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살에다시읽는
요한계시록-070
3:21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우리말 성경의 번역이 매끄럽지 않네요. <새번역>으로 보겠습니다. “이기는 사람은,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이긴다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십자가 운명을 본다면 예수께서는 이긴 자가 아닙니다. 그가 처형당한 십자가 옆을 지나던 이들은 모두 예수를 가련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누구도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를 이긴 자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요한은 그를 이긴 자라고 했습니다. 이런 말도 우리가 너무 자주 들어서 감동적으로 들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교회 전통이 부활을 말하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에서 부활의 의미를 조금 더 새롭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이기는) 그 사람을 ‘내 보좌’에 앉게 하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보좌는 세상 임금이 앉는 자리가 아닙니다. 세상의 방식으로 아무도 그 자리를 약속받을 수 없습니다. 그 보좌의 주인만이 우리에게 그 보좌를 약속할 수 있습니다. 그 보좌는 영원한 생명이 담보된 자리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곧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품으로 안기는 것을 보좌에 앉는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보좌에 앉으려면 하나님의 품이, 또는 하나님의 통치가,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와 그 완성이,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느껴야겠지요. 비유적으로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이 가리키는 음악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려면 그것을 알고 느낄 줄 알아야 하듯이 말입니다.
공동번역 [3:21 승리하는 자는 마치 내가 승리한 후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옥좌에 앉은 것같이 나와 함께 내 옥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새번역[ 3:21 이기는 사람은, 내가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아버지의 보좌에 앉은 것과 같이, 나와 함께 내 보좌에 앉게 하여 주겠다.]
2천년전 라오디게니아교회가 처한 극한 상황에서 복음의 존패가 달려 있기에 책망과 독려가 중요하겠지요.
초대 일곱교회는 전쟁에 나가는 병사들이기에 승리가 더 절실 하고요.
그래서 그점은 동의가 갑니다.
이기는 것은 좋은데,
현재 제가 처한 상황에서 모든 것들을 승리주의로 판단 하는 것이 옳은지 다르게 반문합니다.
지는 것에 늘 익숙한 저에게는 승리의 단어가 어색합니다.
교회의 승리 열광주의는 더 거북 스럽고요.
지금의 세계사에서 극과 극으로 몰고가는 승리주의에 더욱 매몰되는 것은 답답합니다.
때론 지는것도 좋다고 이야기 할 수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의 중심이 어디 있느냐 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