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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2월7일 예루살렘 성전에서(6) [8]

  • 2009-02-06
  • 조회 수 1831

2009년 2월7일 예루살렘 성전에서(6)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11:17) 예수님은 예레미야 7:11절을 인용하셨습니다.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예레미야는 삶이 따르지 않는 위선적인 신앙을 책망했습니다. 거짓말, 도둑질, 살인, 간음, 거짓 맹세, 바알 분향을 일삼으면서 성전에 들어와서 구원을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증한 일이었습니다.(렘 7:10) 당시에도 예루살렘 성전은 전통...

2월6일 예루살렘 성전에서(5) [4]

  • 2009-02-05
  • 조회 수 1842

2009년 2월6일 예루살렘 성전에서(5)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11:17) 예수님은 이사야 56:7절을 인용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이 문장 중에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이사야의 난외 주에는 “만민을 위하여 기도하는 집”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쨌든지 여기서 핵심은 기도하는 집입니다. 성전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물론 제사입니다. 성전의 일부 장소에서 ...

2월5일 예루살렘 성전에서(4) [3]

  • 2009-02-05
  • 조회 수 1788

2009년 2월5일 예루살렘 성전에서(4)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11:17)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을 내쫓거나 기물을 엎어버린 후 예수님은 성전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구약성서의 인용입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사 56:7) 너희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렘 7:11) 기도하는 집과 강도의 소굴은 완전히 상충되는 개념입니다. 기도하는 집은 하나님과의 ...

2월4일 예루살렘 성전에서(3) [3]

  • 2009-02-03
  • 조회 수 2003

2009년 2월4일 예루살렘 성전에서(3)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11:16) 예수님은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고 기물을 둘러엎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복음서의 보도 중에서 유일한 폭력 사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이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니는 것을 막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에 나섰을까요? 어제의 묵상에서 설명한 대로 성전의 시장이 참배객들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예수님이 몰랐을 리가 없었을 텐데...

2월3일 예루살렘 성전에서(2) [2]

  • 2009-02-02
  • 조회 수 2301

2009년 2월3일 예루살렘 성전에서(2)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11:15)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돈벌이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매매하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 비둘기 파는 자들이 그들입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에 성전 시장이 아주 크게 열렸다고 합니다. 중요한 절기에는 이방인의 마당에서 열렸는데 가로 475m, 세로 300m의 넓이였습니다. 거기에다가 다른 마...

2월2일 예루살렘 성전에서(1)

  • 2009-02-02
  • 조회 수 2032

2009년 2월2일 예루살렘 성전에서(1)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11:15) 예루살렘 성전 청결 사건은 예수님의 운명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계기였습니다. 그런 탓인지 네 복음서가 이 사건을 모두 다루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 사건을 예수님 공생애의 초기에 설정한 반면에 나머지 공관복음서는 마지막 한 주간의 서막에 설정했습니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이 사건으로...

2월1일 예수의 저주

  • 2009-01-31
  • 조회 수 1759

2009년 2월1일 예수의 저주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11:14) 위 구절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조금 특이한 행동을 하신 겁니다. 영원히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을 철도 아닐 때 와서 열매를 얻지 못했다고 해서 저런 저주를 내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구절을 놓고 예수님은 나무에게도 저주를 내릴 수 있으며, 그 저주가 그대로 실행되었으...

1월31일 무화과의 때

  • 2009-01-30
  • 조회 수 2972

2009년 1월31일 무화과의 때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11:13) 무화과나무 사건은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에만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기본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이 배가 고플 때 무화과나무를 보고 열매를 얻고 싶었으나 얻지 못하자 저주를 내리셨고, 이에 따라 그 나무가 말라 죽었습니다. 이에 대해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제자들을 향해서 예수님은 기도를 통해서 무엇이든지 다 ...

1월30일 배고픈 예수 [3]

  • 2009-01-29
  • 조회 수 1997

2009년 1월30일 배고픈 예수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11:12) 막 11:12-14절에는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다는 겁니다. 이게 사실일 가능성은 그렇게 높아 보이지 않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런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마가복음 기자가 전한 내용과 똑같은 건 아니었을 겁니다. 병행구인 마태 21:18-22절과 비교하면 성서기자들의 집필 의도를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 문제는 뒤에서 생각합시다. 마가와 마태는...

1월29일 다시 베다니로 [4]

  • 2009-01-28
  • 조회 수 1900

2009년 1월29일 다시 베다니로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니라.(11:11)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뒤 잠시 성전에 머물렀다가 날이 저물자 곧 예루살렘을 빠져나왔다고 합니다. 나귀새끼를 구하는 장면이나 예루살렘 입성 장면에 비해서 입성 후의 설명은 너무 간략합니다. 예수님은 왜 급히 예루살렘 밖으로 나오셨을까요?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머물 곳이 없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예루살렘은 ...

1월28일 호산나!(2) [2]

  • 2009-01-27
  • 조회 수 1855

2009년 1월28일 호산나!(2)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11:10)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호산나를 중심으로 구원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선물이라는 어제의 묵상에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혀 없을까요? 이게 좀 어려운 질문입니다. 궁극적인 차원에서 말한다면 마틴 루터의 ‘솔라 그라티아’ 개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구원은 하나님의 은총이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이는 마치 어린아이가 밥 먹는 ...

1월27일 호산나!(1) [2]

  • 2009-01-26
  • 조회 수 1845

2009년 1월27일 호산나!(1)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11:9)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고 외쳤습니다. 여기서 호산나는 “구원하소서.”라는 뜻인데, 유대교에서 제사의식에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특히 초막절에 유대인들은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이 외침은 왕에게 자비를 구하는 외침으로도 등장합니다.(삼하 14:4, 왕하 6:26) 또한 기독교의 예배의식에도 도입되었습니다. 우리...

1월26일 겉옷과 나뭇가지

  • 2009-01-25
  • 조회 수 1798

2009년 1월26일 겉옷과 나뭇가지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11:8) 이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이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사람들은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깔았다고 합니다. 신약성서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행동을 한 사람들은 예루살렘 주민들이 아니라 갈릴리에서부터 예수님을 따라온 이들이라고 합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는지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이렇게는 추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간 뒤 저물 때 곧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

1월25일 나귀새끼(5) [2]

  • 2009-01-24
  • 조회 수 1859

2009년 1월25일 나귀새끼(5) 나귀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11:7)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위한 준비가 이제 끝났습니다. 제자들은 나귀새끼 등에 자신들의 겉옷을 얹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예수님이 올라타셨습니다. 이런 모습을 사실적으로만 본다면 조금 우스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큰 나귀도 아니고 나귀새끼를 서른 살의 남자가 탔다는 겁니다. 나귀새끼가 좀 힘들어 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그 위에 올라탄 사람도 좀 불편했겠지요. 혹시 2천 년 전 사람들은 ...

1월24일 나귀새끼(4)

  • 2009-01-23
  • 조회 수 1464

2009년 1월24일 나귀새끼(4)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11:6) 악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은 아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큰 섭리 안에 들어 있다는 어제의 묵상을 조금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이런 주장은 자칫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우선 다음과 같은 오해가 가능합니다. 이 세상의 악을 하나님이 나름의 방식으로 처리하신다면 우리는 그 악에 저항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 가능합니다. 완벽한 무저항주의 말입니다. 지난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이런 무저항주의는 주로 소종파를 통해서 계속해...

1월23일 나귀새끼(3) [4]

  • 2009-01-22
  • 조회 수 1896

2009년 1월23일 나귀새끼(3)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11:4,5) 나귀새끼 이야기는 예수님이 제자 두 명에게 말씀하신 그 내용과 똑같이 진행됩니다. 제자들이 그 마을에 들어가서 보자 나귀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었다고 합니다. 제자들은 매여 있는 나귀새끼를 풀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인 듯한 사람들이 제자들에게 왜 나귀새끼를 푸느냐고 물었습니다. 마가복음 기자는 이런 글쓰기 방식으로...

1월22일 나귀새끼(2)

  • 2009-01-21
  • 조회 수 1557

2009년 1월22일 나귀새끼(2)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11:3) 공관복음에 묘사된 나귀를 얻는 과정이 지나칠 정도로 세밀하다고 어제 말씀드렸습니다. 위 구절에 이르면 그것이 극에 달합니다. 제자들이 묶여 있는 나귀새끼를 풀어오려고 할 때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왜 이렇게 하느냐?” 하고 물으면 “주가 쓰시겠다.”고 하라는 것입니다. 별로 중하지 않은 이야기를 이렇게 풀어가는 데에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겠지요. 제 생각에 그 사정은 두 ...

1월21일 나귀새끼(1)

  • 2009-01-20
  • 조회 수 1768

2009년 1월21일 나귀새끼(1)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고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11:2)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장면은 보기에 따라서 조금 희극적이긴 합니다. 나귀 새끼를 탄 유대의 젊은이를 중심으로 그의 추종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둘러서서 환호성을 지르며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아마 부근의 많은 사람들은 큰 구경이 난 것처럼 모여들었을지 모릅니다. 여기서 나귀 새끼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이 나...

1월20일 아, 예루살렘!(3)

  • 2009-01-19
  • 조회 수 1479

2009년 1월20일 아, 예루살렘!(3)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11:1) 예수님의 공생애는 갈릴리에서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까지의 여정으로 이루어집니다. 갈릴리가 출발점이고 예루살렘이 종착점입니다. 갈릴리에서 크게 각광을 받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선포가 예루살렘에서는 매도당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런 문제는 어떤 사실을 근거로 해서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서술하고 있는 복음서는 그런 사회학적인 ...

1월19일 아, 예루살렘!(2)

  • 2009-01-19
  • 조회 수 1504

2009년 1월19일 아, 예루살렘!(2)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11:1)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오지 않고 갈릴리와 사마리아 등지에서만 활동하셨다면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역사에서 ‘만약’은 없습니다. 역사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변화무쌍한 사건이기에 우리는 그런 가정법으로 역사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오셨다는 사실만 분명한 역사가 된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그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고, 부활이 이어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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