무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형상과 모양만을 인식하는 육의 눈으로 보는 십자가는 나를 저주로 인도하나 보이지 않는 생기를 인
식하는 영의 눈으로 보는 십자가는 나를 축복으로 인도합니다.
악령은 무거운 멍에인 저주의 십자가를 지게하나 성령은 가벼운 멍에인 축복의 십자가를 지게합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고집하며 혈통과 육정과 사람의 뜻으로 지는 십자가는 저주로서 영벌에 들어간 자
색 옷 입은 어리석은 부자와 함께 하게하나 의와 평강과 희락인 공의 화합 관용의 하늘의 뜻으로 지는
십자가는 축복으로서 영생하는 안식에 들어간 지혜로운 거지 나사로와 함께 하게합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왼편강도는 음부로 들어 갔으며 오른편 강도는 낙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음부에 들어간 왼편 강도는 나무의 은혜에 대하여 무지함으로 그 은혜를
망각하여 신발에 따라오는 먼지와 같은 땅의 복을 구하면서 매사에 불평으로 살든 자입니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낙원에 들어간 오른편 강도는 나무에 대하여 은혜를 아는 지혜로 말미암
아 무지개에 실려 오는 보배로운 하늘의 복을 구하면서 범사에 감사로 살든 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먹고 마셔야할 영의 양식은 눈에 보이는 나무가 아니라 우리를 대신하여 제
물이 되어 나무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 그 분의 몸이요 보혈인 십자가에서 흐르는 눈물과 땀과 거룩
한 피입니다.
무지개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흐르는 언약의 눈물은 그분의 몸인 마음 안에 땀은 그분의 머리인 생각
안에 피는 그분의 심장인 그분의 뜻 안에서 솟아나는 생명수입니다.
그 분의 마음을 구하기 위하여 묵상으로 성전에 들어가며 그 분의 생각을 찾기 위하여 기도로 성소에
들어가며 그분의 뜻과 함께하기 위하여 찬양으로 지성소에 들어갑니다. (시편 100편)


무지개 십자가 보혈에 대한 감사의 시

물로 떡을 빚고
바람으로 물고기를 잡아
불에 구워 먹이시니
천지간에 이보다 좋은 맛이 또 있으랴

물은 믿음으로 의에 이르는 길이요
바람은 소망으로 평강에 이르는 진리며
불은 사랑으로 희락에 이르는 생명이니
이 모두가 한 빛으로 나아오니라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사
주께서 번개같이 임하시니
그 앞에는 사랑의 불이 삼키고
그 사방에는 은혜의 광풍이 부는 도다.
profile

[레벨:32]자유의꿈

2007.11.22 10:34:30

가진 것을 나눌 때 풍성하게 채우시는 오병이어 사건,
삶의 어려움 가운데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것으로 채우시는 만나 사건,
갈길 몰라 헤메고 있을 때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불기둥 사건,
그리고 두려움 가운데 있을 때 예수님을 만나 평안해지는 물위를 걸으시는 사건 등
지금 우리에게 베푸시는 수많은 은총에 영적으로 민감하고 망각하지 않게 하소서...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sort 조회 수

12월6일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3) [3]

  • 2007-12-05
  • 조회 수 1793

2007년 12월6일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3)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막 7:1)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더 정확하게는 그들을 파송한 예루살렘의 유대교 수뇌부가 왜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까요? 이런 문제를 꼼꼼히 살피려면 그 당시의 종교와 정치상황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런 짧은 묵상에서는 그렇게 긴 호흡으로 생각을 나눌 수는 없겠지요. 간략하게 진도를 나가더라도 양해를 바랍니다. 예수님이 유대교와 충돌했다는 것이 위의...

12월5일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2) [1]

  • 2007-12-04
  • 조회 수 1605

2007년 12월4일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2)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막 7:1) 어제 저는 마가복음이 기록되던 시기의 교회가 바리새파에게 가졌던 적대감이 마가복음의 진술에도 영향을 끼쳤을지 모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마가복음 기자가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닙니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는 못했습니다. 한쪽에서 아무리 선의로 대하더라도 다른 쪽에서 시비를 걸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

12월4일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1)

  • 2007-12-03
  • 조회 수 1764

2007년 12월4일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막 7:1) 오병이어와 호수에서의 사건을 급한 필치로 보도한 후 한 호흡 쉬어가듯이 예수님의 활동을 스케치한(6:53-56) 마가복음 기자는 이제 7장에서 다시 논쟁적인 구조로 글쓰기의 속도를 낸다. 그 시작은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내려온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등장이다. 복음서기자가 묘사하고 있는 바리새인은 악명이 높다. 교만하고 음흉하고 비판적이고 논쟁적이며, 또한 비굴하기까지 하다. 서기관들도 역시 비...

12월3일 치유의 능력(3)

  • 2007-12-02
  • 조회 수 1718

2007년 12월3일 치유의 능력(3)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막 6:56) 신앙의 걸음걸이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저의 말을 오해하지는 마세요. 제가 이미 장성한 사람처럼 마음대로 걷고 달릴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어느 정도 신앙의 깊이로 들어간 것처럼 느끼는 순간에 느닷없이 유치한 생각에 빠지기도 하고, 어리석은 행동도 합니다. 영적으로 깊은 경지에 들어...

12월2일 치유의 능력(2) [4]

  • 2007-12-01
  • 조회 수 1724

2007년 12월2일 치유의 능력(2)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막 6:56) 저는 어제 전인적 치유가 곧 영적 치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영’ 혹은 ‘영적’이라는 말은 교회에서 아주 흔하게 사용됩니다. “박 아무개 집사님은 영적인 분이야.”라거나 기도를 많이 하는 분들의 행위를 영적이라고 표현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영이라는 단어를 자주 사용한다는 사실이 그 단어를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

12월1일 치유의 능력(1) [1]

  • 2007-11-30
  • 조회 수 1559

2007년 12월1일 치유의 능력(1) 아무 데나 예수께서 들어가시는 지방이나 도시나 마음에서 병자를 시장에 두고 예수께 그의 옷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성함을 얻으니라. (막 6:56) 사도행전 5:15절에도 오늘 본문과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침대와 요 위에 누인 병자를 예루살렘 거리로 데리고 나와 베드로가 지날 때 그의 그림자라도 덮이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이런 보도를 단지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사도들이 예수님보다 훨씬 더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유한 셈입니다. 마가복음에서 병자들은...

11월30일 병든 자들

  • 2007-11-30
  • 조회 수 1577

2007년 11월30일 병든 자들 그 온 지방으로 달려 돌아다니며 예수께서 어디 계시다는 말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째로 메고 나아오니(막 6:55) 사람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는 대로 병든 자를 침상 채로 들고 왔다고 합니다. 침상 채로 들고 왔다는 말은 병자들의 병이 아주 깊었다는 뜻이겠지요. 난치병, 불치병을 안고 산다는 건 오늘처럼 의학이 발달한 시대에도 벅찬 일인데, 2천 년 전이야 오죽했겠습니까? 복음서에 예수님의 치병 이야기가 왜 그렇게 많은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또는 반대로 예수님이 병자...

11월29일 게네사렛 땅에서 [1]

  • 2007-11-28
  • 조회 수 3072

2007년 11월29일 게네사렛 땅에서 건너가 게네사렛 땅에 이르러 대고 배에서 내리니 사람들이 곧 예수신 줄을 알고(막 6:53,54) 풍랑으로 고생하던 제자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풍랑이 그친 뒤 게네사렛 호수 서안의 게네사렛 지역에 배를 대고 배에서 내렸습니다. 팔레스틴의 북쪽 지역을 크게 갈릴리라고 하는데, 오른편에 큼지막한 호수가 있습니다. 그 호수를 갈릴리 호수, 또는 게네사렛 호수라고 합니다. 그 호수가 없었다면 팔레스틴 문명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게네사렛 호수에서 발원해서 남쪽 사해에 이르는 강을 요단강이라고 합...

11월28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7)

  • 2007-11-27
  • 조회 수 1463

2007년 11월28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7)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어제 묵상의 마지막 대목에 나온 ‘구원의 현실’이라는 말을 보충해서 설명해야겠군요. 구원이면 구원이지 구원의 현실이 뭐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네요.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만, 구원의 문제를 더 엄밀하게 규정하려면 이런 언어 조합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현실(reality of God)이라는 말도 역시 똑같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분하기는 하지만 그 하나님을 더 엄밀하게 규정하기 위해서 하...

11월27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6) [2]

  • 2007-11-26
  • 조회 수 1963

2007년 11월27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6)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제자들의 “마음이 둔하여졌다.”는 마가복음 기자의 진술은 아마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일어난 신앙적 위기를 내포하는 게 아닐는지요. 2천 년 전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어려운 일들이 많았습니다. 사도행전만 보면 복음이 일사천리로 전파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교회가 계속 유지되지 못할 수도 있는 위기가 계속되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예수님의 재림이 지연되고 있...

11월26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5) [3]

  • 2007-11-25
  • 조회 수 1685

2007년 11월26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5)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우리는 어떻게 자기염려, 자기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마음의 경직을 피할 수 있을까요? 이런 문제는 사실 기독교보다는 불교의 가르침이 더 세밀합니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거든요. 그들에게 집착을 없애는 것, 즉 멸집(滅執)이 가장 핵심적인 공부입니다. 멸집에 이르는 깨우침을 돈오(頓悟)라고 하는데,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멸도(滅道:집착에서 벗어나려는 수행)를 행합니...

11월25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4)

  • 2007-11-24
  • 조회 수 2016

2007년 11월25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4)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여러분들은 어떤 순간에 마음이 둔해지시나요? 제 경우를 말한다면 나 자신에게 집착하는 순간이 바로 그렇습니다. 나 자신에게 집착한다는 것은 곧 나에 대한 염려입니다. 염려하지 않는다면 집착할 필요가 없겠지요. 자신을 염려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둔해지면서 글쓰기나 설교 중에서 집중력이 흐트러집니다. 나에 대한 염려가 결국은 나를 파괴하는 지름길인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일 일을 ...

11월24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3) [4]

  • 2007-11-23
  • 조회 수 1671

2007년 11월24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3)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성서해석이 하나님 경험에 이르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가장 바람직한 길의 하나라는 말은 곧 언어가 담지하고 있는 존재론적 능력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성서라는 언어의 세계를 최대한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전제되어야 할 사실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결코 완벽한 해석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할 ...

11월23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2) [2]

  • 2007-11-22
  • 조회 수 1533

2007년 11월23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2)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제자들의 마음이 둔하여진 이유는 오병이어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병이어는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의 표징인데, 그것은 곧 하나님 경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의 온갖 걱정거리로 둔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둔해진 마음은 현재 하나님의 통치를 민감하게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시나브로 악순...

11월22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1) [4]

  • 2007-11-21
  • 조회 수 2467

2007년 11월22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1)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예수님이 물위를 걸은 이 사건 앞에서 보인 제자들이 모습에 대해서 마가복음 기자는 비판적으로 묘사했습니다. 그들이 바로 앞서 일어났던 오병이어 사건에 나타난 예수님의 메시아적 능력을 깨닫지 못했다고, 결국 마음이 둔해진 것이라도 말입니다. 이런 보도를 읽는 오늘 우리는 제자들을 이상한 사람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바로 직전에 오병이어를 경험했는데도 불구하고 이 호수에서의 사건을 ...

11월21일 바람이 그치다.(4) [6]

  • 2007-11-20
  • 조회 수 1741

2007년 11월21일 바람이 그치다.(4)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막 6:51)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삶을 가로막는 바람인지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살이의 구체적인 어려움을 가리킬까요? 물론 그런 것들은 평범한 우리가 감당하기가 어려운 짐들입니다. 그런 문제들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그런 구체적인 어려움들이 해결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앞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

11월20일 바람이 그치다.(3) [3]

  • 2007-11-19
  • 조회 수 1870

2007년 11월20일 바람이 그치다.(3)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막 6:51) 오늘 우리는 바람이 그쳤다는 이 진술의 신앙적 의미를 짚으려고 합니다. 일종의 적용입니다. 성서읽기에서 적용은 독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대로 언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만, 그래도 가끔은 한 두 마디를 해도 좋겠지요. 묵상에서 삶의 현실들을 찾고 싶어 하는 분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가 봅시다. 호수 위에서 바람과 싸우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와 꼭 닮은 것 같습니다. 호수 건너편으...

11월19일 바람이 그치다.(2) [2]

  • 2007-11-18
  • 조회 수 1834

2007년 11월19일 바람이 그치다.(2)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막 6:51) 어제 묵상에서 저는 제자들의 기억에 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의 기억은 진리가 드러나는 길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기억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완전히 망각했다고 생각되는 것도 우연하게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우리의 일상에도 그런 경험은 자주 일어납니다. 커피를 마시다가 실수로 커피 잔을 놓쳐 깨뜨리는 순간에 완전히 잊고 있던 십년 전의 어떤 사건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11월18일 바람이 그치다.(1) [1]

  • 2007-11-17
  • 조회 수 1875

2007년 11월18일 바람이 그치다.(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막 6:51) 예수님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고 합니다. 복음서 기자는 이 대목에서 제자들이 놀랐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합니다. 제자들은 이미 49절에서 예수님을 유령인가 해서 소리를 지른 적이 있고, 50절에서 그 예수를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가 그 사실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놀람의 문제는 며칠 전의 묵상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 상황은...

11월17일 두려워 말라.(2) [8]

  • 2007-11-16
  • 조회 수 1595

2007년 11월17일 두려워 말라.(2)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막 6:50)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이 있습니다. 작게는 일신에 관한 두려움입니다. 불치병에 걸리지 않을까, 사업이 망하지 않을까, 또는 자식이 공부를 못할까 두려워합니다. 조금 더 심각하게는 삶의 허무로 두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는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취로 우리의 삶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