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059
3:10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 이는 장차 온 세상에 임하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시험할 때라.
요한은 지금을 ‘시험의 때’로 규정합니다. 앞에서 짚었듯이 당시 교회는 갈림길에 서 있었습니다.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소멸하는가, 아니면 버텨내서 살아남는가, 하는 갈림길입니다. 사실은 당시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은 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오른쪽으로 갈지 왼쪽으로 갈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일종의 시험입니다. 마틴 루터도 그런 갈림길에 자주 섰습니다. 교황청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타협의 길을 갈 수 있었으나 그는 그 길이 진리가 아니기에 저항했습니다. 파문당했습니다. 그의 선택은 죽음을 담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같은 종교개혁자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렸을 때도 루터는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토마스 뮌처는 농민전쟁을 선봉에서 이끌었고, 루터는 뒤로 물러섰다가 오히려 영주 편에 섰습니다. 뮌처는 전투 중에 죽었고, 루터는 영주의 도움으로 종교개혁 운동을 본궤도에 올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민중신학’ 계열의 신학자들은 루터를 비판합니다.
시험의 때를 버텨내려면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나의 인내의 말씀”을 빌라델비아교회가 지켰기에 시험받은 기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인내가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상황이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초조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다가 대충 타협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바울의 권면을 들어보십시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을 자랑합니다. 우리가 알기로,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새번역 롬 5:3, 4) 여기서 말하는 인내는 마지못한 인내가 아니라 자발적인 인내이겠지요. 하나님의 뜻을 깨닫거나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영적인 결기 말입니다.
공동번역[3:10 참고 견디라는 내 명령을 너는 잘 지켰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기 위해서 앞으로 온 세계에 환난이 닥쳐올 때에 나는 너를 보호해 주겠다.]
새번역 [3:10 인내하라는 내 말을 네가 지켰으니,
온 세상에 닥쳐올 시험을 받을때에, 나를 너를 지켜 주겠다
시험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시험하려고 닥치는 것이다.]
하산에서 버스타고 묵상을 합니다.
스마트 폰으로 타자 치려니 쬐금 힘드네요.
오늘 강원도 평창의 선자령 대궁산을 갔다 왔습니다.
이곳은 하얀 눈빛으로 가득하네요.
일주일 동안 체력적으로 지치네요.
몸 운동의 과부하로 체력이 방전입니다.
몸은 지쳤지만 마음만은 선계(仙界)에 온 듯 합니다.
나만의 산길을 걸으며 구절 묵상을 해 보았습니다.
내 시험은 뭐 일까?
시험이 올때마다 늘 피하고 싶습니다.
아직 신앙의 하수라 시험 올때마다 투덜 거립니다.
환난을 견디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운명이라면 환난 후의 영광은 나중 문제고 도망가고 싶네요.
그래서 영적수련이 더 필요한가 봅니다.
시험,, 시련을 잘 이길 수 있게
주님의 도우심을 지금도 간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