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7일 권위에 대한 논쟁(3)

조회 수 2080 추천 수 0 2009.02.16 23:05:39
 

2009년 2월17일 권위에 대한 논쟁(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한 말을 너희에게 물으리니 대답하라. 그리하면 나도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는지 이르리라.(11:29)


지금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고위 성직자들과 권위에 대해서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입니다. 당신이 의존하고 있는 권위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받은 예수님은 직접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되묻겠다고 하십니다. 이 질문에 대답하면 자신도 대답하겠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우회하는 방식으로 반응하신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이 질문을 위한 질문이라는 사실을, 더 나아가서 예수님을 함정에 몰아넣기 위한 질문이라는 사실을 아셨겠지요. 강의실에서도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특히 믿음이 좋다고 확신하는 신학생들에게서 이런 현상이 강합니다. 그들은 신학을 알고 싶은 게 아니라 자신들의 신앙이 좋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할 뿐입니다. 예컨대 “교수님은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으세요, 안 믿으세요?”라거나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으세요, 믿지 않으세요?” 하는 질문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권위는 사람의 말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서만 그 확실성이 담보됩니다. 당시 종교 기득권자들은 겉모습으로만 사람을 판단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참된 권위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증언이 거짓이라고 트집을 잡았을 때 예수님은 그들이 사람을 육체로 판단한다고 지적하면서 “아버지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8:18) 예수님을 보내신 이(하나님 아버지)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에 함께 하셨다고 말입니다. 이것을 제사장들에게 설명한다는 것은 우이독경이었겠지요.

예수님의 권위는 하나님의 그것과 동일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그런 차원에서 승천하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고백했습니다. 참된 권위는 하나님에게서만 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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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41]새하늘

2009.02.17 17:10:03

권위.
우리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도우심에 의해 오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는지요.
마지막 문장이 깊은 여운이 남습니다.
"참된 권위는 하나님에게서만 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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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8]시와그림

2009.02.17 18:22:43

겉 모습으로 판단하는 오류는
그것이 권위의 문제이건 가치의 문제이건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우리에게
얼마나 멀리 에덴에서 동떨어져 있는지 말해 주는 지표와 같습니다

아담에게만 이름 짖는 일을 허락하셨어도
하나님이 '말'로 세상을 창조하셨으니
아담이 이름을 불러주기전에 이미 피조물 안에는
이름보다 더 깊은 말의 본질이 있었을 거구요
겉치레없는 동산 어디를  둘러봐도 '권위'는 하나님께만 있었겠지요

예수, 땅에 내려온 하나님의 권위를 유대인도 우리도
알아챌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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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9.02.17 23:16:33

예수님의 권위에 대한 판넨베르크의 설명을 여기 인용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에 대한 논쟁의 도화선이 된 자신의 사신(使信, Botschaft, 복음선포, 또는 그 내용을 가리킴. 역주)을 비유 형식으로 말씀함으로써 권위 문제를 사실성(Sachlichkeit)의 차원으로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인격에 따라오는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선포한 말씀과 그에 의해 발생된 사건들로 인해서 그의 인격이 사람들에게 불가피하게 결정적인 질문이 되었지만 그는 오히려 이런 걸 피해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 기울인 것 같습니다.(설교집, 믿음의 기쁨, 65쪽)



예수님이 선포한 사신의 사실성을 신실하게 전하려면 하나님의 통치를 세상이나 인류와 관계된 일로 생각해야지 그저 교회를 경영하기 위해서 그 둘레에 장식품을 매달아놓듯이 오용하면 안 됩니다.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현재를 규정하는 능력”으로 선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의 문제와 현재적으로 관련된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적 전승의 경건한 언어에서가 아니라 오직 세상에서 실질적으로 이해되는 진술에서만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종교적으로 전승된 언어들이 세상과 맺는 관련성은 그 어떤 해석 작업이 없는 한 별로 설득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와 거리가 먼 세계만이 아니라 우리 기독교인 자신에게도 해당됩니다. 우리는 전승된 언어에 밀착되어 있는 종교적 권위의 허상을 벗겨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통치를 단순히 세속적으로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언급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치는 인간이 정치적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일의 성취와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정의와 평화로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님과는 다른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권위를 포기하라는 요청을 듣습니다.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통치 같은 단어를 아무렇게 마구 사용하지 말라고 말입니다.(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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