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0일 믿음의 능력(5)

조회 수 1885 추천 수 18 2008.08.09 22:43:06
2008년 8월10일 믿음의 능력(5)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막 9:23)

승리주의가 기독교 신앙과 거리가 멀다는 앞서의 묵상과 “믿는 자에게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다.”는 본문이 대립하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표면적인 진술만 본다면 물론 대립하지만, 그 진술의 깊이로 들어가면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여기서 깊이로 들어간다는 말을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모든 텍스트는 깊이를 갖고 있답니다. 그림도 깊이가 있고, 악보도 깊이가 있습니다. 심지어 바둑의 기보에도 깊이가 있습니다.
깊이에는 ‘숨어 있다.’는 속성이 있습니다. 그 내부가가 보이지 않는 거지요. 모차르트의 악보에는 모차르트의 원초적 음악경험이 숨어 있고, 렘브란트의 그림이나 고흐의 그림도 역시 그렇지요. 그 숨어 있는 깊이를 밖으로 드러내는 행위가 바로 해석입니다. 그림, 음악, 시는 모두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성서 텍스트도 똑같습니다. 여기에는 성서 기자의 원초적 하나님 경험이 숨어 있기 때문에 그것을 밖으로 노출시키는 해석이 없으면 그 깊이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본문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믿기만 하면 불가능이 없다는 뜻으로 저 말씀을 했을까요? 그게 아니라는 건 분명합니다. 제자들이 못한 일도 많았습니다. 그런 걸 모두 믿음이 없는 탓으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믿음이 없어서 평생 질병을 몸에 달고 살았겠습니까?
마가복음 기자가 지금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가 그 대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 그의 믿음, 그의 사건이 중요합니다. 예수에게만 믿음이 가능하고, 예수에게만 모든 능력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위 본문에는 ‘우리’의 믿음과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과 능력에 대한 마가복음 기자의 고백이 숨어 있습니다.

[레벨:22]머리를 비우고

2008.08.10 18:13:36

우리의 믿음과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과 능력에 대한 고백이라는 설명이 충격입니다...
그렇다면 '믿는 자'에서 예수님의 그 믿음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사람에 대한 믿음 인가요?
아니면 예수님의 창조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인가요?
답을 알고 싶어하는 조급증에 질문 드려봅니다.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8.11 22:49:27

머리를 님,
우리의 믿음이 무엇인지, 궁금하지요?
제가 이 대목의 묵상에서 '믿음'을 낮추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조금 의아하게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교회 안에서 믿음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는 것처럼 배웠는데,
믿음을 상대화하니까요.
믿음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믿음의 대상을 인식하는 게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 인식의 방식이 반드시 고도의 신학이어야만 한다는 것도 아니구요.
유아가 어머니 가슴에 안겨서 어머니를 체온으로 느끼듯이
우리도 하나님을 특별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는 믿음이 중요한 거겠지요.
문제는 우리의 인식과 믿음이 늘 한정적이라는 거지요.
우리의 믿음 조차도 하나님에게 의존적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게 일반적으로 말하는 믿음과 다른 뭐냐, 하고 생각할 겁니다.
믿음을 자기의 주관성 안에 두지 말고,
하나님의 계시와 통치라는 기초에 두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위의 설명이 머리 님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못하겠군요.
그 질문에 직접인 대답을 드리면
예수님의 믿음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전적인 신뢰입니다.
그 나라, 그 통치가 임박했다는 사실에 대한 통찰이며, 인식이며, 신뢰입니다.
예수님 처럼 하나님 나라를 신뢰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만이 하나님 나라와 일치된 거지요.
그래서 그만이 그리스도가 되었으며, 아니 선재적으로 그리스도인 거지요.
좋은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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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일 기도의 능력(1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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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2일 기도의 능력(11)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어제 성문기도와 기도문 읽기에 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저는 좋은 기도문의 한 예로 어거스틴의 기도문을 한편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목은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입니다. 오 주님,/ 누가 나를 이끄시어/ 주님 안에서 쉬게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 마음에 주님을 모시게 하여/ 내 마음을 취하시도록 하고/ 나로 내 죄악을 잊게 함으로/ 나의 유일한 선(善)이 되시는 주님을/ 포용하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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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1일 기도의 능력(10)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기도에 관한 항목을 마무리하면서 자유기도와 성문기도에 대해서 한 말씀만 더 드리겠습니다. 자유기도는 말 그대로 기도를 드리는 그 순간에 집중해서 자유롭게 기도를 드리는 형식이며, 성문기도는 기도문을 작성해서 드리는 형식입니다. 자유기도라고 하더라도 공적인 모임의 대표기도라고 한다면 기도의 윤곽을 준비하기 마련이지만, 그래도 성문으로 드리는 기도와는 차이가 많습니다. 제 생각에 주일공동예배는 ...

8월31일 기도의 능력(9)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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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31일 기도의 능력(9)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판넨베르크가 서른두 살의 젊은 신학대학 교수로 활동하던 1960년 5월9일에 부퍼탈 신학교 아침 기도회에서 ‘기도’(시 143:1-12)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그 내용을 여기 발췌했습니다. 첫째, 우리가 오늘 이 시편 말씀에서 우선적으로 배워야 할 점은 우리가 어떤 토대에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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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29일 기도의 능력(7)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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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29일 기도의 능력(7)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기도에 대한 앞서의 묵상에서 기도에 대한 생각이 더 혼란스러워진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간질병을 고친 기도의 능력이 우리가 아니라 예수님의 것이라 하더라도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리면 바로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 아니냐, 하고 생각던 분들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신앙생활이 완전히 몸에 각인된 분들에게는 저의 설명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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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28일 기도의 능력(6)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간질병 아이에 얽힌 이야기 끝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오늘 한국교회의 기도가 아주 선정적이고 기복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간질병 아이가 치유된 것이 기도의 능력이라는 오늘 본문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게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문제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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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27일 기도의 능력(5)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앞에서 저는 가장 모범적인 기도는 ‘주기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에 대해서 이의를 달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우리가 이 주기도를 바르게 이해하기만 한다면 바리새인의 외식이나 이방인의 중언부언과는 전혀 다른 기도의 영성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주기도’를 해설하는 데만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많은 신학자들이 이미 주기도문 해설을 책으로 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깊이 들어가지 말고 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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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26일 기도의 능력(4)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주님은 바리새인과 이방인들을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외식의 기도, 중언부언의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있어야 할 것은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거꾸로 하면, 바리새인의 외식과 이방인의 중언부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의미입니다. 기도 문제를 생각할 때도 역시 중요한 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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