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6)

조회 수 3203 추천 수 1 2010.07.25 23:19:54

 

     세계 교회가 모두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소. 기도한다는 것은 거기에 우리의 영혼을 담는 신앙행위요. 그 기도의 내용대로 살아가겠다는 결단이기도 하오. 잘 보시오. 우리 아버지를 함께 부른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한 형제라는 말이오. 도대체 형제라는 것은 무슨 뜻이겠소? 우리가 보통 교회에서도 형제, 자매라는 말을 흔하게 하니, 묻는 말이오. 이런 말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 같소. 실제로 마음은 형제와 자매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입만 나불거리는 것 같소.

     기독교 역사에는 이런 형제관계를 현실로 담아내려는 노력이 꾸준히 제시되었소. 소위 공동체 운동이오. 지금도 잘 알려진 브루더호프라는 공동체를 그대도 알고 있을 거요. 창시자는 에버하르트 아놀드는 이 운동을 독일에서 시작했지만 1930년 대 말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옮겼소. 지금은 세계적으로 미국에 6 곳, 영국에 2 곳, 호주에 1 곳의 공동체가 활동하고 있다 하오. 각각의 공동체는 초대교회의 공동체 생활방식에 따라서 사유재산 없이 공동의 삶을 누리고 있소. 헨리 나우엔은 브루터호프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소.

 

     “브루더호프의 글들은 제자도가 살아 숨 쉬는 공동체 안에서 체득한 경험에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 우리는 이런 공동체 안에서 연단되고 정화된다. 용서와 치유의 모든 것을 배우는 곳은 바로 공동체이다.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 배우는 곳이 공동체이다. 공동체야말로 참된 사랑의 학교이다. 아놀드는 그의 전 생애를 공동체에서 생활하였다. 그러기에 누구보다도 공동체의 필요와 그 가치를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복음 속의 그리스도를 만나는 곳이 다름 아닌 공동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Henry J.M.Nouwen)

 

     가장 원초적인 공동체는 수도원이라 할 수 있소. 수도원과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차이는 가족을 허용하는가에 달려 있을 거요. 수도원의 구성원들은 모두 독신 수도사들이지만, 브루더호프 구성원들은 가족이오. 그들은 일단 사유재산을 포기하고, 그 이외의 모든 육체적인 탐욕을 멀리한다는 특징이 있소. 건강이 허락되는 한 모든 이들은 노동을 하오. 그리고 경건생활을 규칙적으로 하오. 이런 공동체에는 어떤 다툼이 있을 수 없소. 명실상부하게 형제 관계로 살아갈 수 있을 거요.

     그대는 공동체 생활이 실제로 가능하다고 생각하시오? 일단 커피, 술 등의 기호식품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아예 꿈도 꾸지 못할 것이오. 소유로 삶을 확인하던 사람들도 이런 공동체 생활은 불가능하오. 그런 습관 말고도 공동체가 어려운 이유는 부지기수요. 한국에서 여려 공동체가 있었지만 수도원이나 수녀원처럼 수사들이 구성원이 아닌 일반적 공동체는 거의 실패했소. 그럴 수밖에 없소이다. 일단 성격 차이를 뛰어넘기가 힘드오. 이런 공동체의 기초는 가족이오. 가족을 꾸리는 것도 쉽지 않소. ‘적과의 동침’이라는 영화 제목처럼 부부도 결혼이라는 강제적인 틀로만 겨우 지탱될 수 있소. 그렇다면 출가한 수도자들이나 그에 버금갈 정도로 종교적인 훈련이 된 사람들이 아니라면 실제적인 공동체 생활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이 되오. (2010년 7월25일, 주일, 높은 구름, 낮은 구름, 그리고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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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3]달팽이

2010.07.26 21:38:22

에버하르트 아놀드 쓰고, 토마스 머튼이 해설한 <공동체로 사는 이유> 에 좋은 내용이 있어 한 대목 나누어 봅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우리 공동체 삶은 하나님위에 세워지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극한 갈등과 위기들을 지나 최후의 승리로 이끄십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위험과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또한, 곧바로 생존과 투쟁과 힘겨운 삶의 현실, 그리고 인간 본성 때문에 생기는 온갖 갈등 한 가운데를 통과하는 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의 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비록 끝없는 투쟁-생명과 죽음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 그리고 천국과 지옥사이에 끼어 있는 인간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이기는 생명과 사랑의 힘, 그리고 진리의 승리를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은 이론이 아닙니다.  교리나 체계적인 사상이나 빈틈없는 논리도 아니며, 어떤 종교 의식이나 조직체도 아닙니다.  신앙이란, 하나님 그분 자신을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사로잡힌다는 뜻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로 이 힘겨운 길을 갈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또 이 신앙은 우리가 인간적으로 볼 때 도저히 사람간에 신뢰할 만한 이유를 발견할 수 없을 때조차 다시금 회복할 수 있게 도와 줍니다.

<공동체로 사는 이유 96페이지 인용>

[레벨:3]비오는저녁

2010.07.30 03:26:53

2년전에 펜실바니아 부르더호프에 온 가족이 갔었습니다.

국민학교를 개조해서만든 공동 주택, 가재도구는 말할 것도 없고 물도 같이쓰고, 불도  한층에만 있어 얼마나 아껴 쓰는지. 음식이 소박해서 설겆이도 간편하고, 저녁은 공동식사로 하는데 한창 멋부릴 틴에이져 여학생들이

손이 퉁퉁 불어 전체 식구들의 저녁을 준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들과 일하면서 함께 얘기를 나누었는데, 세상에 대해 진지하고 어떤 얘기든 열린 맘으로 들으려 하고

쉽게 흥분하지 않는걸 보았습니다. 국민학교와 중학교(이건 기억이 분명치 않네요)는 공동체 안에 있는

부모님들이 선생님인 학교에 다니다가, 고등학교 부터는 그 동네에 있는 학교에 다니게 되는데도

그 갑작스럽고 확연히 다른 문화의 간극에 그리 흔들리지 않는편이라고 합니다.

그건 부모님들과 평소에 늘 대화를 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더군요.

실제로, 다른 오락거리들이 없기 때문에, 집집마다  이야기 책들, 직접만든 자료들, 자연에서 얻은 교육자료들이

부엌 서랍에서도 나오고, 침대옆에, 식탁옆에 수두룩 놓여 있었습니다.

정말 부러웠던 것은 아버지들이 언제든 아이들과  얘기하고 시간을 함께할 준비가 되어있고, 

공동의 노동 외에, 어떤 노동이던지 아이들과 함께 하고 그것이 삶에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틴 에이져들이 자발적으로 서로 모여서 집을 고치거나, 길을 만들고 하는 일들이 허다합니다.

꼬마들은 나무위에 올라가고, 산책하고, 자기들이 만든 냇가와 숲속을 돌아다닙니다.

도대체 학교와 노동과 가족과 삶이 어디하나 떨어져 있는데 없이 모두 함께 입니다.

아이들 학교는 공동체 전체의 관심과 사랑이 깃든 곳이라는 생각이 어김없이 들었습니다.

도서관의 분위기와 소장량이 놀라웠고, 목재로 직접 만든 장난감들이 얼마나 예쁜지.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책중에 (제목이 기억 안나는데요)

그가 공동체를 꾸리면서 겪었던,온통 실패하고 좌절했던 전쟁과 다름없는 이야기들이 생각납니다.

저야 손님으로 그렇게 돌아보고 왔지만, 그 평화를 지키고 살아내기 위해 겪어내고 견뎌내는

저들의  영혼의 노동또한 어떨까 싶습니다.

제가 지향하고, 또 결국은 가게될 길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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