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8일 기도의 능력(6)

조회 수 2635 추천 수 11 2008.08.27 23:14:44
2008년 8월28일 기도의 능력(6)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간질병 아이에 얽힌 이야기 끝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분명히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오늘 한국교회의 기도가 아주 선정적이고 기복적이고 이기적인 것으로 변질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간질병 아이가 치유된 것이 기도의 능력이라는 오늘 본문은 명백한 사실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게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문제는 여기서 기도를 무엇으로 생각하느냐, 하는 게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복음서가 기도를 통해서 간질병 아이를 고쳤다고 말했으니 우리도 기도해서 그런 일을 행할 수 있도록 하자고 생각하는데, 이건 바른 성서읽기가 아닙니다. 성서 텍스트가 기도를 무엇으로 말하는지를 아는 게 일단 중요합니다. 그닐카(Gnilka)의 주석에 따르면 “기도를 곤경에 처한 다른 사람을 돕는, 절대적으로 확실하거나 마술적인 수단으로 평가한다면 이 가르침의 진지성은 상실될 것”리고 지적했는데, 저는 옳다고 봅니다. 기도는 오히려 “하나님을 향한 신앙”(Grundman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참된 신앙을 견지하셨던 예수님에게만 가능한 사건입니다.

바로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실제로 믿을 수 있었으며, 그만이 하나님에게 실제로 기도드릴 수 있었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신약성서는 예수님을 하나님과 하나가 된(identified) 분이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더 소급해서 창조 때에 이미 존재하신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 우리가 기도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를 드리지만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드릴 수 있습니다. 기도의 능력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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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8]정성훈

2008.08.28 01:53:13

우리의 기도 마지막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군요..

기도의 능력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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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돌파구

2008.08.28 07:44:57

고난 가운데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요?
울어야 하나요.불쌍히 여겨야 하나요.멍하니 하늘만 보나요.스트레스를 온 몸으로 채워야 하나요.
절망의 늪에서 연약한 나를 발견하나요.슬플때에는 기도가 않나와요.
하나님의 나라는 멀고,고난은 가까이에 있고.
현실에 문제를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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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26]돌파구

2008.08.28 07:50:00

내 고난은 그냥 나의 문제인가요?
그냥 혼자 창밖을 바라만 보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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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8.28 10:08:21

돌파구 님,
기도가 나오지 않을 정도의 고난 앞에서
제가 무슨 말씀을 드릴 수 있겠어요.
고난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려야겠지요.
사족으로만 한 마디 한다면,
고난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필요는 있답니다.
사랑하던 사람이 떠난 것인지,
사업이 망한 건지,
우울증에 걸린 건지,
불치병에 걸린 건지 ... 등등.
우리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도 있지만
지나치게 과장하는 고난도 있을 겁니다.
전자의 경우는 욥처럼 하소연 하면서 견디는 수밖에 없구요,
후자의 경우는 그 망상에서 벗어나야겠지요.
돌파구 님에게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모르지만,
힘을 내세요.
좋은 하루.

[레벨:12]랜디로즈

2008.08.28 13:09:41

목사님의 글을 읽으면 이곳을 추천해준 어떤 선배말처럼 무장해제가 되는것 같습니다.
하나씩하나씩 무장이 해제되면서 꽁꽁 숨겨놓았던 제 속내가 드러난다고 할까요
하나님의 전신갑주라 여겨졌던 무장갑옷을 벗어보니 그곳에 이런 상표가 써져있는듯 합니다
'기독교 패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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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8.28 17:04:23

랜디로즈 님,
짧은 대글로 많은 걸 말씀하셨군요.
무장해제는 바로 영적 성숙의 지름길이군요.
좋은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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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00]정용섭

2008.08.28 23:40:47

제 글에 너무 비중을 크게 두지 마세요.
저는 기도에 관해서 어린아이와 같답니다.
잘 모르는 거지요.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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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14]저별과 달

2008.08.29 00:04:34

클라라님, 저는 이번 주일 내도록 몸이 깔아지고 아무런 의욕도 없이 우울한 시간을 보내었습니다.
오늘 저녁에 합신 전국 장로수련회 가서 김문훈 목사님 설교를 듣고 왔습니다.
코미디언 보다 더 웃기는 목사님 이시더군요..
신학적으로 충실한 설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성도의 삶에 활력을 주는 설교 였던것 같습니다
그 바람에 이번주 내도록 저를 둘러싼 의욕상실과,우울증이 치유된것 같습니다.
때로는 마음 편한 이런 설교도 정신 건강에 좋은것 같군요.
신학이 해결 못하는걸 또 해결 해주는 분도 있군요..
그리고 좀전에 조영남씨 찬양 ( 오늘 집을 나서기 전 ) 을 컴퓨터로 들었습니다.
조영남씨의 이 찬양 참 좋습니다
한번 들어 보세요.. 그리구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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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08.08.29 01:24:39

목사님, 아닙니다.
오늘 말씀으로 그동안 감겼던 제 두 눈이 떠진 것 같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을 향하여 온전한 믿음을 가지셨다는 말씀을
오늘에서야 깨닫게 되나니요!!
너무 감격스러워도 좀 우울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 안이 뻔히 보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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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8]클라라

2008.08.29 01:26:42

저별과 달님,
제 이름을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영남씨의 노래를 듣고 계시군요.
저도 그 분의 노래는 좋아 하는 편인데..
들으면서 힘을 내 보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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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5일 기독교 신앙의 양면성(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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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5일 기독교 신앙의 양면성(2)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막 9:30) 어제 묵상의 마지막 단락인 위로와 불안이 무슨 뜻인지 보충해야겠습니다. ‘위로’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우리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에서만 참된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에게는 위로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위로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림자와 같은 위로입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그 사실에서만 우리는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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