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구원
앞에서 하나님의 칭찬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 사실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절대적인 세계에서 일어날 사건이기에 인간 언어로는 담을 수 없다는 뜻이다. 마 24, 25장이 이를 비유로 설명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칭찬을 우리에게 익숙한 단어로 바꾸면 영혼 구원이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9절). 믿음의 목표가 영원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냥 구원이라고 해도 좋은데 여기서는 굳이 ‘영혼 구원’이라고 표현했다. 큰 차이는 없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본래 영혼 구원이기 때문이다. 영혼 구원은 육체 구원과 대립하는 개념이긴 하다. 단백질로 구성된 우리의 육체가 구원받는 건 아니다. 우리의 육체는 아무리 건강해도 결국에는 썩는다. 의학과 생물학과 물리학을 절대화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육체도 과학의 발전으로 언젠가는 구원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 상황을 그들이 어떻게 설명하는지는 조금만 상상력을 발휘해도 잘 알 수 있다. 만약 그런 순간이 기독교의 창조론과 구원론을 폐기되든지 완전히 새롭게 작성되어야 한다. 그런 순간이야말로 유토피아, 즉 없는 장소다. 바버라 에런라이크(Barbara Ehrenreich, 1941일생)는 <건강의 배신>(Natural Causes)에서 그런 주장을 망상이라고 지적한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기초 단위인 세포는 스스로 의지를 가진 듯이 행동하기에 의학으로도 완전하게 제어할 수 없다. 온갖 건강 진단과 치료와 섭생과 운동을 병행해도 남의 신세를 진 채 목숨을 일정하게 연장할 뿐이지 무병장수, 건강한 노년 인생을 보장하지 못한다. 이런 주장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노인이 되어 죽지 않는 상태를 구원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운명에 들어간 사람에게 구원은 죽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