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4일 포도원 농부 비유(11)
그들이 예수의 이 비유가 자기들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알고 잡고자 하되 무리를 두려워하여 예수를 두고 가니라.(12:12)
예수님의 비유와 충고를 받은 사람들은 대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입니다. 앞서 그들은 성전에서 거닐고 있던 예수님을 향해서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하고 따져 물었던 사람들입니다.(막 11:28) 그들은 그 비유가 자신들을 빗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좀더 객관적으로 정확하게 하자면, 초기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판단한 것입니다. 산헤드린의 중요한 구성원들인 그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고 한다면 당연히 악한 농부들은 그들이어야 했습니다.
이야기는 예수님의 처형을 향해서 고조되고 있습니다. 거기에 필요한 분위기가 조성되는 중입니다. 대제사장 일당은 예수님을 당장 잡아넣고 싶어 했습니다. 자신들의 아픈 곳을 찌르는 예수님을 그대로 용납할 수 없었겠지요. 그러나 무리가 두려워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림이 이렇게 그려집니다. 여기 대제사장 일당이 있고, 옆에 예수님이 계시고, 그 뒤에 무리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리가 아직은 예수님을 지지하고 있는 탓에 대제사장 일당이 거사를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계속되지 않습니다. 얼마 후에 무리는 대제사장들에게 회유당한 건지 어떤지는 몰라도 결국 예수를 거부합니다. 무리, 즉 민중은 쉽게 부화뇌동하는 것 같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민중을 이중적으로 그립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에 열광한다는 것이 하나이고, 아주 간단히 실망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만약 민중들이 예수님을 계속 지지했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또 어떻게 보면 민중들이 예수님에게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사실이 예수님을 더 위험한 상황으로 몰고 간 것인지도 모릅니다.
매일 아침 출근 지옥철의 일상입니다.
그 싸움에 누군가는 웃고.
싸우는 소리와 웃음소리가 뒤범벅되서 정신이 아득해질때가 있습니다.
이게 우리네 사는 모습이라고, 다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저는 사회부적응자, 아니 삶의 부적응자가 되고 맙니다.
그런데 '그게 우리네 사는 모습'이라는 말 자체가 "음모"라고 혹자가 그러더군요.
"음모"라는 단어의 등장에 웃음이 터졌는데, 묘하게 눈물도 같이 터졌습니다.
그리고 오늘 QT속의 "민중"
음모라는 껍질속에 감춰진 싱싱한 진리의 맛.
그 맛을 아는게 영성이 아닐까...
저는 아직도 음모를 넘어 존재하는 진리의 맛을 모르는 민중,
주님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