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6일 예수의 체포(3)
이에 와서 곧 예수께 나아와 랍비여 하고 입을 맞추니(14:45)
유다는 스승에게 와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병사들이 체포해야 할 대상을 그런 식으로 암시한 것입니다. 그런 입맞춤은 당시의 의례적인 인사법입니다. 지금도 중동 사람들은 왼뺨과 오른뺨을 서로 맞대는 방식으로 인사를 나눕니다.
이 장면은 극적인 요소가 강합니다. 많은 연극에서 비슷한 장면을 찾아볼 수 있을 겁니다. 유다의 입맞춤 장면이 역사적 사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전하고 있는 공관복음과 달리 요한복음은 유다가 군사들과 함께 왔다고만 하지 입맞춤에 대해서는 말이 없습니다. 복음서 중에서 가장 늦게 기록된 요한복음 기자는 그것의 역사적 사실성을 확실하지 못했던지, 아니면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겠지요. 여하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사실입니다.
유다의 배신은 불가사의입니다. 앞의 묵상에서 몇 가지 가능성을 찾아보았지만 확실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확실한 사실은 다음의 두 가지이겠지요. 첫째, 유다는 스승을 배신한 사람이다. 둘째, 그는 파렴치한 사람은 아니다. 이 두 명제는 충돌합니다. 스승을 배신한 사람은 파렴치한 사람입니다. 충돌하지 않으려면 유다가 나름으로 신념에 차서 행동했다는 사실이 증명되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복음서 기자들은 그런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오직 한 가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의 운명이 그것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의 관점에 따르면 유다는 이런 예수님의 운명에 비극적인 역할을 감당한 인물일 뿐입니다. 나름으로 소신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악의 만행을 거든 사람입니다. 그래서 복음서 기자는 그가 태어나지 않는 게 더 좋을 뻔한 인물이었다고 말합니다.(마태 26:24) 유다가 스승에게 평화의 입맞춤을 나눕니다. 악은 간혹 평화의 포즈를 취하는가봅니다.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이 가롯유다의 모습처럼 동일하게 보입니다.
순간을 어떻게 선택하냐에 따라, 패는 갈라지지만 선택이전의 시점에서 보면 이익에 따른 자세의 차이라고 보여 집니다.
막상 내가 옳은 길을 간다고 생각하고 주위를 둘러 보면 과연 이것이 맞는 길인지 의심과 회의가 듭니다.
정목사님이 언급하신 것처럼, 가롯유다는 형편없는 사람은 아닐것이 라고 고개가 끄덕끄덕 거립니다.
예수님에 말씀하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의심과 절망의 순간적인 결단이 잘못된 길로 판명되었지만
때론 가롯유다에게 연민의 동정이 갑니다.
우리들의 모습과도 같다는 생각에서 말입니다.
목사님, 두 명제의 충돌에서 추리를 시작해볼께요.
유다의 내면이 예수님에 대하여 하향곡선을 그리던 중에
그의 정치적 신념에 대한 일부를 만족시킬 만한 비밀스러운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어차피 그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는 무지한 상태이고...
복음서에는 은 30냥인가를 받은 것에 주목을 하지만 돈과는 관계가 없을 겁니다.
배후로부터 유다의 신념을 달랠만한 갑작스럽고 은밀한 제안....
마치 일하고 있는 형들에게 요셉이 갑자기 찾아왔고
그것이 평소 그를 미워하는 형들에게 범행의 기회를 제공하였고
최종 결과물은 은 몇 냥이 남은 것처럼요.
하나님의 구원섭리가 항상 우리를 앞지르는 것을 바라보며,
그 뒤를 따를 때 잠잠한 영혼으로...
구원이 그에게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