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일 기도의 능력(11)

조회 수 2038 추천 수 8 2008.09.01 23:35:44
2008년 9월2일 기도의 능력(11)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막 9:29)

어제 성문기도와 기도문 읽기에 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저는 좋은 기도문의 한 예로 어거스틴의 기도문을 한편 소개하려고 합니다. 제목은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입니다.

오 주님,/ 누가 나를 이끄시어/ 주님 안에서 쉬게 할 수 있겠습니까?/ 누가 이 마음에 주님을 모시게 하여/ 내 마음을 취하시도록 하고/ 나로 내 죄악을 잊게 함으로/ 나의 유일한 선(善)이 되시는 주님을/ 포용하게 하겠습니까?
주님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자비를 베푸사 주님께 말하게 하소서./ 주님과 무슨 상관이 있기에 나를 명하여/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진노하셔서/ 비참함을 느끼도록 하십니까?/ 주님을 사랑하지 않음이 사소한 비참밖에 안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 주 하나님이며,/ 주님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자비로 말씀하여주소서./ 내 영혼에게 “나는 네 구원이라 이르소서.”(시 35:3)/ 나로 그 말씀을 듣게 하소서.
오 주님,/ 내 마음의 귀가 주님 얼굴 앞에 있사오니/ 나의 귀를 열어주소서./ “나는 네 구원이라.”고 내 영혼에게 말씀해주소서./ 내가 그 말씀을 좇아 주님을 붙들겠습니다.
나에게 주님의 얼굴을 돌리지 마소서./ 내가 주님의 얼굴을 봄으로써/ 육신이 죽게 된다 할지라도/ 내가 살기 위하여 주님의 얼굴을 뵙고자 합니다./ 아멘.
(성한용 편역, 어거스틴의 기도, 대한기독교서회, 48쪽)

저에게는 마지막 연이 깊이 와 닿습니다. 참된 생명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은 저런 기도를 드릴 수 없겠지요.

[레벨:22]머리를 비우고

2008.09.02 08:50:55

아멘!

[레벨:4]주향한

2008.09.02 13:49:23

기도에 있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철학이나 신학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그보다는
상상력을 이용하는 것이 우리들의 지적 호기심을
더 많이 채워줄 수 있을 것이다.
동아줄로 육지에 붙들어 매인 작은배를 상상해 보는것이 좋겠다.
그 배 위에서 밧줄을 끌어 올리면
흡사 육지를 자기편에 당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사실은 육지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배와함께 육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의지를 변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지를 채우고
하나님에게로 이끌려가게 해주는 것이다.
기도의 본질은 하나님께 청하는 우리의 소망이
허락되느냐 않느냐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 안에서 실현되기를 원하고
그 뜻을 신뢰하는데 있는 것이다
오래전 선배가 생일 선물로 준 기도라는 책에 나온 내용입니다
그때 받은 충격이랄까...
그때의 영향이 두고두고 저의 신앙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근데 그뒤로부터 기도를 하려하면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도 않되고
그렇다고 거창하게 이민족과 각 나라들
온 인류등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르침을 받았던 것들에 대해서도
감히 기도 할 수 가 없었습니다
그저 침묵속에 묵상만 하는게 기도의 전부입니다
정목사님의 기도에 대한 QT내용 속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기도의 세계로 다가갈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레벨:4]알고파

2008.09.02 22:22:31

한 인간으로서 정말로 절대자에게 듣고 싶은 말씀을 기도로 표현했군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언어로 그 말씀이 들리진 안겠지만
우리 내면 깊은 곳에서 깊은 확신이 드는 말씀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말씀해 달라는 것은
인간의 욕심인 줄은 알지만 그래도 꼭 듣고 싶은 말씀입니다..
"나는 네 구원이라"
구원이 단순히 죽은 다음에 천당을 가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하는 사람만
동감할 수 있는 기도인 것 같습니다.
"주님, 저의 구원이 되소서..."
profile

[레벨:100]정용섭

2008.09.02 23:18:20

역시 어거스틴은 위대한 신학자, 영성가, 신비주의자, 기도의 사람입니다.
저는 저분의 기도를 읽을 때마다
거시 세계와 미시 세계를 아우르는 생명의 심연에
함께 참여하는 기분입니다.
그 심연은 어둡기도 하고 밝기도 하지요.
차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네요.
그가 모든 것을 보았거나 경험한 것은 아니나
분명히 우리의 스승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의 기도를 배움으로
우리는 기도만이 아니라 하나님, 세계, 인간, 구원 .. 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좋은 밤.
profile

[레벨:26]돌파구

2008.09.03 08:18:35

저도 아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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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5일 기독교 신앙의 양면성(2)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막 9:30) 어제 묵상의 마지막 단락인 위로와 불안이 무슨 뜻인지 보충해야겠습니다. ‘위로’는 긴 설명이 필요 없을 겁니다. 우리는 예수가 메시아라는 사실에서만 참된 위로를 얻을 수 있습니다. 피조물인 사람에게는 위로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위로를 얻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림자와 같은 위로입니다. 예수가 메시아라는 그 사실에서만 우리는 참...

9월4일 기독교 신앙의 양면성(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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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9월4일 기독교 신앙의 양면성(1)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막 9:30) 마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갈릴리를 지나면서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은 이유를 당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예고 때문이라고 보도합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가 앞에서 몇 번 확인했듯이 메시아 비밀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비밀이 유지되려면 가능한 대로 사람들이 그 사실을 눈치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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