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12일 가이사의 것과 하나님의 것(3)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그들이 예수께 대하여 매우 놀랍게 여기더라.(12:17)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는 이 말씀을 정교분리의 명제로 오용하는 경우를 어제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그 반대의 경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경우는 종교와 정치의 일치를 극단적인 데까지 끌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입장의 사람들은 종교의 근본을 정치행위로 봅니다.
현대신학의 한 유형 중에 해방신학이라는 게 있습니다. 해방신학은 극단적인 빈부격차와 군사독재가 횡행하던 1960년대의 라틴 국가를 배경으로 나온 로마가톨릭 신학입니다. 유럽에서는 정치신학이 이에 해당됩니다. 그 신학은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편애(Parteilichkeit)한다는 관점으로 사회문제에 접근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면 경우에 따라서 무력투쟁을 감수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어떤 사제들은 실제로 총을 들고 반정부 무력투쟁에 참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해야 할 목사와 신부들이 무력투쟁을 할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제삼자가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 방식이 아니면 민중들의 삶이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상황을 우리가 무시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무장 강도가 들어왔을 때 야구방망이를 들고서라도 싸워야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를 정치, 경제적인 것만으로 몰고 갈 수는 없습니다. 정치, 경제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구요. 그런 부분이 무의미하다는 게 아니라 그런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충분하지 않은 것을 절대화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왜곡이 아닐는지요. 종교와 정치를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것도 문제지만, 구분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