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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sort

예수 경험은 생명 경험이다 [4]

  • 2013-10-14
  • 조회 수 3293

10월14일(월) 어제 설교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를 절대적 생명으로 경험하나, 하고 물었다. 이것은 설교자로서 청중들을 향한 것만이 아니라 나 자신을 향한 질문이기도 하다. 기독교인 치고 예수가 절대 생명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믿음으로 교회에 다닌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왜 예수가 절대 생명이냐, 하고 물으면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곤란한 질문이라도 그 대답을 찾는 훈련을 하는 게 좋다. 그런 훈련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은 깊어질 것이다. 이 질문의 세계로 들어가려면 일...

성경 텍스트에 충실할 것 [2]

  • 2014-01-02
  • 조회 수 3293

1월2일(목) 성경 텍스트에 충실할 것 어제 ‘새해 달력’이라는 제목의 묵상에서 설교에 충실하기 위해서 필요한 태도를 네 가지로 말했다. 어디 이 네 가지만이겠나. 기도, 회중들과의 대화, 책읽기 등등, 더 많은 요소들이 필요하지만 최소한의 조건만을 말한 것이다. 이 네 가지를 보충해서 설명해야겠다. 설교자에게 성경 텍스트는 마치 바이올린 연주자의 악보와 같다. 연주자는 악보에 일단 충실해야 한다. 자기 기분에 도취되어서 악보를 무시하면 곤란하다. 그렇다고 해서 악보...

6월18일- 병 고침

  • 2006-06-19
  • 조회 수 3290

2006년 6월18일 병 고침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막 1:34)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다는 보도가 자주 등장합니다. 개별적인 치료 행위도 나오고, 그것에 대한 일반적인 묘사도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후자의 경우입니다. 이런 보도만 따른다면 예수님의 활동은 거의 질병 치유에 치중한 듯이 보입니다. 도대체 메시아로서의 예수님과 질병 치유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이런 질문은 질병에 대한 고대인들의 생...

삶에 대한 선입견 [3]

  • 2013-11-11
  • 조회 수 3286

11월11일(월) 어제 설교 본문 중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구절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구절이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세 가지로 설명했다. 거기서의 핵심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살아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을 실질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자칫하면 미몽이나 광신으로 떨어진다. 마치 남편이나 자식이 죽었는데도 살아있다는 생각으로 시체와 함께 수년 동안 사는 사람처럼 말이다. 광신으로 떨어지지 않으면서도 죽음 너머의 삶을 실질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은 무엇...

팔복(28) 디카이오수네

  • 2013-07-23
  • 조회 수 3285

팔복의 마지막 항목은 의(義)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말로 의로 번역된 헬라어 ‘디카이오수네’는 righteousness, justice로 번역될 수 있고, 또 ‘what God requires’로 번역될 수 있다. 도대체 의란 무엇인가? 마 6:33절은 이렇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여기서도 의는 디카이오수네다. 성서는 기본적으로 의를 하나님의 속성으로 본다. 스스로 의로울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의를 인식할 수 있는 자도 없다. 구약성서...

6월20일- 새벽 [2]

  • 2006-06-20
  • 조회 수 3285

2006년 6월20일 새벽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막 1:35)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새벽에 일어나 한적한 곳으로 가시어 기도하셨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매일 새벽에 일어나셨는지, 그리고 정기적으로 그렇게 기도하셨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이 늦잠도 주무셨을 거라고는 상상하기 힘들군요.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삶을 자세하게 전달하려는 게 아니라 그분이 바로 구약성서가 예언하고 있는 메시아라는 사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복음서를...

인생설계 [3]

  • 2010-05-19
  • 조회 수 3282

그대의 인생은 앞으로 얼마나 남았소? 청춘이라면 나름으로 인생을 설계하고 있을 거요. 꿈에 부풀기도 하고, 거꾸로 현실을 암담하게 느낄 수도 있소. 그런 세월을 다 보낸 이라면 인생이 설계한대로 잘 풀린 것에 만족하거나 그렇지 못한 것에 아쉬움에 젖을지도 모르오. 인생이 설계한대로 진행된다면 얼마나 즐겁겠소만 대개는 그렇게 되지 않소. 어떤 경우에는 설계한 것보다 훨씬 잘 풀리기도 하오. 모든 사람은 크고 작은 삶의 설계를 그린 채 그것이 이루어질 날을 꿈꾸며 사는 것 같소. 나는 그대가 인생설계에 너무 묶이...

목사공부(76)- 화체설과 임재설

  • 2014-07-05
  • 조회 수 3281

화체설과 임재설 성찬 문제는 종교개혁자들에게도 신학적으로 예민한 주제였다. 다른 부분에서는 서로 생각이 통하면서도 성찬에서는 차이를 좁히기 어려웠다. 로마가톨릭을 포함해서 그런 차이를 특징적으로 크게 나누면 화체설, 임재설, 상징설(또는 기념설)이 있다. 로마가톨릭은 화체설을 주장한다. 사제가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축성하는 순간에 빵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말이 안 된다. 사제가 축성해도 빵은 빵이고 포도주는 그대로 포도주이지 그것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

사마리아인들의 초대, 요한복음 묵상(40) [2]

  • 2013-06-17
  • 조회 수 3281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를 초대했다. 이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훌륭한 랍비를 자신들의 동네로 모실 수 있다는 건 큰 행운이지 않은가. 그렇지만 모든 사람들이 이런 태도를 취하는 건 아니다. 누구를 초대하는 일은 따지고 보면 좀 귀찮다. 거처할 곳도 마련하고, 먹을 것도 마련해야 한다. 예상에 없던 손님을 접대하려면 자신의 모든 일정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웬만해서 초대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경우라면 밖에서 밥 한번 먹는 것으로 때운다. 눅 8:26-39절에는 거라사 땅의 군대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

다시 부활에 대해서 [1]

  • 2010-04-05
  • 조회 수 3279

그대는 어제 부활절을 어떻게 보내셨소? 부활의 기쁨과 희망이 가득한 하루였을 것이오. 혹시 늘 그렇고 그런 또 한 번의 부활절은 아니었소? 어떤 사람에게는 부활절이 행사가 있는 절기로 각인될 거요. 웬만한 교회에서는 부활절에 성가대 공연이 있소이다. 나도 젊었을 때 부활절과 성탄절에 성가대에서 열심히 활동한 탓에 그런 분위기를 알고 있소. 준비하기 위해서 몇 달은 고생해야 할 거요. 어떤 모임이고 행사가 없을 수는 없소. 그렇지만 행사를 위한 행사로 떨어지는 것만은 피해야 할 거요. 이번 부활절이 부활의 생명에 ...

누가복음 읽기 005 [3]

  • 2020-11-07
  • 조회 수 3278

대구 성서 아카데미 정용섭 목사 매일묵상 『누가복음 읽기』 005, 눅 1:12 https://youtu.be/51hdmhCmd50

세례 요한, 4월2일 [1]

  • 2006-04-02
  • 조회 수 3278

2006년 4월2일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막 1:4) 세례 요한 공관복음서만이 아니라 요한복음에 이르기까지 모든 복음서가 예수님의 공생애를 설명하기 전에 세례 요한을 다루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심지어 세례 요한의 출생설화를 예수님의 출생설화와 연결시키기까지 합니다. 요한은 이미 가임기가 끝난 엘리사벳의 몸을 통해서, 그리고 예수는 동정녀인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여섯 달 간격으로 태어났으며, 이 과정에서 양쪽 모두에게 똑같이 천사가 등장합니다. 그 뒤로도 요한과 예수...

성서문자주의(1)

  • 2011-11-07
  • 조회 수 3277

지난 10월30일 경동교회에서 행한 종교개혁기념 신앙수련회 특강에서 한 대목을 전하겠소. 루터의 ‘오직 성서’라는 대목이오. 루터의 이 신앙원리가 한국교회에서 크게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설명했소. 그 왜곡을 한 마디로 끊어 말하면 ‘성서문자주의’요.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소. 가톨릭은 사람인 교황을 우상으로 삼는 반면에 개신교는 종이인 성경을 우상으로 섬긴다고 말이오. 그게 문자주의가 가리키는 현상이오. 한국교회 신자들에게 성서는 문자적으로 오류가 전혀 없는 말씀으로 인정받고 있소. 그게 성경을 높이는 것처럼 보...

천당방문기(8) [1]

  • 2010-06-01
  • 조회 수 3277

박 장로가 처음에 천당에 온 날이었소. 천당 관리소에 갔는가 보오. 하늘나라 시민으로 살아가려면 등록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었소. 이 세상에서 하던 주민등록과 비슷한 절차요. 기록 카드를 한참 들여다보던 박 장로는 이상하다는 듯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다가 머뭇거리면서 사무를 보는 천사에게 물어봤소. “장로 직책은 어디에 써야 하나요?” 다음은 천사의 대답이오. “장로가 무언가요? 잘 모르겠는데요. 대충 이름만 적으세요.” 박 장로는 자기가 못 올 데를 왔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했소. 아니 천당 관리 천사가 장로직을 ...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9]

  • 2010-02-11
  • 조회 수 3274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그대는 어디서 오셨소? 이 질문은 사람이 사유(思惟)하기 시작할 때부터 계속된 것이오. 너무 진부한 질문처럼 들릴지 모르겠소. 아니오.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우리에게는 없소이다. 이런 질문을 그치는 날, 우리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거요. 그런 질문은 배부른 사람이나 하는 거라고 투덜거리는 사람들도 있을 거요. 그런 사람과는 뭐,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소. 사람이 배불리 먹으려고 사는 거는 아니지 않소. 조금 덜 먹을 생각만하면 먹는 문제로 우리 삶이 소진되지 않아도 좋을 거요. ...

한 해를 보내며 [6]

  • 2010-12-31
  • 조회 수 3273

오늘은 한 해의 끝 날이오. 이렇게 한 해가 휙 지나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소. 한 해가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소. 한 해가 가고, 다시 한 해가 오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이오. 그게 과연 당연한 일이오? 우주가 시작되고 130억년 동안 반복되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당연하지 않소. 과거의 일이 미래를 무조건 규정하는 게 아니오. 마치 작년을 살고, 올해를 살았으니 내년에도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가 사고를 만나 죽기도 하는 것처럼 이 세상이 지금처럼 영원히 반복된다...

주기도(1) [1]

  • 2010-07-20
  • 조회 수 3273

그대가 성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면 주기도를 일주일에 최소한 1번 이상은 드릴 것이오. 거의 매일 드리는 분들도 있을 거요. 주기도는 아주 특별한 기도요.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제자들의 요구에 예수님이 알려주신 기도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소. 거의 모든 교회가 주일 공동예배에서 주기도를 드리오. 침례교회 중에서 어떤 교회는 사도신경은 암송하지 않지만 주기도만은 드리오. 그만큼 주기도는 세계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기도로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오. 8월27일부터 열리는 대구샘터교회, 서울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 요한복음 묵상(21) [1]

  • 2013-05-18
  • 조회 수 3272

포도주 사건에 예수의 어머니가 등장한다. 결혼 잔치 자리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그 사실을 전한다. 독자들이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마리아라는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녀는 아들 예수로부터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지만 하인들에게 예수의 말대로 실행하라고 이른다. 예수가 어떤 표적을 행할지 미리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어떤 이들은 마리아가 그 잔치를 책임지는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로마가톨릭 교도들은 마리아를 ...

거듭남과 하나님 나라, 요한복음 묵상(24) [1]

  • 2013-05-25
  • 조회 수 3271

니고데모 이야기에서 거듭남의 문제는 하나님 나라와 깊이 연관된다. 한번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다른 한번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표현되어 있다. 본다는 것과 들어간다는 말은 같은 의미다. 물론 하나님 나라를 직접 보거나 거기에 직접 들어갈 수는 없다. 하나님의 통치가 눈에 보이거나 사물처럼 확인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거듭남을 통해서만 인식과 경험이 가능한 그분의 통치다. 본인이 거듭났는지를 알고 싶으면 하나님 나라를 얼마나 알고 있는지, 거기에 얼마...

7월6일- 내가 원하노니 [1]

  • 2006-07-06
  • 조회 수 3271

2006년 7월6일 내가 원하노니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막 1:41) 나병환자의 몸에 손을 대시며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누가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 말고 누가 나병환자에게 이렇게 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메시아 성이 바로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통치가 바로 임박했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병을 고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와 일치하신 분이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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