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068
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라오디게아 교회가 아예 버림받은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니었나 봅니다. “내가 사랑하는 자”이기에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에서 변해야 합니다. ‘열심’을 내라고 했다 해서 극성스러워지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겉으로 열심을 내는 듯해도 속으로는 여전히 미지근할 수 있고, 겉으로는 미지근한 듯해도 속으로는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 사람이 예수를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겠지요.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세상에서 그 어느 것 하나 부족한 게 없을 정도로 부자로 살기에 예수를 사랑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사람에게 결정적으로 중요한 일은 두 가지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 6:2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먹고사는 데에 필요할 뿐이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하는 돈으로 영혼의 만족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부자로 살게 하지는 않으시나 영혼의 만족은 주십니다. 영혼의 부자가 되는 겁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지 어떻게 영혼의 만족이 없을 수 있겠습니다. 쉬운 표현으로, 가난한 연인들이 뜨거운 사랑에 떨어지는 거와 비슷합니다. 이런 말은 흔하게 들어서 시큰둥하고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태도에서 돌아서는 게 바로 본문이 말하는 ‘회개하라.’(μετανόησον)입니다. 이런 회개가 사실은 쉽지가 않습니다. 이런 점에서 회개도 억지로 되는 게 아니라 은총으로만 가능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공동번역 [3:19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히 노력하고 네 잘못을 뉘우쳐라.]
새번역 [3:19 나는 내가 살아하느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하여라.]
나의 조언을 듣기만 하는 사람은 그런가 보는데, 실행을 옮기는 사람을 보면 계속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듣기만 하지 아무런 반응이 없으면 내가 굳히 힘들게 이야기를 왜 했었나라는 후회가 듭니다.
이야기를 듣고 실행하는 사람을 보면 대단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오늘 구절에서도 조언과 책망을 듣고 뉘우치는 교인이 있다면 그 교회는 희망이 보이겠지요.
듣고 반문하고 실행 될때 보이는 것이 희망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