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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인다는 말에 오해가 따를 수 있다. 삶을 느슨하게 대하거나 허투루 대해도 좋다는 뜻이 아니다. ‘이 물건은 내가 돈 주고 산 게 아니라 선물로 받은 거니까 대충 쓰다 버리면 된다.’는 식이면 곤란하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는 바울의 권면은 삶이 하나님이 선물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에게 통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매 순간을 삶의 절정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본다. 삶의 절정에 서려면 바울의 권면처럼 공연한 것에 자기의 삶을 소비하지 않아야한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인은 거룩한 이기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다.
목사는 일반적으로 바쁘게 산다. 신자들도 바쁘게 목회하는 목사를 좋아한다. ‘다른 건 몰라도 우리교회 목사님은 교회와 신자들을 위해서 정말 열심히, 그리고 바쁘게 산다.’는 말을 칭찬 삼아 하는데, 실제로 그건 욕이다. 그런 칭찬에 부응하려다가 목사의 영적 에너지는 고갈된다. 신자들을 영적으로 돌보기 위해서 불철주야 뛰는 목사들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일로 바쁜 목사도 많다. 교회 정치로 바쁘다. 노회장이나 총회장 선거에 뛰어들어서 바쁘다. 부흥회 등의 집회의 강사로 뛰느라 바쁘다. 불행한 일이다. 목사의 삶은 기도와 말씀에 전적으로 묶여야 한다. 그게 목사가 자기 삶을 허투루 보내지 않는 것이다. 기도와 말씀은 형식적인 기도와 말씀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다양한 독서와 글쓰기, 특히 신학책 읽기도 기도와 말씀에 포함된다.
삶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내공은 인격과 교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에서 주어진다. 하나님이 선하고 전능하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만 있다면 다른 데 한눈팔지 않고 삶 자체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모두 이것에 관한 증언이자 고백이다. 예를 들어 고대 유대인들에게 이에 관해서 알려진 가장 강렬한 경험은 광야의 만나 사건이다. 출애굽 이후 유대인들은 미디안 광야라는 실존 앞에 서게 되었다. 먹을거리가 보장되지 않는 곳이 광야다. 나일 강 유역의 비옥한 고센에 정착해서 어느 정도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이 살다가 하루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유목민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만나를 얻게 되었다. 만나는 미디안 광야의 어떤 식물에서 얻을 수 있는 열매라고 한다. 평소에는 거들떠보지 않던 그것을 그들은 하나님이 선물로 내려주신 먹을거리로 생각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생존을 지켜주신다는 신앙고백이다. 유대인들은 유월절과 초막절 등등의 절기를 지키면서 조상 대대로 그 이야기를 삶의 중심으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