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5일 키리에 엘레이송!

조회 수 3188 추천 수 16 2008.08.04 23:25:22
2008년 8월5일 키리에 엘레이송!

귀신이 그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막 9:22)

간질병 아이와 그 아버지가 처한 형편은 한계 상황입니다. 그 병을 고치기 위해서 지난 세월 그들이 견뎌온 삶의 무게는 지구와 같았겠지요. 이제는 더 이상 할 것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주님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한계 상황에 직면했을 때만 우리는 참된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본회퍼가 지적했듯이 하나님을 자동응답기로 생각해서 자질구레한 모든 것을 얻어내려는 태도는 성숙한 신앙이 아닙니다. 성숙한 신앙보다는 어린아이 같은 신앙이 더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이 두 명제는 서로 대립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을 의미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한다는 말이지 미숙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 한계 상황이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신체적인 장애나 불치병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궁극적인 생명 앞에서 자기의 생명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는 분명히 한계상황 안에 들어간 사람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절대적 생명을 향한 열망을 가리킵니다.
둘째, 예수님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스승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를 드려야 할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 기독교인들도 모두 작은 예수가 되자고 말하는데, 그건 큰 착각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고 종말론적으로 우리의 생명을 완성시켜주실 분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바람직한 기도는 “키리에, 엘레이송”, 즉 “주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입니다.

[레벨:4]알고파

2008.08.05 12:30:07

목사님,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인간의 archetype 으로서의 예수는 더 강조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다만 한국교회에서 '아주 착하고 지극히 선한 사람'의 투사(projection)로서
예수를 닮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방향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서방교회 전통에서는 인간을 너무 죄인으로 비하하고
예수와 인간의 간격이 마치 신과 인간의 간격처럼 된 것은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동방처럼 신화(deification)를 주요 교리로 삼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자기를 반성하고, 자유를 가지며, 자신의 초월을 대망하는 존재라는 것은
현재의 서방교회 특히 한국 개신교에서는 잊혀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로고스와 위격적 결합을 한 예수가
감히 인간과 같은 차원이라고 말하면 안되겠지만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을 가지고 신과 유사(Similitudo)할 수 있는
불사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은 그냥 말만 거창한 것은 아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는 바른 방향이라면 "작은예수"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신학도 안 한 사람이 몇 마디 아는 것 가지고 아는 척해서 죄송합니다..

[레벨:0]청개구리

2008.08.05 13:28:43

말로야 '작은 예수'가 아닌 '큰 예수'가 목표가 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우리 믿음의 연약함,동행에 대한 건망증, 육신의 곤고함을 생각하면, 그리스도의 푯대를 향한 한 발자욱조차 힘들때가 많습니다
'키리에 엘레이숑'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8.05 23:29:39

알고파 님의 대글에 전문적인 용어가 많이 나오는 걸 보면
신학과 종교학에 과한 책을 많이 접하신 것 같네요.
제기하신 문제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게 못됩니다.
아주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요.
하나님의 형상이 무언지,
하나님을 닮아감이 무언지를 우리가 말할 수는 없거든요.
그래도 그런 개념들을 통해서 우리가
기독교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건 필요합니다.
그런 것에 대한 논의는 지난 기독교 2천년 역사에서
정말 많이 논의되었지요.
교부들이 그것에 대해서 예민하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기독교 교리가 형성된 거지요.
인간의 영혼 불멸성에 근거해서 인간 불사론을 주장할 수는 있겠으나
아주 위험한 사상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부활사상보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가깝기 때문이지요.
어쨌든지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바로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가 중보자, 화해자라는 것은 인간과 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뜻이에요.
이런 걸 이야기 하자면 또 끝이 없겠군요.
우리가 이 현실에서 예수를 구체적으로 뒤따르는 제자로 살아야 한다는 차원이라고 한다면
'작은 예수'라는 말이 가능하겠으나,
우리가 메시아이신 예수의 일을 감당해야 한다는 차원이라고 한다면
그 말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좋은 밤.

[레벨:4]알고파

2008.08.06 12:00:04

제 수준은 목사님께서 번역하신 사도신경해설도 이해하기 힘겨운데요..
희망의 신학은 반쯤 읽다 포기했구요.. 그러면서도 너무 저도 모르는 단어를 열거해 버렸네요..
아는 척 너무 한다고 집사람에게 맨날 혼나면서도 정신 못차리네요..
저에게는 동방신학의 신화, 불사, 하나님의 형상 등이
매우 인상적 이었고 인간을 보는 새로운 가능성을 주었던 것 같구요.
개인적으로 '자기경멸'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서 제 자신을 긍정하게 되면서
저 자신이 많은 좋은 변화를 겪었던 것 깉습니다.
그것이 저는 성령의 역사라고 믿고 있구요.
인간으로서 예수가 저에게 의미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대표인 예수를 궁극적으로 긍정하셨다는 것이구요..
물론 목사님 말씀처럼 모든 인간이 메시아가 되는 건 말이 안되겠지요..^^
저 개인에게는 그 하나님 앞의 긍정이 너무 중요한 것 같습니다.
저 자신이 저를 받아주는 근거도 되기 때문이라서
너무 과한 말들을 쏟아낸 것 같습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8.06 16:39:40

알고파 님,
하나님 앞의 긍정은 당연합니다.
그냥 긍정이 아니라 '큰 긍정'이지요.
우리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바로 긍정이지요.
그런데요,
우리는 여기서 자칫 길을 잃을 염려가 있답니다.
오스틴의 <긍정의 힘>으로 말려드는 거지요.
사람은 누구나 인정하고 긍정해주면 좋아하는 식의,
그런 심리적 접근이라고 한다면
이 긍정은 성서적 전통과 크게 어긋납니다.
기독교의 역사가 인간을 경멸하지 않는답니다.
그건 지난 역사에서 일시적으로 그런 것뿐이고,
실제로 기독교 인간론은 하나님이 외아들을 버리시기까지
사랑하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자기 경멸은 아예 말도 안 되지요.
여기서는 우리가 바르트에게 배울 게 있군요.
인간의 불가능성과 하나님의 가능성이
변증법적으로 작동함으로써
인간 구원의 길이 열린다고 말하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인간의 대표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알고파 님의 생각인지,
아니면 어디서 따온 건지 궁금하군요.
초기 기독교의 기독론 논쟁에서
양자설과 성육신론이 크게 다투었는데,
대표 운운은 양자설에 가깝군요.
기독교 정통은 성육신론이랍니다.
신학 논쟁에서 정통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거나,
그런 결정은 모두 정치적 헤게모니에 의해서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요,
그런 주장은 일 부분에서만 옳지
근본적으로는 옳지 않습니다.
이것은 역사와 그 해석, 더 나아가서 계시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과 연관되는데,
오늘 우리가 거기까지 말하기는 힘들겠지요.
<희망의 신학>을 반이나 읽었어요?
혼자서 읽기 힘들 때 옆에서 도와주면 훨씬 진도가 잘 나갈텐데,
아쉽군요.
한국의 평시도들이 신학의 변방에 속한 책이 아니라
그 중심에 들어 있는 책을 읽을 '그날이 오면' 교회가 확 달라지겠지요.
주의 은총이.
그 중심에 들어와서

[레벨:4]알고파

2008.08.06 20:34:33

목사님.. 긍정의 힘은 정말로 제가 싫어하는 책이구요.. 읽어 보지도 않았지만..
저에게 긍정이란 인간은 죄인이기도 하지만
초월을 추구하고 영원을 지향하는 본질도 가지고 있다는 면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구요.
제가 제대로 경험했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수십년 동안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경험에서 배운 인간은
항상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비하하고 경멸해야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죄인이면서 의인이고 피조물이지만 자신을 초월하고 영원을 지향합니다.
후자가 너무 강조되지 않은 교회적 현실에 대한 반감이 사실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항상 죄인으로 돌아가고 버러지 같은 존재로 있을 때는
저에게는 변화는 커녕 반복되는 후회와 자괴감만 있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부족함이 많지만 인간의 하나님형상으로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하나님께 용납된 나 자신을 받아주고, 나 자신이 영원을 지향하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종말론적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를 따라 어떠한 존재로든 변화할 존재로 나 자신을 대할 때
그동안 거슬리고 힘들었던 것에서 많은 자유함을 가질 수 있었고
또한 피조물로서 어떠한 존재가 되든지 받아들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신학은 잘 모르지만 아마도 칼벵이나 칼바르트한테는 혼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지금 제 단계에서는 동방의 신화의 교리에 더 끌리는 것이 사실입니다.
내년이 되면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
하여간 dabia 를 통해서 많은 배움이 있어서 목사님께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대전에 살고 있는데 대구까지 한 번 가서 뵙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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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8.06 23:14:48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는 가르침은 분명히 잘못된 겁니다.
기독교에 죄론이 있기는 하지만,
다른 데서도 내가 누누이 강조했던 것처럼,
그 죄론은 하나님의 은총의 빛 아래서만 의미가 있답니다.
탕자의 비유도 탕자의 회개가 중요한 게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이 중심 주제이듯이 말입니다.
칼빈과 바르트가 아주 엄격한 신학자처럼 보이는 것은
잘못 소개되었기 때문입니다.
칼빈의 경우는 복잡한 문제들이 많이 연루되어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바르트는 은총의 신학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사실 칼빈에게도 성화가 중심 주제였다고 보아야겠지요.
한국교회에서 인간론이 비관적으로 적용되는 교회사적 이유는
영국의 청교도 영성이,
특별히 미국을 통해서 들어온 부흥운동이 결정적이랍니다.
이런 건 대충 아시지요?
기독교 중심 신학은 생명 지향적이기 때문에
아주 역동적일 수밖에 없답니다.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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