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16일- 민중 (3) -정체성-

조회 수 2655 추천 수 36 2006.07.16 23:27:53
2006년 7월16일 민중 (3) -정체성-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니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막 1:45)

민중신학이 말하는 민중은 누구일까요? 한국의 대표적 신학이라 할 민중신학의 역사가 최소한 40년은 흘렀지만 민중에 대한 개념 정리는 여전히 모호합니다. 나름으로 개념규정이 나오기는 했지만 아직은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제가 아는 한 그렇습니다. 상식적으로만 말한다면 이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의 사람들이 민중이겠지요. 마르크스가 말하는 프롤레타리아가 그들이겠지요. 이스라엘의 주류 역사로부터 벗어난 노예, 나그네, 소작농, 장애인, 소수인종, 난치병환자, 여자, 어린아이들, 낮은 계급의 군인 등등이 그들입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에 거론되는 사람들도 대개가 이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청결한 자, 화평케 하는 자,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들은 이 세상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들에게 복이 있다고(makarioi hoi) 말씀하셨습니다. 팔복은 복(구원)의 조건을 ‘믿음’이라고 말하지 않고 전혀 다른 삶의 태도를 제시합니다.
팔복의 우는 자들의 특징은 이 세상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이 세상과는 전혀 새로운 세계를 열망합니다. 그들은 이사야 예언자의 노래에서 볼 수 있듯이 사자와 어린 양이 함께 뛰노는 그런 상상력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오직 위에서 수직적으로 내려오는 혁명과 반역을 기다립니다.
팔복에서의 핵심은 하나님의 통치를 철저하게 기다린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자신의 업적을 남기는 일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이들이겠지요. 그래서 마르크스는 민중들, 즉 프롤레타리아로부터의 구원을 말했습니다. 그들이 선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역사 변혁의 단초가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 사회주의에서 이 마르크시즘이 실패한 이유는 원래 마르크스의 생각과 달리 프롤레타리아를 절대화했다는 데에 놓여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역사혁명을 갈망하는 민중들과 달리 이 사회에는 분명히 현실에 안주하는(status quo)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이 살기 좋다고 합니다. 아주 쉽게 안락한 삶에 자족합니다. 아무 것도 불편하거나 양심에 걸리거나 아쉬운 게 없습니다. 현재의 경제적인 양극화 앞에서도 아무런 불편이 없습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서 자신의 안전망을 확고히 하는 데만 마음을 쏟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가까운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학의 동료 교수 중에서 현재의 정부를 욕하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데 그 중의 한 사람은 이런 불평을 하더랍니다. 노 정권 때문에 자기가 사놓은 강남 집값이 충분히 오르지 않았다는 불평이 그것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혹시 반대로 말한 걸 잘못 들은 거 아니냐, 했더니 사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소위 민중이라고 일컬어질 만한 사람들 중에서도 위의 대학 교수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런 건 신분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에게 나타나는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적인 용어로 말한다면 그것은 죄입니다. 자기 집중이며, 자기 경향성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숙명적으로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온전한 통치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는 아직도 민중의 실체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걸 분석할 필요도 없을지 모릅니다. 그냥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일 테니까 말입니다.

주님, 우리는 주님의 통치를 실제로 기다리는 사람들인가요?

[레벨:7]늘오늘

2006.07.17 02:58:46

이 세상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 만족하는 사람들도, 아닌가봅니다.
혁명과 반역에 참여하는 이들은,
참된 만족/보화를 발견하는/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닐까요.
그들은 이미 느끼고/누리고 있는 것일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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