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4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3)

조회 수 1672 추천 수 7 2007.11.23 23:52:18
2007년 11월24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3)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성서해석이 하나님 경험에 이르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가장 바람직한 길의 하나라는 말은 곧 언어가 담지하고 있는 존재론적 능력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성서라는 언어의 세계를 최대한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전제되어야 할 사실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결코 완벽한 해석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일 뿐이지요.
오늘 신자들이 성서를 대할 때 벌어지는 가장 결정적인 한계는 성서가 말하게 하지 않고 성서를 이용하기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저는 언젠가 ‘성서 도구주의’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가위가 헝겊을 자르는데 도구로 사용되듯이 성서가 우리의 신앙을 도모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거 옳은 말이 아닌가, 우리의 신앙을 돈독히 하기 위해서 성서를 읽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분들이 많을 겁니다. 그건 착각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위해서 성서가 사용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성서 안으로 들어가는 것만이 필요합니다.
이런 저의 말이 별로 실감 있게 들리지 않을 것 같군요.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신앙이 이미 규범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성서를 굳어진 체계로만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전자는 신앙에 대한 오해이고, 후자는 성서에 대한 오해인데, 서로 연관되는 문제입니다.
오병이어에 담긴 메시아적 징표를 기억하지 못한 제자들의 마음이 굳어졌다는 이 진술이 과연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셨나요? 이 진술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모습을 읽을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영적인 깊이가 충분하다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만, 영성이 얄팍하다면 한 두 마디로 끝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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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3]모래알

2007.11.24 00:10:45

문득 "말씀의 도구" "축복의 도구" 라고 흔히 쓰이는 말들이 생각납니다.
말씀 가운데 살아계시는 하나님 경험에 좀 더 집중하겠습니다.

참.. 며칠 전 묵상에서 .. 많은 질문들에 대한 정답들을 목사님께 기대한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하루??) 되십시요.

[레벨:5]희락당

2007.11.24 04:58:30

김용준 선생님이 쓰신 "과학과 종교 사이에서"라는 책을 읽었는데, 208쪽에 있는 이 구절이 마음에 자리잡았습니다. "오늘이라는 이 역사적 시점에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다가오는 메시지는 '구원의 종교'로부터 '창조의 종교'로의 패러다임 이행이라는 사실이다." 이 패러다임의 이행은 뉴턴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은데요.. 성서해석은 이 패러다임 이행에 대해서 무엇을 이야기 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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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7.11.24 10:17:53

희락당 님,
김용준 선생님의 글은 과학의 전문성과 진보적 신앙이 어우러져 있어서
여러모로 도움이 많이 됩니다.
위에서 인용한 글만으로는 조금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구원의 종교나 창조의 종교나 똑같은 뜻이기 때문에
여기서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나야 한다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구원이 창조이며, 창조가 구원이잖아요.
물론 이 분이 말하는 구원이 이원론적인 기존의 잘못된 구원관을 전제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긴 합니다.
어쨌거나 성서해석을 그런 과학이 말하는 패러다임 문제와 연결시켜서 생각하려면
많은 논의가 필요하겠구뇽.
굳이 위의 인용문과만 연결해서 본다면
교회론적 해석학으로부터 종말론적 해석학으로의 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레벨:8]流水不爭先

2007.11.27 13:40:05

목사님
한마디로 요약할 수는 없겠지만서도
성서를 굳어진 체계로 이해한다는 것에 대한 이해가 어렵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문자주의나 원리주의
또는 성경은 이런것이다라고 결정짓는 류를 의미하는 것인지요
굳어진 쳬계라는 표현을 묵상하면서
성경을 향하여 열린마음을 가지라는 목사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굳어진이라는 표현과 반대되는 말은 말랑말랑하다는 표현인데
이말과 자유함이라는 말과 비슷한 감으로 해석해도 되는지요
묵상할 수록 무언가 있는것 같은데 막상 표현하자니 잘 안됩니다.
며칠을 묵상하다가 여쭈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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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25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4)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여러분들은 어떤 순간에 마음이 둔해지시나요? 제 경우를 말한다면 나 자신에게 집착하는 순간이 바로 그렇습니다. 나 자신에게 집착한다는 것은 곧 나에 대한 염려입니다. 염려하지 않는다면 집착할 필요가 없겠지요. 자신을 염려하기 시작하면 마음이 둔해지면서 글쓰기나 설교 중에서 집중력이 흐트러집니다. 나에 대한 염려가 결국은 나를 파괴하는 지름길인 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일 일을 ...

11월24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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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24일 마음이 둔하여 질 때(3) 이는 그들이 그 떡 떼시던 일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그 마음이 둔하여졌음이러라.(막 6:52) 성서해석이 하나님 경험에 이르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가장 바람직한 길의 하나라는 말은 곧 언어가 담지하고 있는 존재론적 능력을 가리킵니다. 우리가 성서라는 언어의 세계를 최대한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전제되어야 할 사실은 종말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결코 완벽한 해석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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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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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21일 바람이 그치다.(4)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막 6:51) 우리는 무엇이 우리의 삶을 가로막는 바람인지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인생살이의 구체적인 어려움을 가리킬까요? 물론 그런 것들은 평범한 우리가 감당하기가 어려운 짐들입니다. 그런 문제들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고 생각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그런 구체적인 어려움들이 해결된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앞으로 나가는 게 아니라는 것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

11월20일 바람이 그치다.(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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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20일 바람이 그치다.(3)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막 6:51) 오늘 우리는 바람이 그쳤다는 이 진술의 신앙적 의미를 짚으려고 합니다. 일종의 적용입니다. 성서읽기에서 적용은 독자들의 몫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능한대로 언급하지 않으려고 합니다만, 그래도 가끔은 한 두 마디를 해도 좋겠지요. 묵상에서 삶의 현실들을 찾고 싶어 하는 분들을 위해서 말입니다. 가 봅시다. 호수 위에서 바람과 싸우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은 우리와 꼭 닮은 것 같습니다. 호수 건너편으...

11월19일 바람이 그치다.(2) [2]

  • 2007-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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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19일 바람이 그치다.(2)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막 6:51) 어제 묵상에서 저는 제자들의 기억에 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사람의 기억은 진리가 드러나는 길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기억은 참으로 이상합니다. 완전히 망각했다고 생각되는 것도 우연하게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우리의 일상에도 그런 경험은 자주 일어납니다. 커피를 마시다가 실수로 커피 잔을 놓쳐 깨뜨리는 순간에 완전히 잊고 있던 십년 전의 어떤 사건이 생생하게 기억나는 일도 있습니다. 그런데...

11월18일 바람이 그치다.(1) [1]

  • 2007-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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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18일 바람이 그치다.(1) 배에 올라 그들에게 가시니 바람이 그치는지라. 제자들이 마음에 심히 놀라니(막 6:51) 예수님이 배에 오르자 바람이 그쳤다고 합니다. 복음서 기자는 이 대목에서 제자들이 놀랐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합니다. 제자들은 이미 49절에서 예수님을 유령인가 해서 소리를 지른 적이 있고, 50절에서 그 예수를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가 그 사실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놀람의 문제는 며칠 전의 묵상에서 이미 말씀드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 상황은...

11월17일 두려워 말라.(2) [8]

  • 2007-11-16
  • 조회 수 1595

2007년 11월17일 두려워 말라.(2) 그들이 다 예수를 보고 놀람이라. 이에 예수께서 곧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고(막 6:50)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사람에게 두려움이 있습니다. 작게는 일신에 관한 두려움입니다. 불치병에 걸리지 않을까, 사업이 망하지 않을까, 또는 자식이 공부를 못할까 두려워합니다. 조금 더 심각하게는 삶의 허무로 두려워질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는 불가능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취로 우리의 삶을 완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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