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071
3:22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일곱 교회(ἐκκλησία)를 향한 충고가 계 3:22절로 끝났습니다. 그 사이에 “귀 있는 자는 … 말씀을 들을지어다.”라는 관용어가 일곱 번(2:7, 11, 17, 29, 3:6, 3:13, 3:22) 반복되었습니다. 모든 유대인이 어릴 때부터 들어야 할 본문은 본래 신 6:4~9절입니다. ‘쉐마’(שְׁמַ֖ע)로 시작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바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그 의미를 충분히 아는 사람이라면 ‘말씀’을 듣는 일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를 깨달을 것입니다. 이렇게 상상해보면 어떨까요. 어떤 사람이 한 시간만 있으면 죽을 상황입니다. 정신이 혼미합니다. 그 순간에 그의 귀에 마 5~7장의 산상수훈이 들리거나 시편 23편이 들렸다고 합시다. 그는 기쁨 충만하게 그 순간을 경험할 것입니다. 저도 죽을 때 그런 경험이 있었으면 합니다. 혹시라도 저의 임종 순간에 누군가 옆에 있다면 성경을 읽어주었으면 합니다. 죽기 전 일상에서도 그런 충만한 순간 경험이 가능합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말씀을 들을 ‘귀’가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소리에만 예민한 귀라면 말씀은 들리지 않겠지요.
공동번역 [3:22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새번역 [3;22 귀가 있는 사람은, 성령이 교회들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성령의 말씀일지라도 내 마음이 열리지 않으면 듣지 못한다고 봅니다.
오늘 개인 수영강습을 해주며 구절 묵상을 했습니다.
다비아 사랑채에 소개한적 있는데, 지적장애1급 친구입니다.
별칭이 최프로 입니다 -심텍소속 선수라서 제가 그렇게 부릅니다.
제 말에는 엄청 집중하여 듣습니다.
수영을 혹독 하게 시키는 나쁜 삼촌인데도도 불구하고
제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 그 어떤것도 놓치지 않으려 최선을 다합니다.
(최프로에게는 제가 교주라고 최프로 아버지가 그러네요. ㅠ.ㅠ )
열린 마음으로 제 이야기를 듣는 최프로가 고맙고, 자랑스럽습니다.
일곱 번(2:7, 11, 17, 29, 3:6, 3:13, 3:22) 반복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