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6일 믿음의 능력(1)

조회 수 2003 추천 수 21 2008.08.05 23:15:08
2008년 8월6일 믿음의 능력(1)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한국교회에서 가장 자주 인용되는 성서 구절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의 본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믿는 자에게는 못할 일이 없다.”는 구절이 신자들에게 매력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그 구절이 기독교 승리주의에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이겠지요. 이 세상에서 승리하고 싶다는 생각은 인지상정입니다. 제가 즐기는 테니스만 해도 그렇습니다. 땀을 흘리면서 테니스공을 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가 있지만, 이것을 현장에서는 ‘난타’라고 하는데, 승부를 가리는 게임을 하는 게 더 재미있고, 이왕이면 게임에서 이기는 게 더 즐겁습니다.
문제는 승리주의에 완전히 사로잡힌다는 데에 있습니다. “예수 성공, 불신 실패” 구도에 숙명적으로 매달리는 신앙이 그것입니다. 이런 신앙이 한국교회에 구조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대형교회는 더 심하지만, 작은 교회도 역시 여기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 믿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성공해야만 복음이 활발하게 전파되는 것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심지어 어떤 목사님들은 자기가 섬기는 교회에서 장관도 나오고, 스타도 나오고, CEO도 나오게 해달라고, 더 노골적으로는 십일조 1억 원 할 수 있는 교인들이 나오게 해달라고 기도하더군요. 한국교회가 총체적으로 승리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신앙이 왜 잘못인지에 대해서 다른 건 접어두고 그것이 현실을 왜곡한다는 것만 생각해도 분명한 답이 나옵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다고 하더라도 이 현실에서 늘 승리하는 게 아닙니다. 거꾸로 믿음이 없는 사람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기독교 승리주의는 일종의 요행에 기울어진 삶의 태도입니다.

[레벨:22]머리를 비우고

2008.08.06 08:45:06

SBS 신의길 인간의 길을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대학 입시철에 열심히 기도하시던 분들...
나중에 기자의 질문에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아이에게
평소 공부했던 것들 더 잘 생각나게 하시고 지혜도 주실 것이기 때문에..."라는 요지의 발언 이었습니다.

꽤 오래전에 청년부에서 뜬금없이 회장이 "출석 100명이 목표입니다." 라며
청년회 일년 비전으로 제시 하며 기도 하자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교회 본당 입구에도 "000명 돌파의 해"라는 선동적 문구를 보면서 마음을 다짐하던 때도 있었죠.
저도 그렇게 그것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믿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숫자나 통계, 실적이 주는 유혹(?)에서 벗어나고 있는 중입니다만...

평소 교회에서 잘 듣던 기도 부탁들은 이런겁니다.
아픈 것 치료하게 해 달라고 기도좀 해 주세요....
이번에 진급 인데 잘 되도록 기도해 주세요.
성공하게 기도해 주세요...

이렇게 보니...
지금까지 단 한번도 실패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을 본 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경쟁 상대의 실패가 감사의 조건이 되기도 하죠...

그렇다면 성공을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나 본능에 가깝다고 보는게 옳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본능적 욕구를 제거 하는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그럼... 목사님....
믿는 자에게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예수님 말씀은
지엽적이고 일부 소수 인원에 국한된 말씀인가요?
대안은 각자 알아서 찾는 것인가요? 아니면 차후에 제시해 주시는 것인가요?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8.06 17:06:09

머리를 님,
성서가 명시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사실과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더 근원적인 사태를 구분하는 게
성서읽기에서 어려운 일이면서 핵심적인 일입니다.
믿는 자에게 능히 못할 일이 없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는
이 대목의 묵상을 시작하면서 나도 계속 마음에 담아 둔 것입니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시도는 하게 될 겁니다.
좋은 하오.
profile

[레벨:28]정성훈

2008.08.07 11:24:54

정목사님 말씀에,

성경은 달을 가르키는 손이다.

핵심은, 손이 가르키는 달을 봐야한다.

손을 가지고 말이 많으면 수박겉핡기다.

손에 관심을 버리고 달에 촛점을 둬야한다.

그러면 성서의 세계가 열릴 것이다.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9월13일 누가 크냐?(1) [3]

  • 2008-09-13
  • 조회 수 1998

2008년 9월13일 누가 크냐?(1) 그들이 잠잠하니 이는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 하고 쟁론하였음이라. (막 9:33) 가버나움으로 들어오면서 서로 토론한 게 뭐냐 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서 제자들은 아무 소리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고난 받고 죽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두 번이나 전해들은 가운데서도 “누가 크냐?” 하는 말싸움을 벌였으니까요. 아무리 철딱서니가 없는 제자들이라고 하더라도 좀 부끄럽지 않았겠어요? 철딱서니 없다는 표현을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당시 제자들...

9월12일 가버나움에서 [4]

  • 2008-09-12
  • 조회 수 2345

2008년 9월12일 가버나움에서 가버나움에 이르러 집에 계실새 제자들에게 물시되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하시되 (막 9:33) 복음서에서 예루살렘을 제외하면 가버나움이 가장 자주 나오는 마을 이름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체포당하고 심문당한 뒤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이야기의 중심에 있어서 잘 알려진 것뿐이지 예수님이 실제로 활동한 기간만으로 한다면 가버나움이 훨씬 더 비중이 높습니다. 마태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가버나움에서 사신 적도 있습니다.(마 4:13) 제2의 고향이라 할 만합니다. 예수님...

9월11일 제자들의 두려움(5) [9]

  • 2008-09-10
  • 조회 수 1883

2008년 9월11일 제자들의 두려움(5)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막 9:32)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예수의 부활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야겠지요. 부활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무너지는 것이니까요. 이게 옳은 말이기는 하지만, 부활이 얼마나 낯선 것인지, 그래서 얼마나 두려운 것인지를 먼저 심각하게 생각해야합니다. 일단 신학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면 부활은 종말론적으로 은폐된 궁극적인 생명입...

9월10일 제자들의 두려움(4)

  • 2008-09-09
  • 조회 수 1471

2008년 9월10일 제자들의 두려움(4)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막 9:32) 하나님 경험은 하나님을 낯설게 경험하는 거라는 어제의 묵상에 대해서 보충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존재와 세상과 하나님은 낯설게 경험한다고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주 친근하고 익숙하게 경험되는 분이 아니냐, 하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수님을 영접했으며, 그 예수님에게 기도드리고, 매일 큐티를 통해서 그분과 대화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어떤 부흥사는 길을 걸을 때 한쪽 손을 비워두...

9월9일 제자들의 두려움(3) [5] [1]

  • 2008-09-08
  • 조회 수 1783

2008년 9월9일 제자들의 두려움(3)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막 9:32) 거룩한 두려움, 또는 영적 두려움이라는 말이 어떤 분들에게는 추상적으로 들릴지 몰라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겠습니다. 근본적으로 이것은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영적 현상입니다. 그것을 어떤 한 가지 형태로 설명하거나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마나 하나님 경험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우리의 범주 안에 가둘 수 없는 것처럼 그분과의 만남에서 경험되는 두려움을 실증적...

9월8일 제자들의 두려움(2) [11]

  • 2008-09-07
  • 조회 수 1802

2008년 9월8일 제자들의 두려움(2)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막 9:32) 어제의 묵상에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은 신앙의 토대입니다. 구약성서에도 이런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모세의 호렙산 경험이 가장 전형적인 두려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 산에서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어떤 신적 존재를 경험하고 신발을 벗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이 이집트 파라오의 병거와 마병들을 홍해에서 궤멸시킬 것을 본 이스라엘도 야훼를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9월7일 제자들의 두려움(1) [4]

  • 2008-09-06
  • 조회 수 2119

2008년 9월7일 제자들의 두려움(1)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막 9:32) 예수님의 고난, 죽음, 부활에 대한 말씀을 제자들이 깨닫지도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에게 일어날 그런 일들이 바로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제자들이 알고 있었다면 그렇게 반응을 보일 리가 없었을 텐데요. 앞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붙들고 항변했다고까지 합니다.(막 8:32) 이런 일련의 보도를 통해서 우리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정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

9월6일 기독교 신앙의 양면성(3) [4]

  • 2008-09-05
  • 조회 수 1933

2008년 9월6일 기독교 신앙의 양면성(3)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막 9:31) 우리는 예수님이 ‘이미’ 메시아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아직’ 완전히 실증적인 차원에서 드러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와 ‘아직’이라는 이 두 사이의 긴장에는 타종교 문제도 들어 있습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들에게도 해당되...

9월5일 기독교 신앙의 양면성(2) [3]

  • 2008-09-04
  • 조회 수 1888

2008년 9월5일 기독교 신앙의 양면성(2)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막 9:30) 어제 묵상의 마지막 단락인 위로와 불안이 무슨 뜻인지 보충해야겠습니다. ‘위로’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우리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에서만 참된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에게는 위로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위로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림자와 같은 위로입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그 사실에서만 우리는 참...

9월4일 기독교 신앙의 양면성(1) [2]

  • 2008-09-03
  • 조회 수 2162

2008년 9월4일 기독교 신앙의 양면성(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막 9:30)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갈릴리를 지나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이유를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 때문이라고 보도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앞에서 몇 번 확인했듯이 메시아 비밀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비밀이 유지되려면 가능한 대로 사람들이 그 사실을 눈치 채...

9월3일 은밀한 거동 [5]

  • 2008-09-02
  • 조회 수 2084

2008년 9월3일 은밀한 거동 그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 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막 9:30) 마가는 예수님이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바로 앞에서 거론된 세 가지 중요한 사건, 즉 “주는 그리스도시다.”는 베드로의 고백과 예수님에게 일어난 변형 사건, 그리고 간질병 아이 치유가 일어난 곳은 갈릴리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 지역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들어갈 생각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곳을 떠나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갈릴리를 통과해서 사마리아를 거...

9월2일 기도의 능력(11) [5]

  • 2008-09-01
  • 조회 수 2027

2008년 9월2일 기도의 능력(11)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어제 성문기도와 기도문 읽기에 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저는 좋은 기도문의 한 예로 어거스틴의 기도문을 한편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목은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입니다. 오 주님,/ 누가 나를 이끄시어/ 주님 안에서 쉬게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 마음에 주님을 모시게 하여/ 내 마음을 취하시도록 하고/ 나로 내 죄악을 잊게 함으로/ 나의 유일한 선(善)이 되시는 주님을/ 포용하게 하...

9월1일 기도의 능력(10) [4]

  • 2008-08-31
  • 조회 수 2947

2008년 9월1일 기도의 능력(10)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기도에 관한 항목을 마무리하면서 자유기도와 성문기도에 대해서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자유기도는 말 그대로 기도를 드리는 그 순간에 집중해서 자유롭게 기도를 드리는 형식이며, 성문기도는 기도문을 작성해서 드리는 형식입니다. 자유기도라고 하더라도 공적인 모임의 대표기도라고 한다면 기도의 윤곽을 준비하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성문으로 드리는 기도와는 차이가 많습니다. 제 생각에 주일공동예배는 ...

8월31일 기도의 능력(9) [4]

  • 2008-08-30
  • 조회 수 2226

2008년 8월31일 기도의 능력(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판넨베르크가 서른두 살의 젊은 신학대학 교수로 활동하던 1960년 5월9일에 부퍼탈 신학교 아침 기도회에서 ‘기도’(시 143:1-12)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 내용을 여기 발췌했습니다. 첫째, 우리가 오늘 이 시편 말씀에서 우선적으로 배워야 할 점은 우리가 어떤 토대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

8월30일 기도의 능력(8)

  • 2008-08-29
  • 조회 수 1882

2008년 8월30일 기도의 능력(8)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단도직입적으로 물어야겠군요. 기도의 능력이라는 건 아예 없는 걸까요? 기도의 능력이라는 것이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일 뿐이라고 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어느 한 순간에도 기도를 소홀하게 취급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신앙인들, 신학자들, 영성가들, 신비주의자들, 그리고 설교자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

8월29일 기도의 능력(7) [8]

  • 2008-08-28
  • 조회 수 2205

2008년 8월29일 기도의 능력(7)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기도에 대한 앞서의 묵상에서 기도에 대한 생각이 더 혼란스러워진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간질병을 고친 기도의 능력이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라 하더라도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면 바로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 하고 생각던 분들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이 완전히 몸에 각인된 분들에게는 저의 설명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8월28일 기도의 능력(6) [10]

  • 2008-08-27
  • 조회 수 2614

2008년 8월28일 기도의 능력(6)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간질병 아이에 얽힌 이야기 끝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오늘 한국교회의 기도가 아주 선정적이고 기복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간질병 아이가 치유된 것이 기도의 능력이라는 오늘 본문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게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문제는 ...

8월27일 기도의 능력(5) [3]

  • 2008-08-26
  • 조회 수 2128

2008년 8월27일 기도의 능력(5)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앞에서 저는 가장 모범적인 기도는 ‘주기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대해서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우리가 이 주기도를 바르게 이해하기만 한다면 바리새인의 외식이나 이방인의 중언부언과는 전혀 다른 기도의 영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기도’를 해설하는 데만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미 주기도문 해설을 책으로 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깊이 들어가지 말고 큰 틀...

8월26일 기도의 능력(4) [5]

  • 2008-08-25
  • 조회 수 2628

2008년 8월26일 기도의 능력(4)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주님은 바리새인과 이방인들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외식의 기도, 중언부언의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바리새인의 외식과 이방인의 중언부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기도 문제를 생각할 때도 역시 중요한 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

8월25일 기도의 능력(3) [3]

  • 2008-08-24
  • 조회 수 2676

2008년 8월25일 기도의 능력(3)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기도’에 관한 가장 중요한 성경구절은 ‘주기도’를 포함하고 있는 마태복음 6:5-15절이라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이 구절이 지적하고 있는 기도의 잘못된 행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기도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전형인 외식하는 기도입니다. 이를 경계하신 주님은 골방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기도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본다면 오늘 우리에게 관행이 ...

TEL : 070-4085-1227, 010-8577-1227, Email: freude103801@hanmail.net
Copyright ⓒ 2008 대구성서아카데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