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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009년 1월4일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1)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10:47)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에 대한 호칭이 ‘다윗의 자손’으로 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호칭은 이 장면에 썩 어울리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호칭이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과 민족 전체를 향한 구원 활동에 연관된 것이지 질병 치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호칭에는 가르침이나 귀신을 제어하는 권한 등, 여러 전통도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지 이 호칭에는 예수님을 향한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합니다.
오늘 우리가 정작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목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바디매오는 전적으로 주님의 도움만을 기다려야 할 처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과 거래나 흥정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여러분은 이 바디매오의 상황이 가련하게 보일지 모르겠군요. 일단 그렇게 보이는 건 당연합니다. 시각 장애인에다가 거지라고 하는군요. 그런데 이런 점도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도우심에만 자기의 운명을 걸 수 있는 영혼이 가장 순수하다는 거지요.
우리는 이런 순수한 영혼을 소유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왜냐하면 나름으로 잘난 게 좀 있거든요. 정확히 말해서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게 좀 있거든요. 뭔가 넘치는 사람은 넘치는 방식으로, 뭔가 모자란 사람은 모자란 방식으로 자기의 업적에 의존하고 있거든요.
그렇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가능합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소중한 기도인 “키리에 엘레이송”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10:47)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이렇게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에 대한 호칭이 ‘다윗의 자손’으로 되어 있습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호칭은 이 장면에 썩 어울리는 게 아니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이 호칭이 이스라엘 민족의 해방과 민족 전체를 향한 구원 활동에 연관된 것이지 질병 치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호칭에는 가르침이나 귀신을 제어하는 권한 등, 여러 전통도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지 이 호칭에는 예수님을 향한 초기 기독교의 신앙고백이 담겨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합니다.
오늘 우리가 정작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목은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입니다. 바디매오는 전적으로 주님의 도움만을 기다려야 할 처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주님과 거래나 흥정을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의 자비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여러분은 이 바디매오의 상황이 가련하게 보일지 모르겠군요. 일단 그렇게 보이는 건 당연합니다. 시각 장애인에다가 거지라고 하는군요. 그런데 이런 점도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 가장 행복할 수 있다는 거지요. 하나님의 도우심에만 자기의 운명을 걸 수 있는 영혼이 가장 순수하다는 거지요.
우리는 이런 순수한 영혼을 소유하기가 어려울 겁니다. 왜냐하면 나름으로 잘난 게 좀 있거든요. 정확히 말해서 그렇게 착각하고 있는 게 좀 있거든요. 뭔가 넘치는 사람은 넘치는 방식으로, 뭔가 모자란 사람은 모자란 방식으로 자기의 업적에 의존하고 있거든요.
그렇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가능합니다. 기독교 전통에서 가장 소중한 기도인 “키리에 엘레이송”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는 간절함으로
모든 것을 내려놓는 자리로 가려합니다.
참 어렵더이다. 그러나 그 순간의 기쁨과 평안이 깊더이다.
첫 주일의 만남의 기쁨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자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